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7.
언제나 그렇듯 초호화다.
“말이 안 나오는군.”
문수는 한석균과 만나기 위해 서울 도심으로 나왔다. 그 무렵 한석균이 호텔로 가라고 했다. 이름만 들면 전 세계인이 알 법한 최고급 호텔이었다. 그 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로비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대신에 종업원들이 줄을 선 채 대기하고 있었다.
전세 아닌 전세를 낸 것이다.
혹시 모를 문수의 불편함을 위해 손님들의 활동을 제약해둔 것이다.
물론 불만을 가진 손님들에게는 다음 숙박을 무료로 해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회유를 했다. 돈이 많은 이들에게는 굳이 그런 걸 할 필요는 없었다. 한석균 회장의 후계자, 박문수가 온답니다…… 그 말 한 마디면 부자들은 알아서 입을 다물었으니까.
문수는 세삼스러웠다.
‘내 처지가 엄청나긴 엄청나군.’
최고급 호텔에서도 가장 비싼 최고급 스위트룸, 그곳을 혼자 쓰게 된 문수는 자신의 처지를 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예전 같으면 이 호사를 즐기느라 바빴겠지만 요즘 들어서는 이 호사도 호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찜찜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특히 문수의 심중을 건드리는 것은 다름 아니라 새로운 노크 센터였다.
제2 노크 센터.
‘이해가 안 돼.’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에 문수의 성정은 너무 바뀌었다.
특히 한석균은 누누이 강조했다.
모든 걸 의심해보라고.
그 의심의 대상에는 한석균도 있을 수밖에 없다. 문수는 한석균을 의심하고 있었다.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한석균.
뛰어난 자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자다. 케르빈 월드에서도 그는 대마법사였고, 어스 월드에서는 세계 최고의 대부호가 된 자다.
문수는 생각했다.
만약 문수 자신이 한석균이었다면…… 그렇다면 이제르트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 무슨 방법을 썼을까?
- 주인님, 회장님의 전화입니다. 받으시겠습니까?
생각에 빠졌을 무렵, 로이드가 한석균 회장의 전화를 알려줬다.
문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거절하고 싶다고 거절할 수 있는 팔자는 아니잖아?”
- 그건 그렇지.
곧바로 통화가 연결됐다.
- 잘 쉬었나?
“요즘은 푹 쉬어도 쉰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 몸이 피로에 적응하는 거지. 그보다 보고서는 전부 검토했네. 이제 절반은 한 것 같군.
절반이란 말에 문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절반 밖에 안 된 겁니까?”
- 콩탄 왕국 내에서 이제르트 가문이 핵심에 끼어든 건 사실이지만, 역시 문제는…….
“제국이겠죠.”
- 잘 아는군.
“제국을 상대해야 하는 겁니까?”
문수.
그가 우려하는 것은 제국과의 전쟁이다. 페스로 제국과 전면전을 피하는 게 최선이겠지만, 언제나 최선이란 결과만 얻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그것 때문에 지금 굉장히 마음이 불편했다. 어스 월드에 있는 것 자체가 견디기 힘들 지경이다. 당장 케르빈 월드로 가고 싶었다. 문수르, 자신이 있어야 어떤 위기에서도 그나마 대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제국에는 3배 급 기가스들이 열 대나 있다.
2배 급 기가스들까지는 아이언히트의 머릿수로 어찌 상대가 가능하다.
그러나 3배 급 기가스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엇보다 페스로 제국은 영주 한 명이 보유한 기가스 전력이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영주 서너 명이 연합을 해서 기가스를 모으면, 그 숫자가 이번에 왕도에 모인 기가스 숫자와 비등해진다.
하물며 제국 전체가 나선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 일단 그 부분은 차차 생각하도록 하지. 지금 이제르트 백작가에 중요한 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견고하게 만드는 거니까. 특히 불스 후작의 존재는…… 껄끄럽군.
그런데 막상 한석균은 제국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 불스 후작에게 후작의 위를 준 건 명백하게 이제르트 백작가를 견제하겠다는 의지로군. 꼬투리를 잡을만한 여지를 만들면 안 돼.
