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69화. 불스 후작령.>
1.
불스 후작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런 불스 후작의 곁에는 기사들이 있었다. 스무 명이 넘어가는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은 불스 후작에게 소리쳤다.
“후작 각하 정신을 차리십시오!”
“여기서 정신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정신을 차리십시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젠장 출혈이 너무 안 멎잖아! 힐링 마법사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기사들은 분주했다.
그런 그들의 분주함이 불스 후작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대체 왜 이렇게 시끌벅적한 거야?’
불스 후작은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더듬었다.
불스 후작은 자신의 기억을 차츰 더듬었다. 한 계단, 한 계단, 계단을 오르듯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과거로, 더 과거로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차츰 떠오르기 시작한 기억.
이윽고 불스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2.
파티장에서 불스 후작은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다. 특히 취기가 어느 정도 올랐던 것이 문제였다.
“빌어먹을! 저 놈을 잡아!”
만약 평소의 불스 후작이었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황을 먼저 파악하고, 그에 맞는 대답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술이란 건 마물(魔物)이다.
그 대단한 불스 후작도 술 앞에서는 판단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 때문에 불스 후작은 그동안 술을 멀리했다. 파티를 멀리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취해도 괜찮은 날이었다.
물론 정말 인상불성이 될 정도로 마신 건 아니었다. 단지 유력 귀족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한두 잔을 하다 보니 그 정도가 너무 쌓였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약간의 취기가 오른 상황에서 갑작스레 난동이 일어났을 때 불스 후작은 괘씸함을 느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나온 말.
그러나 기사들에게는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불스 후작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곧바로 난동을 부리는 거스트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
어쩌면 별 거 아닌 듯한 일.
그러나 그 일이 결국 문제였다.
불스 후작 주변의 기사들이 움직였다. 불스 후작을 호위하는 이들이 사라진 셈이다.
그 순간!
다른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불스 후작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공격을 시도했다.
푸홧!
이번에도 칼날 채찍이었다. 섬뜩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온 칼날 채찍은 담수에 불그 후작의 뱃가죽을 뚫어버렸다.
“크헉!”
갑작스런 상황.
그 갑작스런 상황에, 피가 튀는 상황에 오히려 취기로 물들었던 불스 후작의 머릿속에 번쩍! 불이 켜졌다.
“후작 각하!”
동시에 불스 후작의 상황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불스 후작에게 다가갔다.
그 이후 교전이 있었다.
불스 후작령 그리고 파티장에 숨어 든 괴물의 숫자는 스물이 훌쩍 넘어갔다.
그들의 손에 의해 죽은 귀족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그 귀족을 호위하기 위해 온 기사들 그리고 파티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하인과 하녀들도 적잖게 죽었다.
불스 후작가의 기사들은 칼에 찔린 불스 후작을 데리고 빠르게 불스 후작령을 나왔다.
누군가 말을 가져왔다.
그리고 말을 타고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도망치기 시작했다.
말 위에 탄 불스 후작은 점차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그게 이제까지의 이야기.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불스 후작이 이를 물었다.
“빌어먹을!”
기사들은 그런 불스 후작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해줬다.
그 괴물이 등장한 배경 그리고…… 브라스 경의 마지막 명령까지 말이다.
브라스 경의 이야기에서 불스 후작은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가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그렇게……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자다.”
이야기를 들었다.
팔이 잘리는 순간, 브라스 경이 내린 결단은 불스 후작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이었다.
만약 그 명령이 아니었다면 불스 후작은 파티장에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 덕분이다.
지금 불스 후작이 살아있는 것도, 이렇게 나중을 기약할 수 있는 것도 말이다.
“그보다 대체 어디서 그런 괴물이…….”
브라스 경에 대한 추모는 거기까지였다. 불스 후작은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거스트라고?”
라울 백작가에서 보낸 기사 거스트…… 얼굴은 알고 있다. 라울 백작의 편지를 직접 전달해준 자다. 얼굴을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다.
보기에 평범한 기사였다.
말 그대로다. 실력의 유무를 떠나서 특이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 인간이 두 팔 대신에 칼날 채찍을 달고 있다. 또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팔을 잘라 그 절단면에 칼날 채찍을 붙인 게 아니라 절단면에서 칼날 채찍이 돋아난 형태라고 했다.
‘흑마법이다.’
필시 흑마법에 의해 개조를 당한 것이다.
흑마법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쉬운 일이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무엇보다 흑마법에 대한 대비를 어느 정도 해뒀다.
빅토리안 공작의 반란 사건 이후 필로스 왕이 왕명으로 말했다. 흑마법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모든 귀족들이 흑마법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마법사들을 데려다가 흑마법의 흔적을 찾았고, 영지에 출입하는 자들을 검문하고, 검색하는 등 나름 만반의 대비를 했다.
불스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성대하게 주최될 파티였다. 만반의 준비를 했다. 마법사들을 더 고용해서 실시간으로 흑마법의 흔적을 검문했다. 파티장에 들어온 모든 이들은 1대1로 흑마법사의 검문을 받았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통하지 않는다.’
답은 하나다.
상대쪽이 그런 마법사들의 검문 검색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의미다.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다.
전쟁에서 가장 위험한 건 적이 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적이 오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일이다.
이제까지 콩탄 왕국…… 아니, 대륙의 모든 이들이 생각하는 흑마법에 대한 대처법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
굉장히 위험하다.
