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64화. 공백.>
1.
가누스는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도 기세 좋게 솟아오른 나무들의 가지들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그것은 지붕이 되어, 옅은 녹음의 빛만을 대지에 내릴 수 있게 해주었다.
더불어 빛이 쉽게 스며들 수 없는 대지는 언제나 차갑고, 축축한 느낌을 유지했다.
이곳이 바로 테블스 산의 숲이다.
보기에는 좋다.
정말 청명하다. 엘프들 입장에서는 이런 숲이 번듯하게 있는 걸 보면 황홀경에 젖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그 어떤 엘프들도 테블스 산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심지어 테블스 산에 사는 거의 유일한 엘프 부족, 탈라트 부족마저도 언제든지 테블스 산을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리고 기회가 왔다.
이제르트 자작가 그리고 문수르. 그들의 등장은 탈라트 부족에게 광명의 빛과 같았다.
그들 덕분에 탈라트 부족은 무시무시한 테블스 산을 벗어나 안전한 땅에서, 미래를 설계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됐다.
그 이후 솔직히 탈라트 부족의 엘프들은 절대 테블스 산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고향?
어림도 없는 소리다.
가누스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는 강자다. 오러 마스터다. 그러나 테블스 산에는 발 자국 하나 남기기 싫어한다.
그도 그럴 것이 탈라트 부족을 테블스 산으로부터 지키는 건 가누스의 몫이었다.
가누스는 치열하게 싸웠다. 처절하게 싸웠다.
그러나 그렇게 싸워도 언제나 탈라트 부족의 엘프들은 죽어갔다. 특히 어린 엘프들이 반쯤 처먹힌 시체로 발견되거나, 그런 시체조차 구하지 못할 때면 가슴이 무너졌다. 억장이 무너졌다.
그런 테블스 산에 발을 내딛는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이제르트 자작령에 거주하게 되면서 가누스는 테블스 산을 향해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런 가누스가 테블스 산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상황이었다.
심지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료도, 부하도 없다. 아이언히트는 당연히 없다.
위험하다.
제 아무리 오러 마스터인 가누스라고 하더라도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은 강력하며, 무엇보다 숫자가 많다. 한 번 피를 흘리면, 그 피 냄새를 맡고 모든 몬스터들이 움직인다.
“족장님 말이 맞았군.”
그러나 가누스는 오히려 표정이 펴져 있었다. 근심걱정 따위는 없어 보이는 표정이다.
“족장님 말대로…… 기회가 왔어.”
2.
문수르는 마차에서 내렸다.
“윽!”
온몸이 울렸다. 그 울림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차오르는 고통에 문수르는 이를 물었다.
여전히 몸은 좋지 못하다. 상태가 굉장히 좋지 못하다. 그런 상황에서의 강행군은 문수르의 몸을 더 갉아먹었다.
하지만 덕분이다.
“도착했군.”
너무나도 빠르게 이제르트 자작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수르는 마부를 보았다.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외모…… 그런 것치고 세월의 흔적이 깊게 보이는 노인이다.
노인의 행색도 좋지 못했다. 처음 봤을 때는 깔끔한 외모의 노신사였다. 입은 옷이 비싸고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고급스런 느낌이 나는 이였다.
왕의 마차를 끄는 마부다.
왕을 보필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세계에서는 계급과 신분 이상의 힘을 가지게 해준다.
무엇보다 프라이드가 있는 자다.
하지만 그런 마부도 강행군에서는 지칠 수밖에 없다. 마부가 참 많은 고생을 했다.
더군다나 여덟 마리나 되는 말을 다뤄야 했다. 속도부터가 보통이 아니다. 어설픈 실력으로는 감히 마부석에 앉을 수조차 없다. 관리는 더 힘들다. 말도 생물이다. 컨디션이 제각각이다. 그런 말 여덟 마리를 한 마음으로 모은다는 것……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진이 빠질 수밖에 없다.
마부도 지칠 만큼 지쳤다.
문수르는 그런 마부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했습니다.”
“아, 아닙니다.”
마부가 놀라며 손을 저었다.
왕의 마부가 된 이후로 평민이지만 나름 귀족처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귀족은 아니다. 단지 먹고 지내는 것이 보통 평민에 비해 훨씬 나았을 뿐, 신분의 격차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물며 문수르는 아직 정식 작위를 받은 건 아니지만 그 존재감이 이미 보통 귀족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자다.
영웅이라 불릴 만한 자다.
마부 입장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사내다.
그런데 지금 그런 문수르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고개를 숙이다니? 마부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꾸는 건지, 착각을 하는 건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문수르는 그런 마부에게 말했다.
