235화
4.
슈페언 백작.
페스로 제국을 대표하는 기사이며, 귀족 중 한 명이다. 그가 가진 영향력은 굉장히 크다.
더불어 그는 푸스카 삼황자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런 슈페언 백작 덕분에 푸스카 삼황자의 기세 역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때문에 이런 슈페언 백작을 고깝게 보는 페스로 제국의 귀족들은 적지 않았다.
아니, 적다는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우습다.
제국에는 현재 일곱 황자들이 황태자 위를 놓고 서슬 퍼런 권력쟁투를 벌이고 있다.
달리 말하면 삼황자를 후원하는 슈페언 백작을 고깝게 보는 황자들이 여섯 명이나 된다는 소리다.
아니, 여기에 세력 다툼에 낄 정도는 아니지만 다름 독자적인 정치력을 가진 이황녀의 존재까지 포함하면, 슈페언 백작의 몰락을 기도하는 정치세력이 일곱 개나 된다는 소리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은 슈페언 백작이 콩탄 왕국에서 난리법석 떠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흥! 이러다 다시 콩탄 왕국이 슈페언 백작의 손에 들어가게 생겼소.”
특히 보이드 일황자를 후원하는 이들은 이런 슈페언 백작의 행동을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싫어했다.
“이건 큰 문제요. 콩탄 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건 단순한 것이 아니오.”
“맞소이다. 콩탄 왕국은 제국과 국경을 마주보고 있는 주변국! 그런 콩탄 왕국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건 곧 정치력에 뛰어나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오.”
“황태자 위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여러 덕목 중 정치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모두가 잘 알터.”
특히 콩탄 왕국의 문제는 단순히 조공을 받고, 정치적 입김이 커진다, 수준의 일이 아니었다.
황자들은 증명해야 한다.
자신들이 황태자 위에 걸맞은 자격과 능력이 있음을 말이다.
자격은 모두가 있다. 카이탄 황제의 피를 이은 것 자체가 자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능력은?
솔직히 이게 증명하기 가장 힘들다.
특히 작금의 시대, 카이탄 황제의 평화를 기반으로 한 치세 속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예전 같이 전쟁을 일삼는 제국이었다면 다른 것도 필요없다. 전장에 나가 전공을 세우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전공을 세울 기회가 없다.
그럼 다른 부분에서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가장 눈에 드러나는 능력은 정치력이 될 수밖에 없다. 정치란 건 평화 속에서 오히려 더 치열하고, 치졸해지는 법이니까.
외교력도 정치력의 한 부분이다.
콩탄 왕국을 장악한다는 건 외교력에 뛰어나다는 의미고, 정치력이 뛰어나다는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슈페언 백작을 이대로 놔두면 일황자의 입지는 계속 줄어들고, 삼황자의 입지는 커진다는 소리다.
“아히만트 백작이 콩탄 왕국에 관심을 가진다고 하지 않았소? 근데 왜 지금은 소식이 없소?”
솔직히 콩탄 왕국이 한 차례 흔들렸을 때 일황파 파벌의 귀족들은 콩탄 왕국을 노려보려고 했다.
콩탄 왕국을 놓고 슈페언 백작과 나름 한 판 붙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아히만트 백작이 나섰다는 말 때문이었다.
아히만트 백작은 슈페언 백작을 단신으로 상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항마였다.
더불어 아직까지 황자를 선택하지 않은 중립 위치의 귀족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나선다면, 그리고 아히만트 백작과 슈페언 백작이 충돌을 한다면 어느 쪽이 이기든 큰 피해를 입을 터.
굳이 그 싸움에 끼어서 불필요한 피해를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경과를 보면, 아히만트 백작은 이러다할 움직임이 없고, 슈페언 백작만 난리를 치는 꼴이다.
이쯤 되자 아히만트 백작이 정말 콩탄 왕국에 개입할 생각이 있는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차라리 나섭시다.”
일황자 파벌 중에서 나름 적극적인 행사를 원하는 이들은 말했다.
