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4.
폐욤 족장과 문수르의 대화는 하루 종일 진행됐다. 폐욤 족장은 자신이 그동안 준비한 모든 정보들 그리고 그 정보들을 토대로 한 자신의 추측과 가설들을 말해줬다.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좋은 기회네.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기회지.”
“맞습니다.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폐욤 족장은 테블스 산에 대해서 나름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없을 리가 만무하다.
이제까지 무수히 많은 탈라트 부족의 엘프들이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탈라트 부족의 족장이 된 폐욤 족장이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가슴이 아프다.
더 아픈 건 그 죽음을 숫자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매년 죽어가는 이들을 숫자로 치부했다. 그들의 죽음에 감정적으로 변하기보다는 냉정하게 계산을 했다.
그래서 복수 따위는 꿈 꿀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더불어…….
“그리고 또 하나, 만약 테블스 산 몬스터 토벌에 성공한다면 문수르 경과 이제르트 자작께 부탁할 일이 있네.”
폐욤 족장에게도 가누스를 테블스 산에 보내면서까지 이런 것들을 준비하고 계획한 이유가 있었다.
이제르트 자작가를 위해서 한 일이긴 맞지만, 폐욤 족장은 여전히 탈라트 부족의 족장이다. 그에게는 탈라트 부족의 미래를 이끌어갈 책임이 있다. 더불어 지금은 인간들에게 밀려 숨어 사는 엘프 족의 일원이기도 하다. 엘프 족의 미래도 생각해야 한다.
“말씀해보십시오.”
“테블스 산 전부를 개간하지 말고, 일부 지역을 엘프들을 위해 줄 수는 없는가?”
테블스 산의 숲은 울창할 뿐더러, 청명하다. 몬스터들이 테블스 산에서 넘쳐나고, 보다 강력해지는 건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테블스 산에 흐르는 기운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 기운은 몬스터에게도 유효하지만 엘프에게도 유효하다.
숲의 힘은 엘프들의 삶에 굉장히 밀접한 영향을 끼친다. 만약 테블스 산에서 몬스터만 사라진다면 엘프들의 천국이 될 만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테블스 산은 이제르트 자작령에 속해 있다. 이게 중요하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도움 그리고 테블스 산의 가지는 힘…… 이것들을 합친다면 엘프 족의 부흥을 이끌 수도 있다.
물론 보통 인간들에게는 감히 부탁할 수 없다. 엘프 족의 부흥은 달리 말하면 인간들의 영역과 이익이 축소된다는 의미니까.
오직 문수르니까!
문수르니까 할 수 있는 부탁이다.
문수르는 아주 잠시 고민했다. 폐욤 족장의 의중을 모를 그가 아니다.
‘엘프 족이라…….’
엘프 족의 부흥. 인류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문명이 더 발달할수록 그 정도는 더 심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은 살기 위해서 자원을 극도로 소모한다. 탐욕도 넘친다. 그런 인간들은 결국 자연을 파괴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부분 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때가서 엘프들과 인간들의 논쟁은 극대화 될 것이다.
‘아주 먼 미래.’
물론 이 모든 건 문수르가 죽은 후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문수르가 고민할 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쁠 건 없다.’
그러나 문수르는 그때 가서 엘프들이 인류는 몰라도 케르빈 월드에 좋은 점으로 남으리라 생각했다.
문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르트 자작님이 어찌 생각하실 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돕겠습니다.”
문수르가 이제르트 자작에게 가지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고맙네.”
그걸 알기에 폐욤 족장은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 순간 문수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문수르가 감짝 놀랐다.
“자네 괜찮나?”
폐욤 족장 역시 문수르의 갑작스런 변화에 놀랐다. 그런 폐욤 족장의 물음에 답하기도 전에 문수르는 쓰러졌다.
‘아!’
한계가 온 것이다.
이제까지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너무 긴장하느라 단전의 상처를, 몸의 상태를 그냥 두고 넘어갔다.
