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5.
필로스 왕은 고개를 숙였다.
“암운이 들이우는구나.”
폭풍이 지나가고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후에 지진이 일어났다.
지금 필로스 왕이 느끼는 것은 그런 것과 비슷했다.
이제르트 백작가에 서찰을 보낸 직후 불스 후작령의 사건이 필로스 왕의 귀에 들어왔다.
자세한 건 모른다.
워낙 경황이 없었을 뿐더러, 갑작스런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필로스 왕은 충분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흑마법사가 움직인 거겠지.’
간략하게 알려진 사실만 보더라도 이건 필시 흑마법사의 수작임이 분명했다.
예상은 했다.
빅토리안 공작에게까지 마수를 뻗친 흑마법사가 다른 귀족들을 그냥 놔뒀을 리는 없다.
필시 다른 귀족들 중 일부도 흑마법사의 마수에 빠져 꼭두각시 신세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콩탄 왕국을, 필로스 왕을 무너뜨리기 위해 암중모략을 꾸미고 있겠지.
그러나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갑작스럽게 일을 터뜨릴 줄은 꿈에도 상상조차 못했다.
특히 불스 후작령 다음으로 새로운 폭풍이 몰려왔다.
“슈페언 백작…… 설마 그가 기획한 건 아니겠지?”
슈페언 백작.
그가 냄새를 맡았다. 어느새 이미 전 병력을 이끌고 콩탄 왕국의 국경을 넘은 상황이다.
지금 상황에서 필로스 왕이 그 슈페언 백작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명명백백하게 흑마법사의 흔적이 드러났다. 이것으로 콩탄 왕국에 흑마법사가 숨어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슈페언 백작이 흑마법사 타도를 명분 삼아 콩탄 왕국에 행패를 부려도 그걸 막을 명분은 없다.
막으려면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순 없는 상황.
“빌어먹을.”
필로스 왕은 이마를 만졌다. 어쩌다가 이런 식으로 상황이 꼬이게 된 것일까?
아니, 솔직히 상황이 꼬인 건 둘째 치고 이 모든 과정에서 필로스 왕이 실수를 했다거나 그래서 생긴 부분은 거의 없었다. 필로스 왕 입장에서는 뜬 눈으로 도둑질을 당한 기분이다.
그래서 더 기분이 좋지 못했다.
또한 상황이 더 복잡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하지만 그 무엇보다 겁나는 건 이번 일이 필로스 왕의 의중이나 의도와는 상관 없이,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벌여진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손이 닿는 범위 내에서 문제가 일어나면 수습이 가능하다. 하지만 손이 닿지 않는다면?
수습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더 큰 파멸, 몰락이 몰려올 것이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이걸 내가 수습 가능한 상황으로 만들어야 한다.”
당장 수습을 기대하는 건 무리가 있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졌는데, 하루아침에 수습될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수습이라도 시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 당장 필로스 왕이 해야 하는 일은 바로 그런 일이었다.
6.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주요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탈라트 부족과 호우투 부족도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문수르는 말했다.
“테블스 산의 개간에 강수를 두도록 하겠습니다.”
갑작스런 선언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지금 이 자리는 흑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자리가 아니었나?”
모두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그 무엇도 아닌 수백 년 전 악명을 떨친 흑마법사 카라카크를 상대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수르는 그런 그들에게 흑마법사 카라카그가 아닌 테블스 산 개간이란 주제를 꺼내든 것이다.
놀라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문수르는 단호하게 말했다.
“테블스 산의 개간이 최우선입니다.”
“설명을 해주게.”
이제르트 백작이 질문을 건넸다. 지금 그는 기분이 좋지 못했다. 이리아가 납치된 상황에서 기분이 좋을 리 만무하다. 최악이다. 시궁창에 빠져 있는 느김이다.
물론 이제르트 백작은 그런 자신의 기분 때문에 부하에게 분풀이를 하는 이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슬픔, 절망 속에서도 회의에 참석한 건 그의 의지가 얼마나 단호한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흑마법사 카라카크는 이제까지 무수히 많은 실험, 그리고 강력하기 그지없는 병기를 그 어디도 아닌 테블스 산에서 만들었습니다.”
문수르가 설명을 시작했다.
“쉽게 말해서 카라카크에게 테블스 산은 병참기지나 다름없습니다. 병력 수급, 물자 수급 등 모든 일을 테블스 산에서 이룹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고 설명이었다.
“그런 테블스 산이 지금 유래가 없을 정도로 허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개간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역시 맞는 말이었다.
지금 테블스 산은 수백 년 간 쌓아온 악명이 정말 맞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몬스터들의 개체 수도 확실히 줄어 있었을 뿐더러, 강력한 몬스터들, 오우거의 숫자가 굉장히 적었다.
이에 비해 이제르트 백작가 쪽은 유래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군대, 아이언히트 부대를 이용해 효과적인 테블스 산 개간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개간작업은 순조로웠다.
그렇다고 속도를 무리하게 높이진 않았다. 개간작업은 어디까지나 지킬 수 있는 만큼의 땅을 확보하는 게 최우선의 과제였으니까. 지킬 수도 없는 땅마저 확보했다가는 나중에 더 큰 곤욕을 지를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문수르는 그 방향을 바꾸고자 했다.
“이제까지 테블스 산의 개간 목적은 어디까지나 토지 확보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지킬 수 있는 선까지 개간한 후에 천천히 방책을 쌓아두는 방법을 쓰고 있지.”
“맞습니다.”
“그럼 그 방법을 바꾸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문수르의 계획.
“테블스 산 곳곳에 숨겨진 카라카크의 던전, 연구실을 포인트 삼아 그곳을 파괴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을 것입니다. 그 다음 과제는 테블스 산을 쓸어버리는 겁니다.”
