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222화 (220/293)

222화

<67화. 잊혀진 땅.>

1.

테블스 산 개간 작업이 시작됐다.

단순히 산의 몬스터를 보이는 족족 처치하는 식의 무식한 방법은 절대 아니었다.

“로이드, 오늘은 어때?”

- 특이점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좋아. 그럼 그대로 계획을 실행하고…… GPS파일럿들을 움직여서 지역을 확대시켜.”

- 알겠습니다.

문수르에게는 GPS시스템이 있었다.

GPS시스템을 이용해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의 개간작업을 계획했고, 차례차례 진행했다.

가장 먼저 선을 그렸다. 산 또는 언덕, 강가 등 방어에 용이한 지역을 기준으로 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 선 안에 있는 땅을 땅따먹기 하듯 개간하는 것이 문수르의 목적이었다.

또한 몬스터의 동향도 살폈다. 이 부분은 GPS시스템보다는 탈라트 부족 소속의 엘프들이 큰 도움이 됐다. GPS시스템에 투시 능력이 없는 이상, 울창하기 그지없는 테블스 산의 나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무리가 있었으니까.

정보 수집.

그에 따른 작전의 수립.

마지막으로 작전의 수행.

“1년.”

문수르는 개간 작업에 걸릴 시간을 최소 1년으로 잡았다. 말 그대로다. 최소 1년, 그보다 더 길어질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다시금 테블스 산의 몬스터 개체 수가 늘어날 테고, 외부 상황의 변화로 인해서 테블스 산 개간 작업에 병력을 투입하는 게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도중에 개간 작업을 접어야겠지.

“성벽도 쌓아야 하니까…… 젠장.”

결국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쌓이는 건 스트레스 뿐이다.

- 주인님 시간됐습니다.

“벌써?”

그리고 문수르에게는 신경 쓸 일이 하나 더 있었다.

- 이대로 놔두다간 전부 죽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젠장……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군.”

새로운 기가스 파일럿을 양성하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문수르는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2.

슈페언 백작.

그가 왕도를 찾아왔다.

갑작스런 방문이었지만, 필로스 왕 입장에서는 슈페언 백작의 방문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병력을 이끌고 온 것도 아니었다. 슈페언 백작은 호위를 위한 기사 몇 명과 수발을 들어줄 하인 몇 명을 대동하고 왕도를 방문했을 뿐이었다. 제국과 왕국의 친교를 위한 방문이라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슈페언 백작을 내치는 건 필로스 왕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곧바로 슈페언 백작과 필로스 왕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만찬.

입이 벌어질 정도로, 식탄 다리는 무너질 정도로 많은 양의 진미(眞味)들이 늘어져 있었다.

그 만찬 앞에 앉을 수 있는 건 단 두 명 뿐이었다.

슈페언 백작과 필로스 왕.

그 둘만이 먹을 수 있는 음식.

하지만 그 둘은 자신 앞에 놓인 음식들을 거의 손조차 대지 않은 상황이었다.

“필로스 전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무탈했소.”

“빅토리안 공작…… 아니, 반역자 빅토리안에게 암습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너무 놀랐습니다. 때문에 경중 없이 무작정 병력을 이끌고 콩탄 왕국에 들어온 부분에 대해선…… 이제라도 사과를 하겠습니다.”

정중한 사과.

그러나 필로스 왕은 그 사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걸로 끝내겠다는 거군.’

사실 이대로 넘어갈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슈페언 백작의 행위는 침략 행위나 마찬가지다. 왕의 허락도 없이, 왕국의 땅에 무단으로 병력을 이끌고 들어온 게 침략이 아니라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제대로 걸고 넘어지면 슈페언 백작을 다시는 콩탄 왕국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제국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 그래서 걸고 넘어지지 못할 뿐.

필로스 왕은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약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힘이 있었다면 이런 굴욕을 당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괜찮소. 짐을 돕기 위한 의도 때문 아니었소? 개념치 마시오.”

