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71화. 제국.>
1.
슈페언 백작이 어니언 자작가를 공격했다!
이 사실은 콩탄 왕국 전역을 휩쓸었다.
타국의 귀족이 자국의 귀족을 공격한 건 명백한 전쟁선포나 마찬가지였다. 전면전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슈페언 백작에게 검을 겨누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단순히 페스로 제국의 귀족이라서?
아니었다.
슈페언 백작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어니언 자작은 사악한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 페스로 제국의 귀족이자 기사인 나, 슈페언 백작은 그 사악한 흑마법사의 행패에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흑마법!
명분에 있어서 이보다 확실한 건 없다.
물론 명분이 명백하다고 해도, 증거가 확실하다고 해도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콩탄 왕국의 귀족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 혼란은 콩탄 왕국의 귀족들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
“슈페언 백작의 행동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필시 제국에 항의를 해야 합니다.”
슈페언 백작의 행동에 분개하는 자들.
그들은 제이머스 공작과 왕에게 말했다. 슈페언 백작의 행동은 엄연히 국권을 무시하는 행위로, 제국에 대한 강한 항의가 필요하다고.
물론 반대되는 의견들도 있었다.
“이번 기회에 제국에 협조를 요청하는 게 최선이라고 봅니다. 가뜩이나 빅토리안 가문의 반역 사건 이후 왕국의 국력은 많이 쇠퇴한 상황입니다. 또한 흑마법을 뿌리 뽑는 데에는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오히려 제국이 나서서 그들을 처리해준다면 더 이상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슈페언 백작의 행동에 충분한 명분이 있으며, 오히려 제국에 협조하는 것이 왕국에 이익이 되는 것이다.
이 역시 충분히 납득과 이해가 가능한 주장이었다.
자연스럽게 의견 대립이 이루어지는 건 당연지사.
항의파와 협조파, 두 파벌이 나위어서 정치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공작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다.
애매했다.
필로스 왕이든, 제이머스 공작이든 어느 한쪽 편을 드는 순간 단순한 의견 싸움은 정치판을 양분하는 두 거대 파벌의 등장으로 변질될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결정을 내리는 건 부담감이 너무 컸다.
결국 결정은 미뤄졌다.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후작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채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슈페언 백작은 콩탄 왕국을 헤집고 다니며, 무자비한 폭력과 파괴를 일삼기 시작했다.
2.
테블스 산 개간작업이 시작된지 두 달이 지났다.
테블스 산 개간작업은 50퍼센트 정도가 진행됐다. 어마어마한 작업 속도였다.
그 말도 안 되는 몬스터들의 소굴을 50퍼센트나 개간했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건 개간이라기보다는 파괴에 가까운 일이었다. 개간된 땅에 대한 관리나 감독은 불가능했다. 그저 활활 타오르는 불꽃마냥 무식하게 테블스 산을 헤집을 뿐이었다.
이 와중에 파괴한 흑마법사의 던전은 7곳이었다. 큰 소득이라면 큰 소득이다.
그러나 이제르트 백작가에 큰 문제가 생겼다.
“문수르 경이 쓰러져?”
“예.”
“기어코…… 기어코 무리를 하더니…….”
문수르가 쓰러졌다.
“지금 상황이 어떠하느냐?”
“헤인 경께서 치료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헤인 경이 말씀하시길, 피로 누적에 의한 것이라 휴식 외에는 이러다할 치료법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겠지.”
이야기를 들은 이제르트 백작은 그 말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수르는 정말 말이 안 나올 정도로 강행군을 했다. 이제까지 버틴 게 신기할 지경이다.
“영주님, 어떻게 할까요?”
기사는 질문을 건넸다.
문수르가 강행군을 한 덕분에 테블스 산 개간 작업은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문수르가 전력에 이탈했으니, 개간작업에 문제가 생기는 건 당연지사.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개간속도를 늦추거나 아니면 전력을 더 투입해서 무리하게 개간작업을 진행하거나.