“쓸어버린다고?”
문수르가 폐욤 족장을 바라봤다.
사전에 약속을 했다. 테블스 산을 개간해도 숲의 일부를 남겨주겠다고. 그 숲을 엘프들의 숲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이제르트 백작 역시 충분히 납득하고 허락했다. 합의를 이룬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 문수르는 그 합의를 뒤집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폐욤 족장에게 눈빛으로 양해를 구했다.
문수르, 그는 모든 걸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테블스 산과 관련된 것이면 그 전부를 쓸어버려서라도 카라카크의 던전을 파괴하고, 그의 기반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폐욤 족장이 그런 문수르의 생각을 읽었다.
폐욤 족장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카라카크를 처치하는 게 더 중요하다.’
폐욤 족장 역시 카라카크가 탈라트 부족의 엘프들을 잡아다가 생체 실험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노와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엘프를 가지고 생체 실험을 하고 연구를 했다는 건, 엘프들에게도 굉장히 효과적으로 먹힐 사악한 흑마법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특히 최근 몇 가지 상황을 봤을 때 탈라트 부족의 신목, 바나푸스 나무에 이상이 생긴 건 카라카크가 부린 수작 때문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다.
즉, 카라카크는 신목마저 오염시키고,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의미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엘프에게 신목의 존재는 너무나도 귀중하다. 그런 신목을 오염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니?
지금이야 카라카크가 그 표적을 인간으로 삼고 있기에 엘프들이 무사할 수 있는 거지, 카라카크의 표적이 엘프로 바뀌는 순간 가뜩이나 인간에 쫓겨 제 힘을 쓰지 못하는 엘프 부족들은 미친 듯이 죽어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실제로 탈라트 부족도 문수르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지금 테블스 산에서 썩은 시체가 되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카라카크의 존재는 엘프 족에게도 굉장히 위협적인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카라카크의 뿌리가 남아있을지 모르는 테블스 산에 엘프들의 숲을 만든다는 건 멍청한 짓이다.
폐욤 족장의 허락에 문수르는 말을 이어갔다.
이미 준비해온 것들을 펼쳐 놓았다.
“이건……?”
“설마?”
특히 개중에서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끄는 게 있었다.
“맞습니다. 테블스 산의 지도입니다.”
“굉장하군요. 이렇게 자세한 지도는 처음입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지도를 구한 겁니까?”
어스 월드에서 통용되는 지도처럼 등고선이 정확히 표시되어 있고, 지리지형이 확실하게 표시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케르빈 월드의 문명 수준으로 봤을 때는 쉽게 만들 수 없늘 정도로 자세한 지도였다.
하물며 그 대상이 테블스 산 아닌가?
지도를 만들려면 당연히 두 발로 뛰어서 측정하는 걸 당연히 여기는 케르빈 월드에서는 테블스 산과 관련된 지도가 극도로 적었다. 그 누구도 테블스 산에 고작 지도를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측량을 하려 하지 않았으니까.
“현재 몇 곳을 카라카크의 던전이 있을 만한 장소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지도는 GPS시스템을 기반으로 케르빈 월드의 문명 수준에 맞춰 다운그레이드 한 버전이다.
문수르는 그런 지도에 대한 설명은 건너 뛰었다. 일일이 설명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냥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문수르는 자신이 예상한 지역을 지목했고, 거기까지 갈 수 있는 루트를 말해줬다.
그리고 역할을 알려줬다.
“이제부터 테블스 산의 개간 목적은 무조건 던전에 대한 타격입니다. 불을 질러도 좋고, 무차별 공격을 해도 좋습니다. 아예 땅을 무너뜨려도 상관없습니다. 무조건 카라카크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게 최우선 목적입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의심 가는 부분은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문수르다.
여기 모인 이들 중에 문수르의 능력을 의심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제까지 문수르가 보여준 말도 안 되는 능력들은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모두는 긴장했다.
‘문수르 경이 이 정도로 말을 하는 걸 보면…….’
‘이번 일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의미겠지.’
문수르가 이 정도까지 단호하게 말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문 경우었으니까.
그때였다.
“모두들…….”
조용히 문수르의 브리핑을 보고 듣고 있었던 이제르트 백작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모두가 반응했다.
모든 이들이 이제르트 백작을 주목했다. 사실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은 이제르트 백작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제르트 백작은 좋은 영주다. 세상천지에 이제르트 백작만한 영주는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그런 그에게 큰일이 생겼다. 아니, 이제르트 백작가에 큰일이 생겼다.
이리아 이제르트의 납치…….
이리아 역시 좋은 영주의 딸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제 역할에 충실하게 임했다.
더군다나 안주인이 없는 이제르트 백작가의 안주인 역할을 훌륭하게 대신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더욱더 열심히 노력했고, 그 때문에 이제르트 백작가를 대표해 불스 후작가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런 변고를 당한 것이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보통은 이 허탈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폐인이 되는 자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영주의 의무를 위해서 이제르트 백작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평소처럼 행동했다.
그런 그가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다.”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말을 듣겠다는 의미였다.
“나의 딸, 이리아 이제르트가 흑마법사에게 납치당한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그런 이제르트 백작의 입에서는 금기나 다름없는 말이 나왔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그 누구도 이제르트 백작 앞에서 이리아와 관련된 말을 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제르트 백작 본인이 그 말을 꺼낸 것이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켰다.
그 정도로 긴장되는 상황이었다.
그 긴장감 속에서 이제르트 백작이 말을 이어갔다.
“카라카크란 사악한 흑마법사가 나의 딸을 데리고 이제르트 백작령을 위협할 시에 나는 조금의 타협도, 협상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선언했다.
그 선언에 모두가 소리쳤다.
“로드의 명을 받듭니다!”
이제르트 백작, 그가 단호한 결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