그러나 이미 문수르의 몸은 진즉부터 한계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마차를 타고 왕도부터 이제르트 자작령까지 오면서 지칠 때로 지친 상황이다.
그리고 방금 막 긴장이 풀렸다.
쓰러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게…….’
이번 만큼은 문수르도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문수르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5.
뱃속에서 올라오는 통증.
‘으윽!’
참을 수 없는 통증이다.
그 덕분이었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 문수르의 감각이 깨진 단전에서 느껴지는 통증 덕에 깨어나기 시작했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문수르는 자신이 침상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른 감각들도 돌아왔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냄새가 맡아지기 시작했다.
번쩍!
문수르가 눈을 떴다. 갑작스레 눈을 뜨자 세상이 새하얗게 보였다. 잠시 동안의 빛이 문수르의 눈 안을 가득 채웠다. 그 빛은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천장이 보였다.
‘성 안인가?’
아무래도 기절한 이후 성 안으로 옮겨진 모양이다. 문수르는 쓴 웃음을 지었다.
‘쓰러졌군.’
결국 쓰러졌다. 자신의 건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무인(武人)에게는 치욕이나 마찬가지다.
씁쓸했다.
‘하루 빨리 몸을 치료해야지.’
그걸 말했어야 한다. 바나푸스 나무열매가 필요하다고, 폐욤 족장에게 먼저 말을 했었어야 했다.
“뭐가 그렇게 씁쓸하지?”
“아!”
그때였다.
침상 근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문수르는 정신이 확 깨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가누스 경?”
“몸 상태가 말이 아니더군.”
가누스였다. 폐욤 족장의 명을 받고 테블스 산 조사에 나갔던 그가 돌아온 것이다.
폐욤 족장이 그를 불렀다. 문수르의 상태를 자신이 알아볼 수 없음을 파악하고, 같은 오러 마스터인 가누스를 부른 것이다. 가누스는 곧바로 문수르의 상태를 확인했다.
“오러를 담는 그릇이 깨졌군.”
“그게…….”
“용케 지금까지 버텼군. 언제부터지?”
“조금 됐습니다. 한 달 가까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신기할 정도군. 보통 경우라면 보름 안에 폐인이 되어버릴 텐데.”
“하하, 운이 좋았던 거겠지요.”
문수르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가누스는 그런 문수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초리였다. 문수르의 등골이 싸늘하게 식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무슨 일 있습니까?”
문수르가 가누스의 그 시선, 그 시선 속에 숨은 의중을 모를 리 만무했다.
지금 가누스는 분노하고 있었다. 물론 평소에도 무뚝뚝하고, 화난 것처럼 보이는 가누스지만…….
“가끔 문수르, 자네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할 때가 있지. 자네의 어깨에 메달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말이야.”
그 말에 문수르는 고개를 숙였다.
질책이다.
그리고 맞는 말이었다.
문수르는 더 이상 홀몸이 아니다. 그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문수르가 죽으면 단순히 개인의 죽음이 아니다. 이제르트 자작가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피해를 입는다.
이기적이라도 좋다. 손해를 보더라도 좋다. 그래도 좋으니 문수르는 제 목숨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탈라트 부족 입장에서 문수르는 거의 유일무이한 동아줄이다. 그런 동아줄이 위험 속으로 몸을 내던지는 꼴을 보는 건…… 결코 마음 편한 일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들으려고 하는 소리는 아니네.”
가누스가 표정을 살짝 풀었다.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될 지도 모르지.”
“예?”
“치료를 위해서 영지로 돌아온 거겠지?”
가누스는 금방 문수르의 사정을 파악했다. 뭐, 뻔하다. 문수르는 이미 한 번 단전이 깨졌던 적이 있다. 오우거와 싸웠을 때 말이다. 그때 문수르는 탈라트 부족의 도움을 받아 상처를 치료했다.
“다행히도 신목의 열매는 맺혀 있다. 신목이 무사한 덕분이지.”
