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7.
필로스 왕은 고민했다.
‘라울 백작가.’
라울 백작가에서 발견된 흑마법사의 흔적. 이건 두말할 것도 없다. 뿌리를 뽑아야 한다.
그 사실을 필로스 왕이 알게 된 순간부터 라울 백작가는 더 이상 콩탄 왕국에 남아있을 수 없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 한다. 혹여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라울 백작가를 공격하는 건 문제가 있다.’
라울 백작가.
제이머스 공작의 측근이다. 물론 제이머스 공작이 라울 백작가를 옹호해준다는 말은 아니다. 제이머스 공작 역시 흑마법에 대한 경각심을 충분히 품고 있으니까.
아니, 콩탄 왕국의 그 누구도 흑마법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란 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정치적으로 큰 소란, 특히 왕권을 위협하는 반역이 일어난 직후 소란이 잦아들기도 전에 왕이 귀족을 핍박했다는 것.
그 사실이 중요하다.
그 과정의 명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아니, 오히려 흑마법이란 명분을 가지고 라울 백작가를 치면 다른 귀족들은 의심할 것이다.
필로스 왕이 라울 백작가를 몰락시키기 위해 거짓 증거를 꾸몄다…… 그런 식으로 말이다.
충분히 가능하다.
실제로도 정치에서 적을 함정에 빠뜨린 후에 그것을 명분 삼아 그 적을 몰락시키는 건 굉장한 고단수로 취급 받는다.
아무리 증거를 들이대도 믿지 못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라울 백작가를 뿌리 뽑은 대가로 필로스 왕은 귀족들의 견제를 받아야 한다.
또한 제이머스 공작을 중심으로 귀족들이 응집할 것이다. 간신히 이룩했던 제이머스 공작과 필로스 왕의 연계는 여름날의 꿈마냥 사라질 것이다. 애초에 정치적 동반자는 그런 거니까.
결국 답은 나왔다.
필로스 왕은 직접 라울 백작가를 칠 수 없다. 다른 방법을 써야만 한다.
차도살인지계.
‘대체 누굴…….’
하지만 흑마법사의 비호를 받고 있는 라울 백작가를 과연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을 만한 가문이 있을까?
제이머스 공작은 제외다. 그의 처지도 필로스 왕과 다르지 않는다. 그가 나서면 오히려 일이 더 꼬일지도 모른다.
제이머스 공작을 제외한다면, 콩탄 왕국에서 나름 명문가에다가 힘이 있는 라울 백작가를 상대할 수 있는 가문은 두 곳뿐이다.
불스 후작가.
‘이제르트 백작가.’
그리고 이제르트 백작가!
이 두 곳 뿐이다.
필로스 왕은 둘 중 한 곳을 골라야 했다. 물론 그냥 맨입으로 이 일을 맡길 수는 없다.
적지 않은 정치적 혹은 금전적, 권력적 이익을 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처리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불스 후작에게는 너무 힘이 몰렸어.’
여기서 선택이 갈렸다.
불스 후작은 엄청난 속도로 세를 불리고 있다. 정치적 입지도 날이갈수록 달라지고 있다.
지금이야 제이머스 공작의 측근이지만, 불스 후작의 능력 그리고 그의 의중을 염두에 두면 불스 후작은 마음만 먹으면 제이머스 공작과 거리를 두고, 새로운 정치 파벌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
그런 불스 후작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주면 오히려 콩탄 왕국의 귀족계를 양분하는 꼴이 된다.
물론 귀족들이 서로 싸우는 건 필로스 왕에게 이익이다. 귀족들이 알아서 세력을 상잔시켜주는 꼴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페스로 제국이 왕국을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자중지란을 일으켜서는 안 되겠지.’
나중은 몰라도 지금 당장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건 페스로 제국에게 콩탄 왕국을 떠먹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답은 하나다.
이제르트 백작 밖에 없다.