“기회입니다. 지금 콩탄 왕국 전역에 흑마법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냥 찌르면 됩니다. 콩탄 왕국의 귀족 하나를 처치하면 자연스럽게 주도권의 일부가 올 거니다.”
“하지만 슈페언 백작과 다르게 우리 쪽이 그런식으로 움직이면 비난여론이 커질 수도 있지 않소?”
“역시 콩탄 왕국의 귀족들과 연줄을 만드는 게 우선과제요.”
“사람을 보내는 게 어떻겠소?”
“우리가 먼저 접근하는 모양새는 솔직히 무게감이…….”
“그럼 편지를 보냅시다. 편지 정도라면 모양새는 어느 정도 나올 것 아니오?”
“괜찮은 생각이군.”
그렇게 일황파 파벌의 귀족들이 콩탄 왕국의 귀족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개중에는 이제르트 백작가도 있었다.
5.
왔다.
문수르는 이 갑작스런 기회 앞에서 과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의문이었다.
“그러니까 무블 공작에게서 편지가 왔다는 말입니까?”
무블 공작.
페스로 제국의 3대 공작 중 한 명이다.
당연히 엄청나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자다. 그 권력은 일국의 왕에 버금갈 정도다.
그런 그가 이제르트 백작가에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별 거 아니었다.
초대장 따위도 아니었고, 콩탄 왕국과 페스로 제국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원한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편지를 보낸 이유는 분명했다.
“손을 잡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군.”
이제르트 백작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슈페언 백작을 견제할 생각인 겁니다.”
이제르트 백작과 문수르는 곧바로 이 편지의 의미를, 이 편지를 보낸 무블 공작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도 콩탄 왕국에 발을 걸치고 싶은 것이다. 하다못해 슈페언 백작이 다시금 콩탄 왕국을 장악하는 걸 막고 싶어하는 것이다.
“무시가 상책이겠지?”
위험하다.
여기서 무블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콩탄 왕국을 페스로 제국의 귀족들의 전장으로 만든다는 의미다. 콩탄 왕국의 미래를 갉아먹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수르의 생각은 달랐다.
‘굳이 손을 잡을 필요는 없지만…… 이용가치는 분명 있다.’
절호의 기회다.
어째서 이렇게 절묘한 순간에 이런 기회가 왔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문수르는 이제르트 백작을 보며 말했다.
“이 편지, 제가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의미인가?”
“슈페언 백작을 견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슈페언 백작.
그 이름에 이제르트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콩탄 왕국은 슈페언 백작에 의해서 흔들리는 중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 피해가 빅토리안 가문의 반역 때보다 심할 정도다.
어떻게든 슈페언 백작을 처치하고 싶은 게 콩탄 왕국 귀족들의 마음이지만, 막상 방법이 없다.
그런데 문수르는 그런 슈페언 백작을 견제할 수 있다고 한다.
모르겠다.
이제르트 백작가는 그 방법까지는 차마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문수르는 그런 이제르트 백작에게 말했다.
“목표는 슈페언 백작과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흠.”
그 말에 이제르트 백작은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르트 백작은 자신이 가진 병력의 힘을 알고 있다.
슈페언 백작과 싸우면 지진 않는다. 아니, 성을 두고 싸우면 승산은 굉장히 높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명분이 필요하다, 그거로군.”
“무블 공작이라면 슈페언 백작이 콩탄 왕국에서 패배할 경우, 오히려 그걸 비난해주고, 폄하해줄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이제르트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이해했다. 또한 가능성도 높고, 그럴싸한 계획이다.
실패 확률도 생각보다는 낮다.
하지만!
실패에 따른 리스크, 낮은 확률이지만 그에 따른 리스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이제르트 백작가가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문수르도 그렇기에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 순간 이제르트 백작은 느꼈다.
‘내가 결정할 사안이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운명을 건 일이다. 그런 일을 결정할 수 있는 건 세상 천지에 오직 한 명, 이제르트 백작뿐이다. 그가 이제르트 백작가의 주인이니까.
