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227화 (225/293)

227화

9.

가라앉은 분위기.

브라스 경이 움직였다. 그는 파티장 한 구석에서 와인을 홀짝이는 사내 근처로 다가갔다.

준수한 외모의 사내였다. 브라스는 그 사내를 보며, 그 사내의 신분을 떠올려봤다.

‘라울 백작가…… 그래.’

라울 백작가에서 왔다고 했다. 라울 백작이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라울 백작의 편지를 가져왔다고 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초대장을 보냈으나 부득이하게 참석할 수 없는 귀족들이 편지를 보내는 건 일반적인 일이다.

오히려 휘하의 기사를 시켜, 파티 당일 날 직접 편지를 보내는 건 꽤나 예의를 차린 것이다.

그래서 불스 후작가는 라울 백작의 편지를 가져온 기사를 극진이 대접했다. 브라스가 그런 기사를 기억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외에는 딱이 이상한 점은 없었다.

말 그대로 기사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무언가 있다.’

느낌이 싸하다. 등골이 오싹하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다.

“거스트 경.”

브라스가 라울 백작가의 기사, 거스트를 향해 말을 걸었다. 와인을 홀짝이던 거스트는 브라스의 등장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답도 나왔다.

“아닙니다. 그냥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어떻습니까? 파티는 마음에 드십니까?”

“예.”

“혹여 불편하신 점이라도…….”

“너무 황송해서 부담스러울 지경입니다.”

너무나도 부드럽게 말을 받는다.

그러는 사이 불스 후작가의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조심스럽게, 은밀하게 거스트의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브라스는 기사들의 포위망이 어느 정도 견고하게 만들어졌음을 파악했을 때 거스트와의 거리를 좁혔다.

‘무기는 없다.’

상대는 기사다. 보기에도 실력은 제법 있어 보인다.

하지만 수중에 검은 없다. 당연하다. 외부인이 파티에 참석할 때 무기를 맡기는 건 기본 예의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반면 호위를 위해, 경비를 위해 브라스는 검을 소지하는 게 허락된다.

검을 든 기사와 검을 들지 못한 기사.

승패는 뻔하다.

또한 브라스는 자신했다.

‘붙어도 내가 이긴다.’

콩탄 왕국 최강의 자유기사 타이틀까지 얻었던 이가 바로 브라스다. 오러 마스터 수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오러 나이트들 중에서 그의 실력은 손에 꼽힐 정도다.

혹여 상대가 검을 들었다고 해도 브라스는 자신의 패배를 눈곱 만큼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한편 거스트는 브라스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거스트 입장에서는 브라스의 행동이 이해갈 리가 만무하다. 갑자기 왜 자신을 향해 살의를 드러내고, 이러는 걸까?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너무 당연한 것처럼 보여서.

‘내가 틀린 건가?’

브라스는 자신의 감을 잠시 동안 의심했다.

까놓고 눈앞의 인물을 의심할 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거스트가 가져온 편지는 라울 백작가의 인장이 제대로 찍혀 있었다. 또한 신분도 분명 확실한 이였다.

그런 그를 의심하는 건 오직 하나, 브라스가 느끼는 감 때문이다.

감에만 의지해서 검을 휘두르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만약 브라스가 틀렸다면?

고민했다.

그리고 망설였다.

브라스는 검을 잡았지만 쉽게 검을 뽑아 휘두를 순 없었다. 오히려 몸이 굳었다.

백전노장, 그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고집을 이어간다는 건 쉽지 않았다.

‘어떡하지?’

더군다나 불스 백작은 이제 후작이 됐다. 그를 가장 옆에서 검기게 될 브라스는 기사 작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권력은 어설픈 백작들보다 나은 수준이다.

그에 따른 책임도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브라스가 실수를 하면 그 실수는 단순히 변방 귀족의 기사 한 명이 저지른 실수가 아니다.

콩탄 왕국의 정치적 문제를 야기시킬 만한 실수다.

이런저런 생각들.

그것들이 브라스의 몸을 결박했다. 쇠사슬이 되어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갈랐다.