이제르트 백작의 결정은 이미 나와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속도를 늦추도록. 일단 문수르 경의 회복 그리고 영지의 전력 유지가 최선이다.”
“알겠습니다.”
“차라리 잘됐군. 숨을 돌릴 필요성이 있었거늘…….”
이제르트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3.
병상에 누운 문수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건 아니었다. 이미 잠은 예전에 깼다. 자신이 쓰러진 이유도 잘 알고 있었다.
“피로 누적이지?”
- 알고 계시니 다행이군요.
로이드가 한 소리 했다.
- 혹시 모르시는 건 아닌가, 했습니다.
“모르긴 왜 몰라?”
- 아시는 분이 그렇게 무리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쓴소리다.
로이드가 몇 번이나 충고했음에도 무리를 하다가 결국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문수르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내 한계군.’
문수르는 좀 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한계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다.
문수르는 일단 몸상태를 점검했다.
상처나 부상은 없었다. 단지 피로 누적 때문에 온몸의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몸이 무거웠다.
솔직히 지금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다. 머릿속도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잠들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러나 문수르는 잠들지 못했다.
“내가 없는 동안 슈페언 백작의 움직임은?”
- 여전히 활발합니다. GPS파일럿이 쫓기 힘들 정도로 콩탄 왕국 곳곳을 들쑤시고 있습니다.
“대단한 양반이군.”
- 여섯 번째 영지가 무너졌습니다. 거침이 없습니다.
“다섯 번째? 두 달 사이에 영지를 여섯 개나 박살을 냈단 말이지?”
- 이동 경로를 보면, 이동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요하고, 막상 영지를 박살 내는 데에는 반나절이면 충분하더군요.
“무시무시한 전력이군.”
슈페언 백작.
지금 문수르의 속을 가장 많이 썩히는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카라카크는 이러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데, 슈페언 백작이 난리를 치고 있다.
그런 슈페언 백작의 목적은 하나다.
필로스 왕이 고개를 숙이길 원하고 있다. 필로스 왕이 예전처럼 고개를 숙이고 제국의 비호 아래 그리고 슈페언 백작의 비호 아래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럼 필로스 왕은 그럴 의도가 있을까?
없다.
만약 그런 의중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터지기 전에, 진즉에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여기서 고개를 숙이는 건 필로스 왕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손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지금 만약 필로스 왕이 슈페언 백작 앞에 고개를 숙이면 그걸로 끝이 난다는 것이다.
필로스 왕은 다시는 반기를 들지 못한다. 죽을 때까지 페스로 제국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한다.
필로스 왕을 만나본 문수르는 단언할 수 있다.
필로스 왕은 자존심이 있는 왕이다. 다시 제국의 주구가 될 바에는 그는 자결을 택할 만한 기개를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슈페언 백작의 움직임을 제지할 방법은 없다. 문수르가 카라카크를 처치한다고 해도 콩탄 왕국은 이미 슈페언 백작에 의해서 만신창이가 되어버릴 것이다.
‘테블스 산 개간 후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
새로운 일이 생겼다.
슈페언 백작을 상대해야 한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 나와있다.
‘슈페언 백작을 함정에 빠드린 후에 이제르트 백작가가 무너뜨리면 된다.’
괜찮은 시나리오가 있다.
슈페언 백작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것이다. 이제르트 백작가가 흑마법과 손을 잡았다는 거짓 정보.
슈페언 백작은 곧바로 이제르트 백작가를 치려고 할 것이다.
애초에 슈페언 백작은 진짜 확실한 정보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그럴싸한 구실만 있으면 된다.
명분?
완전히 개박살이 난 영주는 항변조차 하지 못한다. 명분 같은 건 뒷처리용 휴지일 뿐이다.
그러나 슈페언 백작을 막을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막은 이후에는 명분, 증거는 슈페언 백작을 제대로 옭아맬 수 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건 이제르트 백작가 뿐이다.