가누스는 그 말을 하면서 옅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문수르에게 신목의 열매를 준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가 죽어가던 신목을 살려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문수르가 신목을 살리지 못했으면, 다시금 단전을 고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문수르의 선의가 대가를 받은 셈이다. 이 상황이 가누스에게는 조금은 웃기게 느껴졌다.
물론 짧은 웃음이었다.
“신목의 열매는 금방 준비하겠네. 하지만 신목의 열매를 쓰기 전에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오러 마스터가 되는 것도 좋겠군.”
“그게 무슨…….”
제대로 된 오러 마스터?
물론 문수르는 자신이 반쪽 짜리 오러 마스터임을 알고 있다. 애초에 바나푸스 열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설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 이후에도 제대로 된 수련을 하지 못했다. 그것 때문에 가누스에게 얼마나 자주 혼이 났던가?
그런데 지금 제대로 된 오러 마스터를 만들겠다고?
“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오러의 양은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그 외적인 부분은 오러 나이트 수준. 반대로 그 오러가 사라진 지금, 오러 마스터가 되기 위한 기본을 다지기에는 최고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가누스.
그가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선 건 수백 년 전의 일이다.
그렇기에 가누스는 문수르에게 부족한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일어날 수 있으면, 곧바로 훈련장으로 나오도록.”
6.
가누스는 말했다.
“몸을 더 혹사시킬 생각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문수르는 가누스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몸을 한계까지 몰아 넣는 수련 방법은 문수르도 자주 이용했던 방법이다. 특히 병사들 그리고 기사들에게 그 수법을 자주 썼다.
지금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아이언히트를 조종하는 파일럿들을 선별하고 육성할 때도 그 방법을 썼다.
그때 병사들과 기사들은 정말 죽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죽었다 살아난 수준이었다.
아마 속으로 문수르를 겁나게 욕했을 것이다. 상관만 아니면 저 인간을 콱……! 이런 생각도 했겠지. 아니, 가만 생각하면 그 토굴 속에서 수련을 할 때에는 진짜 문수르를 향해 달려들기도 했다.
‘내 업보군.’
그런데 이제 문수르가 그 처지를 경험하게 됐다. 문수르는 일단 로이드에게 말했다.
‘들었지? 문제 있어도 나서지 마.’
- 알겠습니다.
노크 클락에는 몇 가지 장치가 있다. 정말 긴급한 상황에 빠진 문수르를 깨울 수 있는 충격 기능 따위들 말이다. 문수르는 그 기능을 쓰지 말라고 로이드에게 말한 것이다.
“준비 됐나?”
가누스가 물었다.
“예.”
문수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순간!
퍽!
가누스의 주먹이 단숨에 문수르의 복부를 가격했다.
“컥!”
엄청난 통증에 문수르의 허리는 새우마냥 굽어졌고, 입에서는 피가 섞인 침이 튀어나왔다.
가뜩이나 단전이 깨진 탓에 잠을 자다가도 아랫배의 통증을 느끼고 일어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데 지금 가누스가 강하게 주먹으로 문수르의 복부를 가격한 것이다.
전력을 다한 건 아니다.
가누스가 정말 전력을 다했다면 오러를 쓰지 못하고, 또한 약해진 문수르의 육신은 파괴됐을 테니까.
가누스가 한 건 단전에 남아있는 오러 찌거기들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문수르는 바닥에 쓰러졌다.
가누스는 그런 문수르의 오른쪽 어깨를 잡았다. 무엇을 하려는 걸까? 폼을 보면 관절기라도 걸려는 모양이다.
“제법 아플 걸세.”
관절기를 거는 건 아니다. 단지 단전이 깨진 이후 무너진 골격을 다시 맞추려고 할 뿐!
물론 관절기 이상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문수르는 그 고통을 몰랐기에 그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빠득!
“으악!”
그렇게 시작됐다.
문수르의 고통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