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220화 (218/293)

220화

4.

카이탄 황제.

페스로 제국의 주인이며, 젊을 적에는 전쟁의 제황이라고 불렸으나, 어느 순간 전쟁 대신 정치를 택한 자.

덕분에 페스로 제국은 십 년 넘게 전쟁이 아닌 정치로 제국을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전쟁은 지배자들에게는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다. 패자에게는 혹독하지만, 승자에게는 찬란한 게 전쟁이다. 어차피 죽는 건 병사들이고, 기사들이다. 지배자들, 영주들, 귀족들은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은 채 전쟁이란 유희를 즐길 수 있다.

하물며 페스로 제국은 전쟁에서 패배한 역사보다 승리한 역사가 훨씬 많은 전쟁의 나라다.

전쟁을 통해서 손해보다 이익을 얻는 경우가 많다.

그런 페스로 제국의 귀족들에게 전쟁은 즐거운 유희였다.

반대로 제국민들은 그런 페스로 제국의 팽창주의에 고역을 치르는 게 사실이었다.

약탈이니, 방화, 강간 따위가 허용된다고 해도 그건 일시적인 스트레스 해소에 불과하다.

언제 전쟁을 할지 모른다, 언제 전장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생각은 페스로 제국의 제국민들에게 지속적인 그리고 거의 반영구적인 스트레스를 주고는 했다.

그런 스트레스를 받으며 수백 년을 넘게 살아오면 근본이 뒤바뀌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카이탄 황제는 그 전쟁을 잠시 멈추면서 정치로 제국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카이탄 황제가 어설픈 정치를 한다면, 오히려 제국은 혼란에 빠지고 종국에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지도 모른다고.

많은 이들이 카이탄 황제에게 충언을 하기도 했다.

이제까지처럼 전쟁을 통해 귀족들의 불만을 억누르고 그들의 세력을 갉아먹게 하시옵소서…….

그럼에도 카이탄 황제는 밀고 나갔다.

그리고 나름 성공했다.

제국에는 전운이 잦아들었다. 제국민들은 그런 상황에 이제 충분히 적응한 상황이다.

제국민들의 삶에 안정이 찾아오자, 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삶이 풍요로워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다.

아니, 대단한 일이다.

때문에 제국민들에게 카이탄 황제는 전쟁과 폭력을 일삼는 황제가 아니라, 인과 덕으로 나라를 이끄는 성군(聖君)이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폭군이 되고 싶을 따름이군.”

“폐하, 폐하께서는 무엇을 하시든 성군으로 남으실 것입니다.”

“노운 경은 언제나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군.”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옵니다.”

그런 카이탄 황제에게 최근 충신 한 명이 붙었다. 충신 정도가 아니라, 카이탄 황제의 총애를 받는 자였다.

이름은 노운 질러스.

질러스란 성은 무려 카이탄 황제가 직접 하사한 성(姓)이기도 했다.

굉장힌 특혜였다.

성이 없다는 건 그 전까지 평민이었다는 소리다. 평민은 감히 황제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신분이다.

그런 그가 무려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도 모자라, 황제에게 직접 작위를 받고, 성까지 하사 밭았다.

총애도 이런 총애가 없다.

대체 노운 경이란 자의 정체가 무엇인가?

현재 제국에서 정치의 중심에 있는 귀족들 대부분은 노운 경의 정체를 파악하느라 분주한 상황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번에 기획한 카이탄 황제의 황태자 선별 계획에 노운 경의 입김이 적지 않게 적용됐다는 사실이다.

적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거의 노운 경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달리 말하면 페스로 제국의 차기 황태자 자리는 노운 경이 뽑고, 황제가 임명한다는 소리다.

차기 황권의 주인을 가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

그게 바로 지금 노운 경의 이름 아래에 감춰진 무시무시한 권력이었다.

“그보다 노운 경, 일은 어찌 되는가?”

“콩탄 왕국에서의 일이 예상 외였지만, 나쁘진 않습니다. 특히 밀라스 왕국에서의 일은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올 듯합니다.”

“허허, 밀러스 왕국…… 가장 까다로운 곳 아니었나?”