의외로 이제르트 백작은 빅토리안 공작가의 반역 사건 이후에 잠잠하기 그지없었다.
이러다할 정치적 활동도 없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더군다나 이제르트 백작가에 힘을 실어주면 자연스럽게 불스 후작의 상승세도 적당히 꺾일 것이다.
일거양득!
최선의 선택이자, 최고의 선택이다.
그러나 필로스 왕이 그 선택을 내릴 무렵, 아직 사고는 터지기 전이었다.
8.
슈페언 백작은 미소를 지었다.
“왔군.”
편지가 왔다. 그 편지는 굉장히 은밀한 방법으로 슈페언 백작의 서재 안에 놓여진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 라울 백작가.
“여기로군.”
슈페언 백작은 미소를 지으며 타오르는 촛불 위에 편지를 떨어뜨려 놓았다.
그 편지는 콩탄 왕국의 어느 귀족이 보내준 편지였다.
슈페언 백작은 그 편지를 전부 태운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볼 건 없었다.
슈페언 백작이 서재를 나오며 기사에게 말했다.
“군대를 소집하라.
9.
불스 후작령에 도착했을 때 문수르의 눈앞을 가득 채운 건 다름 아니라 불길이었다.
문수르의 드래곤 파이터가 그 불길들 사이를 스치며 빠르게 움직였다.
‘이리아 아가씨의 신병 확보가 최우선이다.’
불스 후작령을 되찾는 것보다 이리아의 신병을 확보하는 게 문수르에게는 더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빌어먹을!”
파티에서 블레이더가 난동을 부린 직후 너무도 많은 이들이 동시에 파티장을 뛰쳐 나왔다.
거기에 늦은 밤이다.
제 아무리 GPS파일럿의 성능이 신묘하다고 해도 이렇게 늦은 밤에 파티장에서 우루루 몰려 나오는 사람들 중에 이리아, 딱 한 명을 포착하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놓쳤다.
찾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문수르는 후회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위치 추적기라도 붙여놨을 것이다.
그 정도는 가능하다.
하다 못해 GPS 파일럿 한 대를 아예 이리아에게 붙여 놨으면 최소한의 동선이라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악이다.
문수르는 이 순간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카라카크를 탓하기보다는 스스로의 무능을 탓했다.
“내가 잘 못한 거다.”
문수르는 자책했다.
빠드득!
그 자책감에 절로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 주인님,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 문수르에게 로이드가 말을 걸었다. 평소라면 조용히 서포트만 했을 로이드가 말을 걸었다는 건 지금 문수르의 행동이 잘못됐음을 의미했다.
그 말에 문수르가 정신을 차렸다.
로이드의 말은 비정하다. 그렇기에 냉정하다.
맞는 말이다.
-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자료를 확보하는 겁니다.
이리아의 신병을 놓친 건 놓친 거다. 지금 당장 그녀를 찾으려고 불스 후작령을 뒤지는 건 의미는 있어도 가치는 없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블레이더를 확보하는 거다.
아니, 이리아를 찾는 건 어떤 의미에서 대의보다는 개인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그녀의 목숨은…… 사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이제르트 백작가에서 정말 명운을 걸 정도로 귀중한 건 아니다.
가문에서 여자가 가지는 위치는 언제나 작을 수밖에 없다. 케르빈 월드는 그런 세계니까.
더군다나 이제르트 백작가에는 걸출한 후계자도 있다. 솔직히 보통 귀족가문에서 딸이란 존재는 정치적 이익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게 보통의 경우다.
반면 지금 카라카크가 만들어낸 블레이더들은 무시무시한 존재다.
그 위력도 위력이지만, 이제까지 케르빈 월드의 문명이 흑마법사에게 대적하기 위해 이룩한 시스템을 아예 무시한다.
쉽게 말하면 기존의 항생제와 면역체계가 통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인 셈이다.
이런 것들은 그 숫자가 미미해도 효과는 굉장하다.