“알겠습니다.”
- 그건 그렇고 이번에도 역시나 무리를 했더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단전이 깨진 상황에서 몸을 던지다니? 그보다 대체 왜 위험을 감수하고 쿠틀러 백작가를 도운 거지?
“몬스터 데스나이트를 줄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십여 기가 넘는 몬스터 데스나이트 처치하지 못했다면 왕도는 정말 함락됐을 지도 모릅니다.”
- 뭐, 좋아. 그 부분은 이 정도로 넘어가지.
너무 쉽게 넘어간다.
문수는 이 순간 직감했다.
‘무언가 있구나.’
한석균은 그동안 문수에 대해서 나름 집착이 심했다. 이상한 일은 절대 아니었다. 문수만이 케르빈 월드와 어스 월드를 오고 갈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 만큼 문수에게 집착하는 건 당연했다. 문수가 위험에 빠지면 크게 나무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은 너무 쉽게 넘어간다.
어떻게 보면 문수가 경험한 위기 중에 가장 큰 위기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여기서 문수는 확실하게 느꼈다.
한석균, 그에게 어떠한 것이 생겼다.
여기서 문수는 그 부분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더 이상의 깊은 사고는 로이드에게 발각될 것이다.
“이번에 따로 할 일은 없습니까?”
- 없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어차피 조만간 다시 떠나야 할 테니.
“알겠습니다.”
그것으로 한석균과의 대화는 끝이었다.
8.
한석균은 밀실에 있었다. 밀실이라고 해도 그 평수가 200평을 훌쩍 넘기는 장소였다.
한석균은 휠체어에 탄 상황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영상들도 있었고, 어떠한 그래프도 있었다. 많은 것이 있었다. 한석균은 그 모든 것들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문수 녀석……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것 같군.”
무슨 의미일까?
“하긴 이 정도도 눈치 채지 못하면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가르친 보람이 없겠지.”
씨익, 그 순간 한석균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드디어 시작이군.”
9.
문수는 옷을 챙겨 입었다.
“로이드, 뭐 특별히 추천할 거라고 있어?”
보통 때는 어스 월드에 오면 할 일이 많았다. 지금 문수는 공식적으로 한석균의 후계자였다. 그에 따라 할 일이 굉장히 많았다. 배울 것도 많았다. 때문에 어스 월드에 오면 휴식보다는 이곳저곳 불려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한석균은 딱히 어떤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덕분에 노크 클락의 마력이 차기 전까지, 차원 이동을 하기 전까지 시간이 너무 널널해졌다.
- 그냥 푹 쉬는 게 어떻습니까?
“잠도 자주 자면 질린다.”
- 그럼 야구장이나 가시죠?
“시즌 끝났잖아. 보니까 우리팀 아깝게 준우승 했더라. 내가 가서 금일봉이라도 줬으면 우승했을 텐데.”
- 그럼 저보고 뭐 어쩌라는 겁니까?
“진짜 할 게 없네.”
문수는 실소를 지었다.
예전에는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것도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돈이라면 넘친다. 정말이다. 지금 당장 세계 어디든 가고 싶다면 갈 수 있는 상황이다.
먹고 싶은 것, 자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하고 싶은 게 없다.
몸은 근질거린다.
“무인이 되어버렸군.”
넘치는 힘을 폭발시켜보고 싶다. 지금 문수의 상황은 그런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TV의 채널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로이드가 리모컨을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TV채널이 멈췄다.
- 이건 어떠십니까?
“응?”
문수가 고개를 돌렸다. TV에서 나오는 건 다름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격투기 대회 FI의 광고였다.
문수는 콧방귀를 뀌었다.
“나보고 저기 시합이라도 나가라는 거야?”
문수의 지금 신체 능력은 대단하다.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접어들면서 한 차례 환골탈태를 거쳤다. 그리고 최근 가누스에게 마사지를 받으며, 어긋났던 근골을 다시 짜맞췄다.
오러를 쓰지 못해도 이미 그의 육체적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심지어 저번에는 맨몸뚱이로 에베레스트 정상에도 올라가봤다.