“베인 후작님이 크게 수고하셨습니다.”

“베인 후작…… 훌륭한 충신이지. 짐이 나중에 그를 만나게 되면 꼭 이번 일을 기억해두겠네.”

“폐하의 그 말씀에 베인 후작님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보다 요즘 들어서 가슴이 다시 답답해졌네.”

“다시 약을 제조해드리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폐하의 옥체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더불어 지금 노운 경은 카이탄 황제의 모든 건강을 책임지는 인물이기도 했다.

세상은 모른다.

한때 카이탄 황제가 죽음 앞까지 도달했었다는 사실을.

그런 그를 죽음에서 끌어올린 게 노운 경이란 사실을 말이다.

노운 경이 아니었다면 카이탄 황제는 지금 살아서 황좌에 앉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짐의 목숨이야 내일 끊겨도 천수를 누린 것이지.”

“불경한 소리입니다. 폐하의 목숨은 하늘이 꺼져도 무사할 것입니다. 소신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렇게 만들겠사옵니다.”

“허허, 듣는 것만으로도 기쁘구나.”

5.

“폐하의 옥체는 어떠하시오?”

아히만트 백작.

황제의 방 밖에서 대기 중이던 그는 문이 열리고, 노운 경이 등장하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 갈색빛 머리칼이 인생적인 노운 경.

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탈하십니다.”

“노운 경 덕분이오.”

황제의 검이라 불리며 황제의 충신 중의 충신으로 평가 받는 아히만트 백작.

그런 그가 노운 경에게 이렇게 자세를 낮추는 건, 단순히 노운 경이 황제의 최측근이라거나, 총애를 받아서 그런 게 아니다.

아히만트 백작은 기억한다.

어느 날 황제가 그를 불렀다.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황제가 자신의 호위를 위해 가장 믿을 수 있는 아히만트 백작을 황도로 부른 것이다.

거기서 만났던 황제는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초췌하고 망가진 상황이었다.

후계자 구도조차 제대로 확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카이탄 황제의 목숨이 종국에 다다른 것이다.

기겁했다.

비슷한 이유로 아히만트 백작처럼 황도로 올라왔던 소수의 귀족들은 진지하게 말했다.

“이대로 폐하께서 승하(昇遐)하신다면 제국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이 올 겁니다.”

“여전히 황자와 황녀님들은 일곱 개의 세력으로 나누어 후계자 경쟁 중인데…… 이러다 제국이 일곱 개로 나뉠 수도 있습니다.”

“정말 폐하께서…… 이런 말은 정말 해서는 안 되지만, 후계자를 정해두지 못하신 채 승하하신다면…… 가짜라도 세워야 할 겁니다.”

가짜 황제라니?

그 위대한 황위, 제국의 주인 자리에 가짜를 앉힌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평소에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아히만트 백작은 화를 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 그 말을 뱉은 자의 목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아히만트 백작도 그 의견에 일말의 동의를 표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가짜 황제라도 내세워서 후계자 경쟁이 어느 정도 정리될 때까지 황제의 부재를 막는 것이 제국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될 정도였으니까.

그 무렵이었다.

노운 경, 그가 등장했다.

그의 등장은 갑작스러웠지만, 그때의 상황은 더 갑작스러웠다.

황제의 승하 소식이 황도에 모인 황제의 최측근들에게 알려졌다. 그때 모두가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제는 정말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아니, 시체였다.

아히만트 백작이 시체와 시체 처럼 누워있는 사람을 구별하지 못할 리 만무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실제로도 하늘이 무너진 상황이었다.

그때!

정말 죽었던 카이탄 황제를 노운 경, 그가 살려냈다. 그는 신묘한 능력을 이용해 산 자의 심장으로 카이탄 황제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했다.

마치 신(神)의 능력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히만트 백작은 감시를 이유로 노운 경이 이룩한 기적을 전부 보았다.

그때 이후로 아히만트 백작은 깨달았다.

노운 경, 그는 신이 제국을 보살피기 위해 보낸 사자라고!

