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70. 블레이더.>
1.
불스 후작령은 불타고 있었다.
문수르가 지른 불은 당연히 아니었다.
“이렇게 나오는 건가?”
타오르는 건 불스 후작의 성이었다. 굳건하게 세워진 그의 성이 타오르고 있었다.
“보통 불길이 아닌 것 같은데…….”
- 제가 보기엔 화염계 흑마법 중 하나인 저주의 불꽃 같습니다.
“저주의 불꽃?”
- 굉장히 지독한 마법입니다. 한 번 불이 나면 절대 끌 수 없는 마법입니다.
“그럼 여기 흑마법사가 왔다는 의미야? 카라카크가?”
흑마법이 사용됐다는 건 흑마법사가 왔다는 의미일 터. 문수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기서 카라카크와 조우한다면…… 기회일수도 있고 반대로 절망일수도 있다.
뭐든 간에 흑마법사가 이곳에 있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어떻게든 반응을 보여야 한다.
- 위치는 파악되지 않습니다.
로이드는 열심히 정보를 수집했지만 흑마법사에 대한 정보는 찾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 괴물들은?”
- 전부 대피한 듯합니다.
“대피?”
- 아무래도…… 주요 요인들은 납치를 한 듯 보입니다.
납치라는 말에 문수르의 표정이 굳어졌다.
- 시체들 중 대부분이 기사들이나 병사 또는 하인, 하녀들입니다. 귀족의 시체는 많지 않습니다.
로이드가 설명을 추가해줬다. 문수르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상대의 목적이 요인 살해가 아니라, 요인 납치라고? 상황이 더 골치 아파졌다는 의미다.
귀족을 이용해서 부릴 수 있는 수작은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반대로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이리아 아가씨는?”
- 이제르트 백작가 소속의 기사들의 시체는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이리아 아가씨의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이리아 아가씨 역시 납치됐을 가능성이 높을 듯합니다.
이리아 이제르트.
그녀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건 분명히 긍정적인 부분이다.
정말 최악의 상황은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오히려 더 최악으로 빠질지도 모른다. 이리아의 몸값은 과연 얼마나 될까?
‘금전적인 거면 다행이지. 만약 영지에 대한 문제라면…….’
카라카크, 놈이 돈을 요구할 가능성은 없다. 인질을 이용해 다른 부분에서 이익을 추구할 것이다.
특히 이제르트 백작령은 어떤 의미에서 카라카크에게 가장 눈엣가시나 다름없는 존재다.
‘테블스 산 개간을 포기하라는 요구가 나올수도 있지.’
뭐가 됐건 이제르트 백작가에 굉장한 무리가 되는 요구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정말 그런 상황이 온다면, 이제르트 백작은 과감하게 결단을 내릴 것이다.
이리아의 목숨을 포기하는 쪽으로 말이다.
가슴이 아플 결정이겠지만 이제르트 백작은 딸아이의 목숨을 위해 영지를 포기하는 선택은 절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막아야 한다.
어떻게든 영지도 구하고, 이리아도 구해야 한다. 적어도 문수르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위치 추적은?”
- 시도 중입니다.
“그럼…….”
문수르는 고개를 돌렸다. 불타오르는 불스 후작의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을 질렀다는 건 더 이상 불스 후작령에 볼일이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납치가 목적이라고 했다. 불스 후작령을 점거한다거나 농성을 벌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단 상황은 이것으로 종료다.
“젠장!”
그렇게 문수르는 아무런 소득도 없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2.
우연일까? 아니면 노림수일까?
문수르가 블레이더의 시체를 회수해 영지로 돌아왔을 때, 필로스 왕으로부터 편지가 막 도착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라울 백작가를 치라고?”
라울 백작가에 흑마법사의 흔적이 있으니, 이제르트 백작가가 라울 백작가를 공격하여 흑마법의 흔적을 발본색원하라는 내용이었다.
문제될 건 없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방금 막 불스 후작가에서 일어난 일을 필로스 왕은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이런 편지를 보낸 것일까?
