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3.
테블스 산의 개간작업은 착실하게 진행됐다.
새로운 기가스 파일럿의 육성 작업도 착실하게 진행됐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상황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문수르는 또 다시 근심걱정을 품게 됐다.
“아, 이걸 어찌해냐 하나……”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거절을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대로 가야 하는 건지……”
그건 다름 아니라 이리아 이제르트에 대한 문제였다. 최근 들어 문수르를 향한 이리아의 연애 감정이 조금씩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중이었다.
모를 리 없다.
제 아무리 둔한 문수르라고 해도 이리아가 문수르를 돕는 시녀들을 일일이 관리하고, 또한 문수르와 어떻게든 대화를 하기 위해 자주 찾아오고, 그리고 찾아올 때마다 화장이 짙어지고, 옷차림이 보다 화사하고 화려하게 변하는 걸 보면 알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예전에 이미 키스마저 한 번 하지 않았던가?
‘반강제적이었지.’
어쨌거나 그 날 이후로 이제르트 백작도 그렇고, 은연 중에 백작가 사람들도 어떻게든 이라이와 문수르를 엮어 주려는 의중을 품고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이제르트 백작가 입장에서 문수르는 놓칠 수 없다. 그런 문수르를 가장 꽉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은 결국 혼인을 통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 문수르 앞에 오는 영주들의 편지들이 적지 않다. 그 편지들 중 대부분이 문수르와 자기 딸을 엮어주려는 의중을 가진 경우다. 다른 영주들 생각도 똑같다.
콩탄 왕국 세 번째 오러 마스터.
여기에 정치 실세로 떠오른 이제르트 백작가의 측근 중의 측근!
이런 타이틀 뒤에 미혼이란 타이틀까지 붙었는데, 관심을 가지지 않을 영주가 없을 리 만무하다.
딸 가진 영주들은 전부 문수르를 찔러보는 상황이다. 딸 없는 영주는 입양을 해서라도 찔러볼 기세다.
이제르트 백작가 입장에서도 속이 탈만한 상황이다. 이러다가 정말 문수르가 다른 여자와 눈이 맞기라도 한다면?
“후우…….”
문수르도 미칠 지경이다.
사실 테블스 산 개간 작업이나, 새로운 기가스 파일럿 양성 과정은 힘들지만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
하지만 연애는 답이 없다.
심지어 문수르는 연애 경험도 많지 않았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면연력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문수르는 갈피조차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4.
나탈라.
그녀는 이제 이리아의 언니와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더불어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슬그머니 자신의 성인 제르둔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빅토리안 공작의 반역 이후 많은 것들이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개중에 제르둔 후작가에 대한 것도 있었다.
본래 제르둔 후작가는 빅토리안 공작과의 정치 싸움에서 패배하고, 이후 음모에 빠져 반역으로 몰렸다.
그런데 빅토리안 공작의 반역이 알려지면서 그 부분에 대한 새로운 조사가 시작됐다.
제이머스 공작의 역할도 컸다. 제이머스 공작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래도 전우라 할 수 있는 제르둔 후작의 명예라도 구해주기 위해 그 부분에 대해 조사를 했다.
필로스 왕도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빅토리안 가문의 흔적을 지우고, 빅토리안 가문의 명예를 추종하려는 자들이 조금이라도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는 빅토리안 가문을 반역에 실패한 가문 수준이 아니라, 아주 사악하고 더럽고, 지저분한 가문으로 역사에 남길 필요가 있었다. 그런 필로스 왕 입장에서 빅토리안 가문의 명예가 떨어지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조사 끝에 제르둔 후작가에 내려졌던 반역죄는 사라졌다.
물론 그뿐이었다.
몰수된 제르둔 가문의 재산 그리고 후작이란 작위가 다시 수여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나탈라 제르둔은 충분히 만족했다.
어디 가서도 제 이름을, 부모가 지어주고 가문이 물려준 이름을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더 이상 세상에 숨어살 필요도 없었다.
또한 이런 나탈라를 도와줄 사람들은 많았다. 당장 제이머스 공작부터 그녀의 후원인이 될 수 있을 터.
제이머스 공작가의 후원을 받는다면 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고, 가문을 이어갈 후계자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훗날 그 가문의 후계자가 다시 제르둔 가문을 후작가의 지위에 올려줄 수도 있겠지.
그러네 나탈라는 이제르트 백작가에 남았다.
그녀는 이제르트 백작가의 매력에 흠뻑 빠져 버린 것이다. 이제르트 백작가가 가진 매력,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그 매력에 말이다.
어쨌거나 그녀는 더 이상 이름을 숨긴 채 살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행동에도 적극성을 띄기 시작했다.
그 적극성의 결과는 이리아를 통해서 나온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안 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문수르 경 같은 남자는 무조건 공격을 해야 돼. 저번처럼 키스라도 기습적으로 해야 돼.”
“하, 하지만…….”
“이리아, 망설이지 마. 지금 문수르 경을 노리는 귀족가 영애들이 한둘이 아니야. 문수르 경이 이러다할 연회나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그 정도인데, 문수르 경이 이런저런 파티에 참석한다고 생각해봐. 그럼 더 많은 영애들이 몰려들 거야.”
나탈라는 이리아에게 코치를 해줬다.
문수르의 마음을 휘어잡을 코치를!
물론 그렇게 말하는 나탈라도 남자 경험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그리고 사실 그게 문제이기도 했다.
적극적이라고 해서 언제나 결과가 좋은 건 아니다.
오히려 무지한 상황에서의 적극성은 좋지 못한 결과를 불러오기도 하는 법이니까.
더군다나 지금 나탈라는 어떤 의미에서 이리아를 가지고 실험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름 아니라…….
똑똑!