‘나라면…….’
이제르트 백작은 고민했다.
오래 고민했다.
수십여 분 동안 고민만했다.
문수르는 그런 이제르트 백작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충분히 심사숙고해도 모자랄 사안이니까.
그 순간 이제르트 백작이 입을 열었다.
“보다 원할한 일을 진행하려면 제국으로 떠나야겠지?”
“그렇습니다.”
“자네가 없다면, 테블스 산 개간 작업은 늦춰질 수밖에 없겠군.”
“일을 끝내고 움직일까요?”
“이리아 때문인가?”
순간 문수르는 입을 다물었다.
문수르가 이렇게 무리하게 움직이는 이유, 이제르트 백작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난 분명히 말했네. 이리아, 그 아이의 목숨이 이제르트 백작가에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히 포기하겠다고.”
“하지만…….”
“문수르 경. 나는 누가 목숨이 더 소중하다고 말하지 않겠네. 하지만 적어도 이 영지에 필요한 건 이리아가 아니라 자네일세.”
그 순간 이제르트 백작이 결단을 내렸다.
“오히려 이곳에 있다면, 자네의 고민이 깊어지겠지. 제국으로 떠나게. 일을 진행하게.”
이제르트 백작은 차라리 문수르를 제국으로 보내는 것이, 다른 일에 신경 쓰게 만드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리아를 구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말이다.
문수르는 고개를 숙였다.
명령이다.
문수르에게는 이 명령을 거부할 권한 따위는 없었다.
“명을 받듭니다.”
6.
제국행은 은밀하게 결정됐다.
드러낼 필요가 없었을 뿐더러, 이제르트 백작가 입장에서는 문수르의 공백을 최대한 감추고 싶었다.
단순히 외부에만 감추는 게 아니었다.
문수르는 이제르트 백작가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공백에 가장 흔들리는 건 그 누구도 아닌 이제르트 백작령의 영지민들, 병사들 그리고 기사들이 될 테니까.
시기는 딱 좋았다.
문수르가 휴식을 취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문수르는 계속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적어도 병사들과 영지민들은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다.
그 틈을 노려, 문수르는 곧바로 제국으로 향했다.
제국으로 가면서 준비한 것은 하나였다.
무블 공작의 편지.
그거면 충분했다. 솔직히 어설프게 다른 것들을 준비하는 것보다는 무블 공작의 편지 한 장이, 무블 공작가의 인장이 찍힌 편지가 그 무엇보다 확실한 증표였다.
문수르는 빠르게 이동했다.
그런 문수르가 향한 곳은 무블 공작가는 아니었다. 당장 무블 공작가를 찾아가는 건 거리도 멀 뿐더러, 다른 문제가 생길수도 있다. 문수르가 찾은 건 콩탄 왕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무블 공작을 따르는 귀족, 헤울라 자작의 영지였다.
7.
헤울라 자작은 편지를 보았다.
“이제르트 백작이 손을 잡을 모양이군.”
그는 미소를 지었다.
“좋은 기회가 왔어.”
무블 공작이 슈페언 백작의 견제를 위해 콩탄 왕국의 나름 힘있는 귀족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은 알고 있었다.
몇 곳에서 대답이 왔다.
하지만 개중에서 헤울라 자작의 마음을 끈 것은 이제르트 백작가의 편지였다.
“이제르트 백작가 정도면 충분하지.”
나름 대어가 잡혔다.
최근 들어 콩탄 왕국에서 가장 기세가 좋은 귀족 중 한 명 아닌가?
더군다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슈페언 백작과 사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슈페언 백작이 필로스 왕을 미는 바람에 카스트로 왕세자를 따르던 이제르트 가문이 아주 몰락할 뻔했다.
지금 이렇게 다시 가세를 일으켜 세운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울 지경이다.
“좋아.”
딱 맞는 인물이다.
슈페언 백작을 견제하기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