슈페언 백작가의 병력은 장난이 아니다. 지금 그는 총 11대의 기가스로 움직이고 있다.
10대의 기가스는 전부 2배 급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만 2배 급이지, 기타 국가에서 사용하는 2배 급보다는 스펙이 높다.
기가스는 출력이 중요하긴 하다. 그러나 출력이 전부는 아니다. 어떠한 재질로 만들어졌는가, 어떤 무기를 쓰는가, 어떤 파일럿이 운전하는가, 이 모든 게 종합적으로 어우러진 것이 바로 기가스의 전투력이다.
슈페언 백작가는 최상급이다.
2배 급 기가스지만, 제작에 사용된 금속들은 드워프의 특수한 노하우가 깃들어간 합금들이다.
기가스 파일럿들은 두말할 것도 없다. 다른 영지에 가면 기사단장은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가 평기사로 머무르고 있다.
그런 기가스가 10대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3배 급 기가스, 골든 자이언트가 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영주 대여섯 명이 연합을 하지 않고서 슈페언 백작의 병력을 상대하는 건 무리가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어느 영주들이 연합해서 슈페언 백작을 친다면, 그건 백작을 향한 공격이 아니라 페스로 제국을 향한 공격이다.
결국 단일 전력으로 슈페언 백작을 막아야 한다는 건데 콩탄 왕국에서 그게 가능한 건 오직 한 곳, 이제르트 백작가 뿐이다.
그리고 이제르트 백작가는 굉장히 높은 확률로 슈페언 백작가의 전력을 막을 수 있다.
30여 대의 아이언히트를 비롯해서 다수의 1배 급, 2배 급 기가스들. 기가스 대수만 40대다.
여기에 드래곤 파이터는 골든 자이언트보다 강하다.
승산은 확실하다.
로이드가 이미 시뮬레이션을 마쳤다.
대승을 거둘 확률은 77퍼센트.
승리를 거둘 확률은 95퍼센트.
엄청나게 높다. 더군다나 대패할 확률,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확률은 퍼센티지로 계산해도 소수점이다.
솔직히 슈페언 백작 자체는 무섭지 않다.
함정에 빠뜨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호전적으로 움직이는 슈페언 백작이라면 의심 없이 미끼를 물 테니까.
다 쉽다.
다 쉬운데 그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이유는 하나.
“슈페언 백작이 당하면 제국이 움직이겠지.”
페스로 제국!
콩탄 왕국 입장에서는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이 거대한 제국이 슈페언 백작의 후광이다.
슈페언 백작이 무너지면 페스로 제국은 명분 따위는 버린 채 콩탄 왕국을 향해 칼끝을 겨눌 것이다.
그렇게 되면 콩탄 왕국은 물론 이제르트 백작가는 끝장이다.
‘젠장.’
때리는 건 쉬운데, 때리면 후환이 두려운 상황. 가장 골치 아픈 상황이다.
‘정치다.’
결국 이걸 어찌하기 위해서는 정치를 통해 돌파구를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히만트 백작이 콩탄 왕국에 관심을 가진다고 했어.’
콩탄 왕국 내에선 그 누구도 슈페언 백작의 대항마가 될 순 없다.
대항마를 세우려면 페스로 제국의 인물을 데리고 와야 한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아히만트 백작. 하지만 솔직히 문수르는 아히만트 백작이 콩탄 왕국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아히만트 백작의 행보는 득보다 실이 많은 상황이니까.
겉으로 보기엔 득보다 실이 많은데 그렇게 한다는 건,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이익이 있다는 의미다.
그 이익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히만트 백작과 손을 잡는 건 불가능하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와 접점을 만드는 건 힘들다.
‘새로운 대항마가 필요해.’
제 3의 인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제3의 인물을 구하기 위해서는 결국 문수르, 그가 제국에 가야 한다.
“제국…….”
어떤 의미에서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