그에 대한 백신을 빨리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백신을 만드는 게 문수르의 역할이다.
문수르가 침착함을 되찾았다.
빠득!
저절로 이가 갈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당장 우선순위가 뭔지는 파악했다.
- 한 마리 위치 파악했습니다.
그 와중에 로이드가 블레이더의 위치를 파악했다. 문수르는 망설이지 않았다.
10.
블레이더는 귀족들을 쫓고 있었다. 놈은 일단 귀족들을 쫓는데 방해가 되는 기사들을 처치했다.
촤르륵!
놈들의 칼날 채찍은 무시무시했다.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더군다나 뱀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대체 이걸 어떻게 상대하라고!”
놈은 양팔, 두 개의 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블레이더를 상대하게 된 기사들 입장에서는 볼멘소리가 아니라 비명소리, 울음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가뜩이나 무기조차 없는 상황.
어설프게나마 몽둥이를 든 게 무장의 전부였다. 갑옷조차 입지 못한 상황이었다.
제대로 무장을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이런 비루한 무장을 하고 덤빈다는 건 미친짓이었다.
죽음을 직감한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기사들 대부분은 죽음을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다.
오히려 어떠한 기사들은 허송세월, 의미없이 시간을 보내나 늙어 죽는 것보다는 아직 전성기적 실력이 남아있을 때 전장에서 영광스럽게 죽는 것을 원하는 자가 대다수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여기서 죽는 건 개죽음이다.
영광이고 나발이고, 그냥 추레하고 비루한 죽음일 뿐이다.
기사들은 그 사실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네놈!”
할 수 있는 건 이런 식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다.
“흐히히!”
블레이더는 그런 기사들의 발악을 보며 기괴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미쳐버린 인간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보통의 괴물들, 특히 언데드 몬스터란 놈들은 이성과 이지를 상실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괴물답다.
흉포하고, 포악하고, 사납다.
그리고 그뿐이다.
솔직히 그 괴물이 하는 말에 겁만 먹을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괴물은 그게 아니었다. 블레이더, 놈들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 괴기함, 왠지 본능을 자극하는 그 느낌에 기사들은 마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개미가 타고 오르는 듯한 느김을 받았다.
절로 사기가 떨어졌다.
기사들은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이미 패배한 상황이었다.
쿠웅!
그때였다.
“뭐, 뭐야?”
“지, 지진인가?”
거대한 굉음이, 울림이 느껴졌다. 기사들이 저도 모르게 놀라고 있을 무렵에 그것이 움직였다.
드래곤 파이터!
그 무시무시한 기가스가 등장한 것이다.
문수르는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블레이더를 향해 움직였다. 거대한 기가스가 인간 형태의 블레이더를 향해 다가가는 광경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기사들에게는 아니었다.
“좋아!”
“가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 빌어먹을 괴물을 처치해!”
그들은 이 갑작스런 도우미의 등장에 정신이 나갈 정도로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 듯.
문수르가 와이어를 잡아당겼다. 드래곤 파이터의 거대한 창이 블레이더를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갔다.
순식간이었다.
푸웃!
거대한 창이 단숨에 블레이더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제 아무리 개조된 흑마법의 산물이라고 그래도, 기가스 앞에서는 미약한 생명체에 불과할 뿐이다.
- 주인님, 너무 위력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실수가 있었다.
블레이더가 죽어도 상관은 없다. 시체가 되도 조사는 충분히 가능하니까.
그래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최대한 온전한 형태의 시체를 구하는 게 좋을 터.
그런 의미에서 방금 전 문수르의 공격은 너무 강했다.
“지금 힘 조절이 잘 안 돼.”
아무리 냉철함을 되찾았다고 해도 문수르는 여전히 분노한 상황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이렇게 블레이더의 시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젠장…….”
그러나 문수르의 입에서 나오는 건 쓴소리, 그것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