“하하, 역시 필로스 전하께서는 참으로 호통하십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슈페언 백작의 화술은 나름 교묘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교묘한 화술만 사용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다.

그는 이런 감언은 오히려 익숙하지 못한 자다.

반대로 직설적인 화법을 주로 쓴다. 애초에 그런 성정의 자다. 그리고 직설적인 화법을 쓴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다. 그는 슈페어 백작, 제국에 낳은 천재 기사다.

그가 가진 무력은 그의 말을 곧 법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보다 카이탄 폐하께서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카이탄 황제께서? 무슨 연유이오?”

“다름 아니라 콩탄 왕국에 등장한 사악한 흑마법사들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제국은 흑마법사의 존재를 용납지 않습니다.”

드디어 왔다.

필로스 왕은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예상했던 말이 나오니, 기분이 편해질 정도다.

“무슨 말이오?”

“콩탄 왕국을 믿지 못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콩탄 왕국에서 사악한 흑마법사의 흔적이 발견된 건 분명한 사실! 폐하께서는 제가 그 사악한 무리들을 추격하여 말살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정론이다.

여기서 반대하기 위해서는 작정을 해야 한다. 작정을 한다면…… 이 역시 제국의 의견을 무시하는 꼴. 제국이 요즘 잠잠하다고 해도 받은 도발을 그냥 보고 있을 정도로 잠잠한 곳은 아니다.

‘좋아.’

이제부터 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황명(皇命)이라고 했다. 필로스 왕이 그 황명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황명을 가져온 자, 슈페언 백작의 심기를 비틀고 관심을 돌리는 건 가능하다.

“흠…….”

가볍게 뜸을 들린 필로스 왕.

“카이탄 황제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니, 오히려 콩탄 왕국의 일을 제국에 떠넘기는 것 같아 송구스러울 따름이오.”

한 번 튕긴다.

송구스러우니까, 그냥 알아서 하겠다. 뭐 이런 의미다.

당연피 슈페언 백작은 다시 치고 들어온다.

“아닙니다. 흑마법은 인류의 적! 그런 사악한 무리들을 처치하는 데에 무슨 국경이 있겠습니까? 제게 맡겨만 주신다면 뿌리까지 발본색원하도록 하겠습니다.”

“허어…… 슈페언 백작이 해야 할 일이 많을 터인데, 왕국의 일에 그리 신경 써도 되겠소?”

“콩탄 왕국은 예전부터 저와 긴밀한 관계가 아니었습니까? 이런 저이니 더더욱 제가 나서야 할 것입니다.”

“흠…… 그렇다면 그 일은 그냥 무르는 게 좋겠구려.”

“음?”

여기서 새로운 화제가 떠올랐다.

슈페언 백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일은 그냥 무른다고?

‘대체 뭐야? 또 무슨 꿍꿍이를 꺼내려는 거냐?’

슈페언 백작은 기다렸다. 필로스 왕이 이유를 말하기를. 필로스 왕은 그걸 알았기에 뜸을 들였다.

이 순간 손도 대지 않았던 음식에 손을 댔다. 잘 만들어진 고구마 튀김, 그것을 입에 넣었다.

“아, 슈페언 백작, 이것 좀 드셔 보시오. 이제르트 백작가에서 보낸 선물인데, 맛이 참 대단하오.”

고구마 튀김.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르트 백작가에서 보내준 고구마를 이용해 만든 요리였다.

필로스 왕은 그 고구마의 맛에 꽤나 만족했었다. 그러니 이번 만찬에도 고구마 요리가 나오는 건 당연지사.

“하하……!”

슈페언 백작은 웃었다. 약간은 어색한 웃음이었다.

‘젠장.’

속으로는 이렇게 뜸을 들이는 필로스 왕의 의중에 짜증이 났다.

지금 필로스 왕은 슈페언 백작이 부탁하듯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대체 무엇을 무른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대한 물음이다.

