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68화. 던전.>
1.
또르르……!
GPS볼은 흑마법사의 던전 안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작은 구슬들이 굴러다니며, 던전의 지형을 파악하고, 실시간으로 영상을 촬영해 전송하기 시작했다. GPS파일럿에 전송된 영상은 로이드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처리되고 있었다.
완벽한 팀워크다.
문수르가 개입할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모든 건 로이드가 감시하고, 관리했고, 문수르는 그런 로이드가 정리해준 정보를 받아보는 거면 충분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 던전이 생각보다 깊습니다.
“24시간 제한이 문제야…….”
거의 영구적으로 사용가능한 GPS파일럿과 다르게 GPS볼의 사용시간은 24시간이었다.
24시간 사용 후에는 전용충전기를 이용해서 1시간 동안 충전을 해야 다시 사용이 가능하다.
던전에 GPS볼을 던질 경우, 조사 가능시간은 19시간이 한계였다. 나머지 5시간은 되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충전을 하고 다시 사용할 수 있으니까.
더군다나 던전은 굉장히 깊었다. 길도 복잡했다. 이곳저곳 함정도 깔려 있었다.
그러다 보니, 던전 탐사에 진척이 어느 순간 꽉 막힐 수밖에 없었다여기서 문수르는 결단을 내렸다.
“2개 정도 그냥 보내버리자.”
귀환시간을 무시하고, 탐사에 24시간을 쓰는 거다. 그렇게 된다면 더 깊은 곳까지 탐사가 가능할 터.
그렇게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이후 던전으로 들어가서 GPS볼을 회수하면 된다.
반대로 애매모호한 결과가 나오면 던전으로 들어가는 건 먼훗날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GPS볼 2개는 그냥 공중에 버리는 셈이 된다.
하지만 문수르는 승부를 걸었다. 여기서 애매모호하게 상황을 보는 것보단 확실하게 해보고, 안 되면 물러나는 용기가 필요하다.
- 알겠습니다.
로이드 역시 그런 문수르의 의중을 파악했고, 곧바로 GPS볼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2.
이리아 이제르트 영지를 떠났다.
불스 후작가의 파티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리아 이제르트를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이제르트 백작도 있었다.
‘안 오셨구나.’
그러나 개중에 이리아가 원하는 얼굴은 없었다. 다름 아니라 문수르의 얼굴 말이다.
이야기는 들었다.
갑작스레 발견된 던전 탐사를 위해서 문수르가 직접 떠났다고 한다.
지금 문수르는 테블스 산에 있다.
이해는 한다. 아니, 해야만 한다. 문수르가 그렇게 노력하는 이유는 그 누구도 아닌 이제르트 백작가를 위해서 그러는 거다. 이제르트 백작가를 위해서 목숨 걸고 테블스 산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 그를 이리아가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소리다.
그러나 야속한 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내게 관심이 하나도 없는 것일까?’
이럴 때마다 이라아는 본인에게 실망하고는 했다. 문수르의 연심을 훔치지 못하는 스스로가 못났다고 생각됐다.
그때였다.
“아가씨.”
“포비어 경? 무슨 일인가요?”
떠나려는 이리아에게 포비어가 다가왔다. 포비어는 그런 이리아에게 조심히 무언가를 건네줬다.
“뭐죠, 이게?”
“문수르 경이 제게 맡기고 가신 편지입니다. 이리아 아가씨가 백작가로 떠날 때가 되면 전해달라 부탁하셨습니다.”
그 순간 이리아는 마치 매가 사냥감을 낚아채듯, 포비어의 편지를 낚아챘다.
포비어는 그 모습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편 이리아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가, 감사해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이리아. 무례하게 상대방의 편지를 낚아채다니…… 귀족가의 영애에게는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다.
그러나 포비어는 옅은 미소를 계속 지을 뿐이었다.
3.
불스 후작.