“이제르트 백작님은 어떠십니까?”
문수르는 이 소식을 알려준 포비어 경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제르트 백작의 상황을 질문했다.
솔직히 문수르는 말하면서도 겁을 먹었다.
‘설마…….’
문수르가 가져온 소식은 비보 중의 비보였다. 이리아가 납치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제르트 백작가의 얼굴 위에는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감정 자체가 삭제된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너무 놀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건지…… 뭐든 간에 좋은 반응은 아니었다.
그 이후 이제르트 백작은 칩거했다. 상황이 긴박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문수르는 그런 이제르트 백작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자신 때문에,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영지는 돌아갔다.
불스 후작은 이제르트 백작령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불스 후작령의 상황을 전했다.
“내 성이 불타오르고 있다고?”
“예, 그것도 그냥 불길이 아니라 흑마법을 이용한 불길인 듯보였습니다.”
“적은?”
“아무래도 적의 목적은 불스 후작령의 점거가 아니라 요인의 납치인 듯합니다.”
“물러났다는 의미로군.”
불스 후작의 반응은 의외였다.
성이 불탄다는 말을 전해주면 크게 놀라리라 예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성이 불타고, 그걸 자기 재건하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적지 않은 돈이 든다.
엄청난 재산적 피해를 입은 셈이다.
앉아서 큰돈을 날린 셈이다.
그러나 불스 후작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음? 뭐가 말인가?”
“아니, 성이 불탔는데…….”
“성? 흥.”
불스 후작은 문수르의 걱정에 콧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새로 지었어야 하는 성이지. 더군다나 성 하나 때문에 벌벌 떨 정도로 궁색하진 않네.”
“그렇습니까?”
“그보다 놈들이 내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니, 그건 다행이군.”
“그럼 곧바로 성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혹시 모를 잔당에 대비해야 하니, 이제르트 백작가에 공식으로 병력을 요청하겠네.”
곧바로 돌아가겠다는 의미다.
하긴, 이제르트 백작가에 오래 있어봤자 불스 후작에게 좋은 점은 하나도 없다. 하루 빨리 영지로 돌아가야 여러 모로 그에게도 이익이다. 또한 영지 상황도 빨리 수습해야 한다.
이제르트 백작가에 정식으로 병력을 요청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문수르는 살짝 고민했다.
‘불스 후작을 끌어들일까?’
라울 백작가.
왕명이 떨어졌다. 그럼 이유불문하고 무너뜨려야 한다. 흑마법을 발본색원하라?
달리 말하면 라울 백작가는 콩탄 왕국에서 없애라는 소리다. 라울 백작가를 치는 일은 쉽지 않다. 어쨌거나 제이머스 공작의 측근이다.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면 주변 이들이 알아서 라울 백작가와 거리를 두겠지만, 귀족들의 관계는 상상 이상으로 끈끈하다.
더군다나 라울 백작가 혼자만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을까?
‘배경에는 카라카크가 있다.’
다른 흑마법사도 아니고 카라카크라는 괴물이나 다름 없는 흑마법사가 고작 빅토리안 공작과 라울 백작, 이 둘에게만 마수를 뻗쳤을 리 만무하다.
콩탄 왕국의 귀족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카라카크의 마수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라울 백작가가 무너지는 걸 다른 귀족들이 그냥 두고만 볼 리는 없다.
라울 백작가가 당하면 다음은 그들 차례일 테니까.
유유상종, 서로 살기 위해 어떻게든 서로를 도울 것이다. 서로의 생존을 도모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정치적 파벌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파벌은 무력으로만 진압하기 힘들다.
흑마법에 대한 증거?
확실한 증거가 있어도 어쩔 수 없는 게 지금의 시대다. 케르빈 월드의 문명 수준 그리고 사람들의 가치관의 수준은 조잡하기 그지없다. 찬송가를 부를 줄 알면 신의 사랑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이 시대의 역사는 기록되는 게 아니다. 승자를 기준으로 서술되는 것이다.