“이리아 아가씨 그리고 나탈라 양.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니라 포비어 경이었다. 포비어의 등장에 이리아는 별다른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포비어 경은 가문의 중요한 기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반대로 나탈라의 얼굴을 새빨갛게 변했다.
그렇다.
나탈라,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포비어 경에게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본래는 문수르를 향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리아와 함께 지내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 마음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그 후에 이리아 곁에서 계속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문수르와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비슷한 느낌의 포비어 경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연애는 글로만 배운 전형적인 부류! 더불어 포비어는 문수르 이상으로 상대하기 힘든 타입이었다.
이런 이유로 나탈라는 거의 이리아를 이용해 연애에 대한 정보를 쌓는 중이었다.
“들어오세요.”
한편 포비어가 이리아 아가씨를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다름이 아니라 백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아마도 그 파티 건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곧바로 움직이겠에요.”
이리아 이제르트.
이제까지는 건강 문제 때문에 영지에만 틀여 박혀 있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매우 건강하다.
때문에 더 이상 그녀는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이제르트 가문의 장녀라는 타이틀이 있다. 그 타이틀에 맞는 일을 해야 한다.
영지를 대표해 파티에도 참석해야 하고, 영지를 돌아다니며 영지민들과의 만남도 가져야 한다. 또한 이제르트 백작 부인이 없는 자리를 그녀가 대신 채우기도 해야 한다.
할 일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이리아는 그런 자신의 역할이 귀찮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감사했다.
몸이 아플 때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때문에 너무 속상했다.
언제나 지쳐보이는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지금의 이리아는 얼마든지 아버지인 이제르트 백작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 됐다.
기쁠 지경이다.
이리아가 이제르트 백작으로 만나러 갈 준비를 했다. 나탈라 역시 그런 이리아를 돕기 위해 움직였다.
5.
이제르트 백작 앞으로 편지가 왔다.
그건 다름 아니라 초대장이었다.
“불스 후작의 기념 파티가 주최되는구나. 이리아, 네가 내 대신에 그 자리에 참석해야 할 듯싶다.”
불스 후작.
콩탄 왕국의 귀족들 중에 2인자 소리를 듣게 될 정도로 막강한 정치권력을 가지게 된 자다.
그런 불스 후작은 자신의 후작 즉위식을 기념해 파티를 주최했다.
그리고 콩탄 왕국 전역에 초대장을 보냈다. 불스 후작은 원하는 대로 후작의 작위에 올랐지만 그 사실에만 만족할 생각이 눈곱 만큼도 없었다.
기회였다.
이번 일로 불스 후작과 관계를 맺으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 사이에 경쟁을 붙이게 되면 불스 후작이 가지게 될 이익은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불스 후작은 이제르트 백작가에도 초대장을 보냈다. 불스 후작 입장에서는 이제르트 백작과의 연계가 중요했다.
필로스 왕은 불스 후작이 이제르트 백작가를 견제해주기를 원했지만 불스 후작의 생각은 좀 달랐다.
불스 후작이 이제르트 백작가와 손을 잡는다면 제이머스 공작을 견제하는 것 역시 가능해진다.
제이머스 공작이 아군이라고?
정치에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는 법이다.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때 얻는 것만이 정답이다.
이제르트 백작은 그런 불스 후작의 심중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르트 백작 역시 불스 후작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불스 후작과 손을 잡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상황을 이용해 이제르트 백작가의 이익을 도모하겠다는 의미다.
그렇기 위해서는 이제르트 백작이나 문수르가 파티에 참석하는 것보다 이리아를 보내는 게 낫다.
애매하게 만드는 것이다.
불스 후작과 이제르트 백작가 사이가 친하지만, 그렇게 끈적끈적한 관계는 아니라고 보여주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이리아가 불스 후작가를 향하게 됐다.
“네 역할이 중대하다. 큰 무례 없이 잘 행동하거라.”
“예,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이제르트 백작의 진중한 말에 이리아 역시 각오가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불스 후작가의 파티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까지.
“문수르 경과의 사이는 어떻냐?”
“예?”
“사이에 진전은 있었느냐?”
“그, 그러니까 그게…….”
이제르트 백작.
그 역시 이리아와 문수르의 사이를 격하게 응원 중인 사람이었다. 딸 가진 아버지에게 사위는 곧 도둑놈이나 다름없다고 하지만, 이제르트 백작에게 문수르는 도둑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좋은 관계가 되었으면 하는 게 지금 이제르트 백작의 마음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최근에는 저를 피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것 같기도 하고…….”
“이리아. 걱정 말거라. 넌 충분히 예쁘단다. 문수르 경이 너를 싫어할 리가 없다.”
“정말 그럴까요?”
“물론이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거라. 계속해서 이대로 나가면 네 진심이 통할 것이다.”
아버지의 응원에 이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에 다시금 각오가 어리기 시작했다.
6.
히스티.
가누스의 제자이며, 이제는 훌륭한 탈라트 부족의 검사이기도 한 그녀는 테블스 산 수색대의 대장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는 수색대의 대원들이 가져오는 정보들을 수집해 정리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아, 귀찮아.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돼?”
더불어 히스티, 그녀는 자신의 임무에 대해서 굉장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왜 자신이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그녀는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명령이니까!
스승인 가누스의 명령이라고 따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 히스티에게 정보 하나가 왔다. 그 정보 앞에서 그녀는 더 이상 불성실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이게 확실해요?”
“확실합니다.”
엘프가 가져온 정보.
“정말 흑마법사의 던전이 발견된 거죠?”
“주변에 있는 오크들의 시체 그리고 흔적 등을 살펴보면 흑마법사의 던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건 다름 아니라 테블스 산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던전이었다.
“그 던전에 지금 흑마법사가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테블스 산의 개간 작업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