이제는 후작이 된 불스 후작의 삶은 백작일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호사롭게 성을 증축하지도 않았고, 매일매일을 사치와 향락으로 보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불스 후작은 후작 위에 오르자마자 더 강력하게 영지의 기강을 바로 잡기 시작했다.
법과 규율이 더 엄격해졌다.
술을 먹고 난동을 부리는 자는 그 사람이 기사라고 해도 불스 후작이 용납지 않을 정도였다.
기강을 바로 잡는 이유는 하나였다.
약점을 잡혀서는 안 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필로스 왕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컸다.
필로스 왕이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부하들을 시켜 뒷조사와 감시를 시작했을 것이다.
시기도 지금이 딱 적절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변화하는 정치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온갖 뇌물이 오고 가는 상황이니까.
그런 와중에 불스 후작이 파티를 주최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떻게든 불스 후작과의 연줄을 만들고 싶어하는 귀족들에게는 너무나도 좋은 기회였다.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불스 후작령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모였다.
불스 후작령이 변방에 위치해 있음에도 그곳으로 모이는 행렬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후후후, 불스 후작가가 드디어 문을 열었군.”
좋지 못한 의도를 가진 자들 역시 불스 후작령으로 향하고 있었다.
4.
문수르는 하늘을 바라봤다. 밤하늘이 참 아름다웠다. 언제나 느끼는 케르빈 월드의 하늘은 신비롭다. 별자리가 달라서 그런 게 아니다. 별의 느낌이 다르다.
- 주인님.
그렇게 감상에 빠져있는 문수르를 로이드가 불렀다.
“무슨 일이야?”
- 잡혔습니다.
“응? 뭐가?”
- 던전 내의 모든 탐사가 99퍼센트 완료되었습니다.
왔다.
기다리던 소식이 드디어 온 것이다. GPS볼 2개를 버리겠다는 각오를 한 대가가 드디어 온 것이다.
'다행이다.'
귀환시간마저 탐사시간에 투자하자, 미지의 공간으로 남았던 부분에 대한 탐사가 마저 끝났다.
문수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밤하늘을 보며 감상에 젖어있던 눈빛은 사라졌다.
차가운 눈빛, 냉철한 의지가 가득 담긴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문수르가 멀티 글라스를 썼다.
“출력해봐.”
문수르의 말에 로이드가 이제까지 GPS볼이 촬영한 영상 중 주요 영상들을 편집해 출력하기 시작했다. 멀티 글라스 위로 영상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멀티 글라스 한 편에는 지도가 떴다. 탐사가 완료된 던전의 내부지도였다. 99퍼센트에 가까운 정확도를 자랑하는 지도였다. 이 지도가 있다면 던전 탐사는 더 이상 문제도 아니다.
“흑마법사는 없는 거지?”
특히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 흑마법사의 던전 내 존재 유무를 확인할 수 있었다.
- 분명 없습니다.
“좋아.”
흑마법사는 없었다.
이게 중요했다.
흑마법사가 있을 경우 던전 내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흑마법사가 없는 지금은 절호의 기회였다.
문수르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준비는 끝난 상황이었다. 탐사 기간 동안 히스티가 영지를 오고 가며, 폐욤 족장으로부터 필요한 도구들…… 던전 탐사에 필요한 마법도구들을 준비한 상황이었다.
또한 문수르 역시 던전 탐사를 위해 호우투 부족에게 몇 가지 도구들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그 도구들 역시 도착한 상황이다.
여기에 오러 마스터인 문수르!
이 세 가지 조합이 합치면, 대륙 최고의 도굴꾼이 될 수도 있다. 파지 못할 곳은 없다. 뚫지 못할 던전은 없다.
망설일 이유는 눈곱 만큼도 없었다. 문수르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5.
히스티는 밖에서 보초를 서고, 문수르가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GPS볼을 통해 대부분의 지형 그리고 함정 등을 파악한 상황이었다. 던전 내에서 문수르 혼자 이동해도 문제될 건 없었다.