파앗!

거스트의 몸에서 뿜어진 빛이 단숨에 브라스의 몸통을 갈랐다. 브라스는 고개를 돌렸다.

‘뭐지?’

빛이 자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브라스는 무언가가 허전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가 가벼워진 것 같다.

브라스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오른팔을 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그의 오른쪽 어깨부터 손끝까지, 팔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고 없었다.

뚝뚝!

대신에 잘려나간 단면에서는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떨어지는 핏방울의 양이 점차 늘어났다. 이후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핏물이 분수마냥 뿜어지기 시작했다.

“브라스 경!”

“브라스 경을 보호하라!”

“저 자를 잡아!”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기사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사들 중 일부는 브라스를 구하기 위해서 움직였고, 다른 기사들은 거스트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

그 순간 기사들은 볼 수 있었다.

거스트, 그에게도 팔이 없었다. 오른팔 대신에는 섬뜩한 칼날이 달려 있었다. 팔을 자르고, 그 위에 채찍 같은 칼날을 붙인 것이다.

보통 인간은 결코 할 수 없는 짓이다.

기사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팔을 자르고 그 대신에 저런 흉측한 무기를 달 수 있을까?

그 찰나의 당혹감에 기사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거스트는 움직였다. 그는 양쪽 팔 전부가 무기로 되어 있었다. 섬뜩한 칼붙이였다.

그가 팔을 휘두르듯 무기를 휘두르자 근처에 있던 기사들은 뒤로 걸음을 무를 수밖에 없었다.

뒷걸음치는 기사들을 향해 거스트는 오히려 달려 들었다.

“으하하하!”

거스트의 입에서는 괴기스러운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동시에 거스트의 양팔이, 칼날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채앵!

기사들이 기겁하며 자신의 코앞으로 날아온 거스트의 칼날을 제 검으로 쳐냈다.

쇳소리가 튀기며 거친 소리를 냈다.

파티장 분위기는 참혹했다. 갑작스런 소란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던 분위기는 전투가 시작되고, 쇳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미친 듯이 달아올라버렸다.

“으아악!”

“도망쳐! 도망쳐라!”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이 정신이 나간 듯 난리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파티장이 아수라장이 됐다.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을 놀렸다.

콰당!

넘어지는 사람이 속출했고, 그렇게 넘어지는 사람을 밟고 지나가는 자들이 넘쳐났다.

방금 전까지 파티를 아우르고 있었던 웃음, 배려, 매너 따위가 무색해지는 광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혼란에 빠지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아가씨, 피하시지요.”

“길을 만들겠습니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사들!

그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수중에 무기가 없었음에도 그들은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이제르트 백작가에서는 무장이 해제된 상황, 맨손에도 써먹을 수 있는 격투기 훈련이 있다. 온갖 종류의 격투기 훈련을 그들은 처절할 정도로 배웠다. 악마 포비어 경과 착한 악마 문수르, 그 둘 밑에서 말이다.

무기를 들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요인을 지킬 정도는 된다.

그렇게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사들이 이리아를 포위한 채 파티장을 빠져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쉽게 빠져나갈 수 없었다.

“으아악!”

“괴물이다! 괴물이 있다!”

지금 파티장 안에서 난동을 부리는 거스트에게는 또 다른 동료가 있었다. 거스트와 마찬가지로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하고 다를 바 없는 그들은 귀족들 무리에 섞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밖으로 빠져나가자마자 인간의 탈을 벗어던졌다.

모두가 양팔 대신에 칼날 채찍을 달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칼날 채찍들은 무기가 아니라 신체의 일부처럼 움직였다. 기괴한 곡선과 움직임을 보이며 표적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사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리아의 호위를 위해 함께 온 기사는 셋이었다. 그러나 지금 눈에 보이는 괴물들의 숫자만 열이 훌쩍 넘었다.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

“아가씨, 실례하겠습니다.”