‘그 이유 때문에 필로스 왕도 부담을 느껴서 이제르트 백작께 부탁을 한 거겠지.’
필로스 왕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더군다나 왕인 그가 라울 백작을 핍박하면 누가 보더라도 제이머스 공작을 견제하는 모양세가 나온다.
필로스 왕이 증거를 들이밀어도 귀족들은 조작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래서 왕과 귀족 사이의 전투가 아니라, 귀족 간의 결투로 몰아붙이려는 거다.
‘이제르트 백작가에도 부담스럽다.’
당연한 말이지만 왕이 부담을 느끼는데 이제르트 백작가라고 부담을 느끼지 않을 리 만무하다.
오히려 부담은 더 크다.
이제르트 백작가는 예전보다 세가 커지긴 했지만 정치적 우군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또한 지금이야 힘이 있고 정치적 입지가 있으니까 귀족들이 알랑방귀를 뀌는 거지, 속으로 이제르트 백작가를 질투하는 귀족 가문 역시 상당수다. 이제르트 백작가가 모난 짓을 하면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모난 곳은 부수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여기서 불스 후작의 필요성을 느낀다.
불스 후작은 이미 강력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그뿐인가? 그에게는 명분이 있다.
그는 흑마법사에게 당했고, 흑마법사는 불스 후작의 성을 불태우고 기사들을 죽이고, 귀인들을 납치했다.
불스 후작이 흑마법사를 때려 죽이는 건 너무나도 정정당당한 행위라서 제지할 수가 없다.
하지만 반대로 불스 후작 역시 이제르트 백작가가 이 모든 사실을 알려주면 순수하게 이제르트 백작가를 위해서 일을 진행하진 않을 터. 속마음을 숨기고 새로운 이익을 도모할 게 분명하다.
문수르는 거기서 멈칫했다.
‘나중을 기약하자.’
때가 아니다.
불스 후작이 다시 영지를 탈환하고, 정리한 후에 이야기를 진행해도 늦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이제르트 백작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맙네. 내 이제르트 백작가의 도움은 결코 잊지 않겠네.”
잊지 않는다.
고마운 말이다.
문수르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4.
폐욤 족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찌 이런 것이…….”
그의 앞에는 블레이더의 시체가 있었다. 흉악하고 참담한 시체였다. 그러나 폐욤 족장의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건 시체의 처참함이 아니었다. 블레이더에 시술된 온갖 것들…… 흑마법을 이용핸 개조들이었다.
그 무렵이었다.
문수르가 폐욤 족장을 찾아왔다.
“무언가 알아내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문수르는 마법적 지식이 있지만, 폐욤 족장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다.
때문에 블레이더에 대한 처리를 페염 족장에에 위임했다. 폐욤 족장 역시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특히 던전에서 발견된 엘프 시체가 폐욤 족장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몬스터에게 잡아 먹힌 줄 알았다. 그게 아니면 그냥 폐욤 족장의 뜻에 맞지 않아 다른 곳으로 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카라카크라는 사악한 흑마법사에게 잡혀 제대로 죽음조차 맞이하지 못한 채 고문이나 다름없는 생체실험을 당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폐욤 족장은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왔다. 그 고통이 폐욤 족장의 결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몇 가지 알아냈네. 적어도 이 괴물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있게 됐네.”
“그렇습니까?”
“하지만 이 괴물들은…… 기존의 그 흑마법을 가려내는 탐색 마법, 검색 마법으로는 절대 구분이 불가능하네. 이 괴물 스스로가 괴물임을 증명하기 전까지는 말일세.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군. 좀 더 연구가 필요할 테니.”
그 말에 문수르는 고개를 숙였다.
최악이다.
백신이 듣지 않는 강력한 바이러스가 발병된 셈이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문수르는 고개를 돌렸다.
폐욤 족장에세 들을 말은 전부 들었다. 그렇게 돌아서 떠나는 문수르를 보며 폐욤 족장은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