이 부분을 치고 들어오면,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어떻게든 알려야 한다.’
불스 후작이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이다. 어떻게든 이 사실을 콩탄 왕국 왕실에 알려야 한다.
더 나아가 새롭게 등장한 흑마법에 대한 대처법도 만들어 내야 한다.
‘이제르트 백작가…… 절호의 선택이었군.’
그런 의미에서 브라스가 대피처로 이제르트 백작가를 고른 건 정말 제대로 된 선택이었다.
어설픈 귀족가보다는 지금 이제르트 백작가가 가장 안전할 테니까.
3.
“불스 후작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갔을까?
모르겠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씻지도 못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때문에 불스 후작의 꼴은 초최하기 그지없었다. 돼지를 살 찌우는 데에는 수 개월이 걸리지만, 그 돼지를 메마르게 만드는 데에는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인간이라고 해서 다를 리 없었다.
그렇게 추레한 모습을 한 불스 후작과 그의 기사들을 앞에 등장한 건 다름 아니라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사들이었다.
“이제르트 백작님을 모시는 포비어 경이라고 합니다.”
불스 후작은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사들의 등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곳에…….”
“긴급 상황입니다.”
그 순간 포비어 경 뒤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스 후작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문수르 경?”
“예, 맞습니다.”
“아니, 대체 이게 어떻게…….”
이해할 수 없다.
불스 후작은 이제르트 백작가에 그 어떤 언질도 하지 않았다. 물론 기사 한 명을 먼저 보내기는 했다.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 이제르트 백작가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 기사는 지금도 이제르트 백작가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사들이 불스 후작 앞에 등장했다.
알고 있다는 의미다.
대략 계산을 해보면 불스 후작령의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준비를 하고 불스 후작령으로 출발했다는 의미다.
불스 후작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아니, 날카롭게 변한 게 아니라 살벌하게 변했다.
“무엇을 알고 있지?”
불스 후작.
초췌하기 그지없는 그다. 배고픔에 머릿속은 새하얗게 탈색되어 버린 느낌이다. 더군다나 아직 상처도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다. 임시방편으로 출혈만 막은 상황이다. 그 전에 출혈도 적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 이렇게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 자체도 불스 후작에게는 중노동이고, 고문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러하지만 온갖 아수라장을 건너온 그의 저력은 그리 쉽게 사라질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궁핍하고 초췌한 상황에서도 불스 후작은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파악했다.
문수르는 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역시 보통이 아니야.’
이런 와중에도 이런 대답을 하는 불스 후작의 저력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건 그거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후작 각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제르트 백작령에 돌아간 뒤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 이동하시지요.”
문수르의 말에 불스 후작은 고민했다.
고민 끝에 그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고맙네.”
고맙다는 인사였다.
여기서 문수르는 또 한 번 더 놀랐다.
‘자존심을 숙일 때는 정확히 알고 있군.’
불스 후작은 고민했다. 여기서 이제르트 백작가를 추궁하는 게 이익일지, 아니면 그냥 그들 말을 따르는 게 이익일지.
답은 뻔했다.
‘이제부터 이제르트 백작가의 전폭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지금 불스 후작은 불스 후작령이란 땅을 잃었다. 그뿐인가? 긴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그 어떤 재산도 가지고 오지 못했다. 기가스도 그대로 성에 남아있다.
이건 엄청난 일이다.
잘못했다가는 불스 후작이 이룩한 모든 것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루 빨리 영지를 되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제르트 백작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르트 백작가 앞에서 강짜를 부리는 건 미련한 짓이다.
작위가 높다고?
작위는 작위일 뿐이다. 작위가 있다고 해서 작위가 낮은 귀족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귀족과 귀족 사이에 상명하복이란 개념은 없다.
그래서 불스 후작이 대단한 것이다. 귀족들 대부분은 그 부분을 모르거나 혹은 착각을 한다.
그리고 중요한 순간 자신의 자존심에 취해 그릇된 판단을 내리고는 한다.
그 무지한 판단의 대가는 굉장히 쓰리다.
“포비어 경, 일단 준비해온 것들을 드리세요.”
“알겠습니다.”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사들인 준비해온 것들을 불스 후작가의 기사들 그리고 불스 후작에게 전달해줬다.
먹을거리였다.
기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고맙소.”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음식을 받은 기사들은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와 표시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작스레 영지를 떠나 나오면서 먹을 것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식수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무조건 달렸다. 강행군을 했다. 운 좋게 사냥에 성공할 때도 있었지만 가끔 있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사냥감을 잡아도 기사들의 머릿수를 생각하면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양이었다.
배고픔에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음식이라니…… 꿀맛도 이런 꿀맛이 없을 것이다.
불스 후작에게는 문수르가 직접 음식을 건네줬다. 불스 후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의 표시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고맙네.”
“그보다 상황은 심각합니다. 일단…… 저는 불스 후작령으로 이동할 생각입니다.”
“음?”
갑작스런 문수르의 말.
불스 후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체 무슨 의중을 품은 걸까?
“그 전에 불스 후작 각하께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불스 후작령에서…… 부득이한 전투로 인한 피해가 발생해도 괜찮습니까?”
전투라는 말에 불스 후작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영지만 되찾을 수 있다면…… 뭐든 허락하지.”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