기사 한 명이 이리아를 안았다. 그러자 나머지 둘이 몸을 이용해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거치적거리는 건 귀족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았다. 그 귀족을 주먹으로 때려 날리고서라도 길을 만들었다.

무례다.

나중에 큰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무례, 목이 떨어진다고 해도 뭐라 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러나 이제르트 백작가의 기사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렇게 배웠다.

최악의 순간, 최선의 결과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그 무엇도 아닌 결단성이란 걸.

기사들은 여기서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어차피 똑같이 죽음을 각오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이리아를 살리고 죽는 게 최선이다. 이리아를 살릴 수만 있다면 까짓꺼 목숨 따윈 얼마든지 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사들의 노력이 무의미할 정도로 괴물들은 무시무시하게 강했다.

그들의 칼날 채찍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절삭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나름 단련된 기사들이 그들에게 덤벼들었지만 칼날 채찍에 썰려 단숨에 고깃덩이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불스 후작가의 악몽이 시작됐다.

10.

팔이 잘려나간 브라스. 출혈이 심한 탓인지 눈앞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브라스는 기절하지 않았다.

“브라스 경 정신을 차리십시오! 정신을 잃으면 안 됩니다!”

“힐링 마법사가 오고 있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기사들은 그런 브라스의 의식을 어떻게든 붙잡기 위해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붙였다.

브라스는 그런 기사들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브라스는 정신이 혼미했지만 이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냉철한 판단을 내리고자 했다.

그는 기사단장이다.

동시에 불스 후작가를 지키는 기사다.

그런 그가 지금해야 하는 건 제 알량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신음을 흘리는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을 분석해야 한다.

‘그 팔!’

브라스는 거스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짧게 스쳐 봤을 뿐이지만, 브라스의 눈썰미는 좋았다.

‘붙은 게 아니었어.’

거스트.

그의 두 팔 대신에 달린 칼날 채찍은 단순히 팔을 잘라서 칼날 채찍을 붙인 게 아니었다.

‘솟아난 거다.’

마치 나무에서 가지가 나오듯, 팔에서 칼날 채찍이 나온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몸에서 강철로 만들어진 검이, 그것도 그런 종류의 검이 돋아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반대로 말하면 거스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특이체질 따위를 운운하는 게 아니다.

‘흑마법사다.’

불스 후작이 브라스에게 최고 대우를 해주면서까지 그를 영입한 이유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브라스가 자유기사로 세계를 떠올며 얻은 깊은 넓은 폭의 지식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틀에 박힌 사고를 가진 기사들에 비하면 브라스의 사고방식은 유연하고, 그 폭도 넓었다.

또한 아는 것도 많았다.

특히 흑마법사에 대해서는 나름 많은 공부도 했다.

물론 흑마법에 대해서 깊이 아는 건 아니다. 그런 건 흑마법사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흑마법이란 이름 아래에 얼마나 다양한 것이 존재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보통 흑마법이라고 하면 언데드 몬스터, 저주 따위를 떠올리겠지만 그 두 가지는 흑마법에서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흑마법을 이용하면 인간의 근간을 뒤바꿀 수도 있다.

분명하다.

거스트, 그는 흑마법에 의해 개조를 받은 자다.

그런데 지금 그런 거스트가 등장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는가?

‘불스 후작 각하가 위험하다.’

브라스가 상황판단을 끝냈다.

“모두들 불스 후작 각하를 대피시켜라! 무조건! 나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불스 후작 각하부터 대피시켜! 영지에서 떠나라! 불스 후작 각하를 데리고 무조건 영지를 떠나!”

많은 준비를 했다.

그럼에도 적은 이 준비된 경비를 뚫고 이렇게 난동을 부린다.

불스 후작령은 더 이상 불스 후작의 땅이 아니라는 소리다.

다른 영지로 가야 한다.

‘다른 영지…….’

그럼 어디로 가야 할까?

불스 후작령 근방에서 믿을 만한 곳은…….

“이제르트 백작령으로 가라! 불스 후작 각하를 데리고 전력을 다해 이제르트 백작령으로 가라!”

이제르트 백작령!

그곳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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