다시 살아난 황제가 노운 경을 최측근으로 두고 총애하는 건 당연했으며, 황제의 죽음을 보았던 모든 귀족들은 노운 경에 대한 질투 대신에 경외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보다 슈페언 백작과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잘 되었소. 계획이 틀어지긴 했지만…… 내가 직접 슈페언 백작과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콩탄 왕국을 뒤흔들 것이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콩탄 왕국이 흔들려야 정세가 흔들립니다.”

“물론이오.”

“그건 그렇고 따님의 몸은 어떻습니까?”

더불어 아히만트 백작.

“나날이 좋아지고 있소.”

그는 노운 경에게 개인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의 딸.

어여쁘기 그지없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두 다리로 걷지 못하는 병신이었다.

뛰어난 힐링 마법사를 데려왔지만 그 누구도 치료하지 못했다.

아히만트 백작은 그 사실을 숨겼다. 사실 아히만트 백작이 대외적인 활동을 꺼린 것도 그때문이었다.

대외적인 활동, 정치활동을 하려면 사교파티에 자주 참석해야 되고, 자연스럽게 모든 행동이 가십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아히만트 백작의 딸아이에 대한 이야기도 가십거리가 될 것이다.

그게 싫었다.

물론 정치를 하는 게 싫기도 했다.

기사는 기사, 검은 검으로 남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정치를 하면서까지 더 큰 것을 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노운 경과의 만남.

이후 카이탄 황제는 아히만트 백작으로 하여금 노운 경의 호위를 담당하라고 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또한 영지가 없는 노운 경은 아히만트 백작가에서 지내면서, 일을 처리하고는 했다.

그런 노운 경이 아히만트 백작이 숨기고 있던 그의 딸을 보고는 그의 딸을 치료해줬다.

처음에는 미동도 안 했던 앙상한 두 다리가 노운 경의 치료를 받은 후에는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발가락이 움직여졌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무릎이 굽혀졌다.

더 시간이 지나자 어설프게나마 걸을 수 있게 됐다.

기적이었다.

아히만트 백작은 그 순간 개인적인 큰 빚을 노운 경에게 진 셈이 되었다. 황제를 위해서만 바치겠다고 한 목숨을 노운 경을 위해서라도 받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꾸준한 치료를 받으면 나중에는 뛸 수도 있으실 겁니다.”

“지금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오. 이게 전부 노운 경의 보살핌 덕분이오.”

“하하, 제가 도움이 됐다니, 그것만으로도 기쁠 따름입니다.”

“아니오. 노운 경, 그대는…… 신이 제국과 폐하를 위해 보내준 사자나 다름없소.”

“과찬입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계속되는 아히만트 백작의 칭찬에 노운 경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히만트 백작은 그 미소가 마음에 들었다.

아니, 이미 눈에 귀신이 씌인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노운 경이 무엇을 해도, 아히만트 백작에게는 좋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히만트 백작은 보지 못했다.

노운 경, 그의 미소 속에 숨어있는 혀의 날카로움.

그리고 눈웃음을 짓고 있는 눈빛 속에 번뜩이는 섬뜩함을 말이다.

6.

두 번의 노크.

그리고 새로운 세계의 등장.

“이건 언제나 신기하단 말이야.”

고작 두 번의 노크만으로 차원을 넘나든다는 사실은 온갖 일을 겪은 문수르에게 여전히 신기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 주인님, 데이터들을 검토하시겠습니까?

“필요한 것들만 추려서 보고해줘.”

그런 문수르와 다르게 로이드는 그동안 문수르가 케르빈 월드에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자신이 케르빈 월드 내에서 수집한 정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수르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케르빈 월드에서 일어난 일들을 가장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특이사항은 없었다.

콩탄 왕국은 큰일을 마친 뒤라 잠잠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호수 표면이 잠잠한 것뿐이다. 그 호수 아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모른다.

“일이 없으니 다행이군.”

그러나 문수르는 굳이 그 부분까지 지금 당장 고민하진 않았다.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였으니까.

“이미 준비는 마쳤군.”

테블스 산의 개간!

지금 문수르가 집중해야 하는 일은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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