제 아무리 대단한 훈련을 받고, 재능을 가지고, 경험을 가진 격투기의 초일류 선수라고 해도 문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상대 정도가 아니다.
그들은 주먹으로 기껏해야 문수의 코뼈, 갈비뼈 정도를 부러뜨리는 게 전부겠지만, 문수는 주먹으로 그들의 가슴을 함몰시키고, 두개골을 박살낼 수 있다.
- 구경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로이드도 그 정도는 안다.
“저거 라스베가스에서 하잖아?”
- 비행기 예약해둘까요? 아니면 전용기 준비해둘까요?
“꼭 가야 돼?”
- 심심하다고 제게 도움을 요청하신 건 그 누구도 아니고, 주인님입니다만?
문수는 짧게 생각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할까, 말까? 그냥 호텔에서 TV를 보면서 맥주를 마시는 것보다는 재미있을 것이다.
“전용기까지는 뭐하고 비행기 티켓이나 예약해.”
그냥 가보자.
문수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 예약했습니다.
“벌써?”
로이드는 단숨에 비행기 예약을 끝냈다.
- 어차피 전용기 대기도 아니고, 빠른 비행기 편으로 예약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빠른 비행기편? 얼마나 빠른데?”
- 그러니까…… 3시 20분 비행기군요.
“3시 20분?”
그 순간 문수가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시계는 지금 막 2시를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미친…… 여기서 인천국제공항까지 택시 잡고 가도 안 돼!”
- 그럼 자전거 타고 가시면 되겠네요.
문수가 자전거를 타고 가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빠르다. 문수의 신체능력은 초인의 범주를 넘어섰으니까.
아마 택시 따위를 타고 가는 것보다 더 빠를 거다.
물론 여기서 문수는 필요하다면 헬기를 타고 이동해도 된다. 아니, 좀 더 까놓고 말하면 미국행 비행기표가 아까운 처지가 아니다. 까짓거 비행기표가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한석균 같은 경우는 작심하면 당장 원하는 항공사의 대주주가 될 수도 있는 인간인데.
문수도 안다.
알고 있지만…….
“오냐, 자전거로 한 번 가보자.”
문수는 지금 몸이 근질근질했다. 한 번 자전거를 타고 공항까지 달려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때까지 문수는 몰랐다.
인천국제공항에 자전거 타고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10.
“빌어먹을.”
인천국제공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 길을 타고 가야 한다. 인천대교 그리고 영종대교.
당연한 말이지만 차량 이동만 가능하다. 자전거는 들여 보내주지도 않는다. 제 아무리 문수가 자전거를 타고 시속 100킬로미터 이상을 밟는다고 해도 말이다.
문수는 그 사실을 영종대교 앞에 도착한 후에 깨달았다.
“로이드, 이건 말해줬어야지.”
로이드를 나무라는 문수.
- 잠깐 까먹었습니다.
로이드는 먹히지도 않을 변명을 뱉었다.
“그게 말이 되냐……?”
로이드가 까먹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그냥 그렇다고 칩시다.
어쨌거나 다시 거기서 자전거를 타고 물러났다. 여기서 또 다시 문제가 생겼다.
택시를 잡으려고 했는데 수중에 카드가 없었다. 현금도 없었다. 주변에 은행도 안 보였다.
“일이 안 풀리려니까…….”
어찌어찌 해서 돈을 찾았다. 현금으로 두둑하게 챙겼다. 5만 원짜리 지폐 때문에 지갑이 터질 정도로 돈을 챙겼다 그리고 다시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려고 했을 때 로이드가 말했다.
- 아, 여권 안 챙기셨네요.
미국으로 가는데 비자는 그렇다 쳐도 여권은 필요하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문수는 거기서 포기했다.
“됐어! 안 가고 말지!”
이미 비행기 예약 시간은 지난지 오래다. 문수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그때 문수는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할 것도 없고 노크 센터로 가자.”
호텔에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보다는 노크 센터에서 다음 일을 준비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문수는 곧바로 노크 센터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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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