문제가 되는 건 GPS볼은 쉽게 이동할 수 없지만 몸이 큰 문수르는 쉽게 이동할 수 없는 지역들이었다좁은 통로 혹은 비밀 통로 따위들…… 그리고 함정마법들!
문수르가 조심해야 하는 건 그런 것들이었다.
‘천천히 진행하자.’
문수르는 서두르지 않았다. 차근차근 천천히, 기어가듯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전진 속도는 빨랐다. 이미 사전에 정보 대부분을 얻은 상황이었기에 작업 속도가 느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문수르가 나름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첫 번째 포인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연구실인가?”
공간이 나타났다.
100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공간 안에는 시체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썩은 악취는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실내 온도가 차가운 건 아니었다. 더운 것도 아니었지만 시체가 부패하기에는 충분한 온도였다.
이게 문수르의 첫 번째 의문이었다.
문수르는 슬그머니 시체 한 구 앞에 섰다. 그 시체는 다름 아니라 엘프의 시체였다.
피부는 대부분 썩어 문들어졌고, 남은 것은 뼈다귀와 머리칼 정도였다. 그 뼈와 머리칼을 보고 엘프인 걸 알았다.
“엘프도 잡아다 실험을 했나보군.”
탈라트 부족의 엘프일 것이다. 테블스 산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엘프 부족은 탈라트 부족 하나 뿐이었으니까.
문수르는 두 눈을 감았다. 죽은 엘프에 대해서 잠시나마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잠시 뿐이었다.
문수르는 곧바로 엘프의 시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로이드, 어떻게 생각해?”
- 부패가 진행 중인데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환기시절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어떤 마법에 의해서 이렇게 된 건지 알겠어?”
-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마법 그리고 약물을 통한 어떠한 작업이 된 건 확실하군요.
“흠.”
문수르는 잠시 생각의 방향을 달리했다.
부패는 한다.
하지만 냄새가 나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흑마법사는 어째서 냄새가 나지 않는 시체를 만들고자 한 것일까?
‘냄새는 약점이다.’
언데드 몬스터 특히 구울이나 좀비 따위의 몬스터들이 가지는 약점 중 하나는 악취다.
물론 그 악취가 반대로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악취 때문에 언데드 몬스터의 위치는 눈을 감아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암살 따위도 불가능하다. 시체 썩는 냄새는 제 아무리 향수를 뿌려도 어찌할 수 없는 거니까.
반대로 말하면 악취를 없애면 시체를 시체 같지 않도록 꾸미는 게 가능하다.
충분히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언데드 몬스터를 암살자로 이용한다면 그 효용가치는 꽤나 높은 편이니까.
분명 이유가 있다.
흑마법사는 이유 없는 실험을 하지 않는다. 아니, 세상 모든 이들이 이유 없는 실험을 하지 않는다. 실험은 자신이 생각한 무언가를, 목적을 위해서 하는 거니까.
“좋아. 샘플을 채취하고…….”
문수르는 준비해온 도구로 시체의 샘플을 채취했다. 그 후에 좀 더 자세히 주변을 살폈다.
GPS볼로 찾지 못한 무언가가 있진 않을까, 살펴봤다.
“응?”
그때였다.
문수르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이건…….”
썩어문드러진 시체, 해골만 남은 그 시체의 뱃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천조각 같았다.
문수르는 그 천조각을 만졌다. 젖었다 마른 흔적이 역력했다. 재질을 보면 옷을 만드는 데 쓰이는 천조각 같았다. 문수르는 천조각을 조심스럽게 살펴봤다.
천조각에는 글이 쓰여 있었다.
순간 문수르는 직감했다.
‘먹었구나.’
누군가 흑마법사에 잡혀 실험실로 끌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온갖 생체실험의 재료가 되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이 사실을 어떻게든 남기기 위해, 전후사정을 옷가지에 적은 후에 그걸 먹은 것이다.
그러다가 시체가 썩고, 장기마저 썩어버리면서 위장 속에 있던 이 천조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단서다.
문수르는 천조각 내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