“전하, 방금 하신 말을 계속 해주셨으면 합니다.”

결국 슈페언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슈페언 백작의 모습에 필로스 왕이 미소를 지었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이런 기싸움이 하나 둘 쌓이게 되서 중요한 정치적 결과를 만드는 법이다.

“별 거 아닐세. 다름 아니라 슈페언 백작, 그대와 비슷한 제안을 한 이가 있었네.”

“비슷한 제안이라 하시면…….”

“아히만트 백작이라고 자네도 알고 있는 자 아닌가?”

아히만트 백작!

드디어 그 이름이 나왔다. 슈페언 백작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회심의 미소 따위는 아니었다.

예상했던 이름이었기에, 그 이름을 듣고도 당황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준비했던 말을 늘어놓았다.

“훌륭한 기사입니다. 황제 페하님의 충신 중의 충신이며, 기사 중의 기사이지요.”

술술, 잘도 나온다.

극찬도 이런 극찬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다.

물론 속마음은 달랐다.

‘아히만트 백작, 네놈이 결국 이렇게 나온다 이건가? 흥! 감히! 감히 나를 상대로? 고작 검이나 좀 쓸 줄 알아서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 개에 불과한 네놈이?’

아히만트 백작을 향한 분노가 솟아올랐다.

그런 슈페언 백작의 심중을 읽기라도 한 듯, 필로스 왕은 말을 이어갔다.

“아히만트 백작 역시 슈페언 백작, 자네와 비슷한 말을 했네. 흑마법사들의 존재에 대해서 카이탄 황제가 심히 걱정이 깊으니, 자신이 나서서 흑마법의 흔적을 뿌리 뽑아주겠다더군. 당연한 말이지만 정중히 거절했네. 왕국과 그다지 인연도 없는 아히만트 백작에게 왕국의 일을 떠맞기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상황을 이해한 슈페언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습니다.”

여기서 슈페언 백작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필로스 왕이 바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필로스 왕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이유는 하나다.

둘 중 하나를 고르겠다는 거다.

슈페언 백작 그리고 아히만트 백작.

둘 중에 필로스 왕에게 보다 많은 이익을 주는 자와 앞으로 동행하겠다는 의미다.

슈페언 백작이 떠올려야 하는 건 방법이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서든 필로스 왕의 마음을 끌어야 한다. 그의 구미를 당길만한 제안을 해야 한다.

선택지는 몇 개 있었다.

‘아니, 그걸로는 부족해.’

그러나 개중에 필로스 왕을 설득할 만한 선택지는 없었다.

슈페언 백작은 당장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지만, 염두에 두었다고 해도 지금 당장 슈페언 백작이 내세울 수 있는 카드는 많지 않다.

어설프게 카드들을 내놓았다가는 오히려 손해 보는 정치를 하게 될 지도 몰랐으니까.

조심스럽게 나가야 한다.

아쉽지만, 어쩌면 제대로 된 정치를 하는 건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일지도 모른다.

“아히만트 백작이 왔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보다 이 고구마란 음식 참으로 맛있군요. 신기합니다. 이런 건 처음 먹어봅니다.”

이번에는 슈페언 백작이 음식으로 화두를 돌렸다.

물론 방금 전 필로스 왕이 음식으로 화두를 돌렸을 때와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젠장.’

그건 슈페언 백작이 지고 들어갔다는 의미와 마찬가지였다.

필로스 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히만트 백작에 대한 이야기는 거짓이다. 만난 적도 없고, 아히만트 백작이 만나러 온 적도 없다.

솔직히 도박수였다.

잘못하면 자충수가 될지도 모르는 도박수!

'시작이 좋군.'

그런데 그 도박수가 제대로 먹힌 상황이었다. 슈페언 백작이 이 정도의 반응을 보여줄 줄은 몰랐다.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다

때문에 필로스 왕이 미소를 짓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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