“강행군에 힘드셨을 텐데, 이제르트 자작령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이 말씀하세요.”
“아, 아닙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문수르는 곧바로 영지의 성 안으로 들어갔다.
3.
문수르가 왔다.
이제르트 자작령이 바빠지는 건 당연했다. 오랜 만에 문수르의 방문이었을 뿐더러,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문수르가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난 수준이었으니까.
모든 이들이 나왔다.
하지만 문수르는 그들에게 간략한 명령만 전달했다.
그리고 곧바로 폐욤 족장을 만나러 이동했다.
폐욤 족장과의 만남은 금방 이루어졌다. 마치 폐욤 족장은 문수르가 오는 걸 예상했다는 듯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문수르가 인사를 건넸다. 폐욤 족장은 미소를 지으며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런 말을 쓰면 어색하겠지만…… 수고했네.”
순간 문수르는 무언가 조짐을 느꼈다.
폐욤 족장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 문수르는 바나푸스 나무의 열매를 묻기보다 폐욤 족장이 알고 있는 무언가를 더 알고 싶었다. 왠지 그걸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제가 없는 동안 무슨 소득이 있으셨나봅니다.”
“물론이네. 큰 소득이 있었지.”
“큰 소득이라 하면…….”
“가누스로 하여금 테블스 산을 조사토록했네.”
“예?”
가누스가 테블스 산을 조사했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지금 이제르트 자작령의 병력 대부분은 왕도에 가 있는 상황이다. 만약 가누스의 신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구할 도리가 없다.
더군다나 문수르의 상태도 지금 굉장히 좋지 못하다.
“걱정말게. 그걸 알기 위해 보낸 거니까.”
“그걸 알기 위해…… 무슨 의미입니까?”
“자네가 영지를 떠나기 전 갑작스레 가누스가 부탁을 했을 걸세.”
그 순간 문수르가 가누스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빅토리안 공작의 병력이 이동하는 것을 포착하고 이제르트 자작령을 떠나고자 마음 먹었을 때였다. 이미 이제르트 자작이 병력을 이끌고 왕도로 향하려고 할 무렵이기도 했다.
그때 가누스와 대화를 했다.
가누스는 그 파병에서 제외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문수르는 그 부탁을 들어줬다.
그때 이후로는 모르겠다. 가누스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고 솔직히 신경 쓸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가누스가 테블스 산을 조사한 모양이다.
“무슨 일입니까?”
“예전부터 테블스 산에 대해서는 많이 조사를 했다. 탈라트 부족이 테블스 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한 조치였지. 그리고 조사는 꾸준하게 지금까지 진행했네.”
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러던 와중에 최근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했네.”
“특이점이라 하면…….”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의 개체수가 갑작스레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예?”
몬스터 소굴이라는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아!’
그 순간 문수르는 무언가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충분히…… 가능하구나.’
테블스 산.
몬스터들의 소굴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테블스 산에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다. 가장 최근의 일은 다름 아니라 몬스터 군단이다. 몬스터 군단의 몬스터들, 그 무지막지한 숫자의 자이언트 트롤과 오우거, 오크 따위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테블스 산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몬스터 군단의 몬스터들 대부분은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이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몬스터 데스나이트, 놈들의 재료가 된 몬스터들도 전부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이다.
마지막으로 그보다 좀 더 이전에 테블스 산의 먹이사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오크 부족들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던 적이 있다.
또투, 놈이 대규모 오크들을 이끌고 이제르트 자작령을 공격했다가 대실패를 한 적이 있다.
몬스터들에게도 어쩔 수 없는 게 바로 배고픔이다. 테블스 산에는 몬스터들이 넘쳐나고, 그런 몬스터들에게 오크들은 중요한 먹이사슬의 부분이기도 하다.
오크들의 개체 수가 줄면 오크들보다 먹이사슬 위에 있는 몬스터들도 배고픔에 굶주릴 수밖에 없다.
또한 이제르트 자작령의 세력이 커지면 나름 몬스터를 적당하게 토벌해주기도 한다.
쉽게 표현하면 생태계 교란이 시작된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 테블스 산에서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굉장히 줄어든 몬스터 공백 상태가 생겨난 것이다.
‘이거…….’
예상하지 못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걸 일일이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당장 그것보다 왕도 문제가 더 컸고, 제국과의 정치싸움이 더 중요해졌으니까.
하지만…….
‘최고의 상황이다!’
지금 이 상황, 테블스 산에 일어난 몬스터들의 공백 상황은 이제르트 자작령에 두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테블스 산을 개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테블스 산만 개간할 수 있다면, 이제르트 자작령의 영지는 곱절로 늘어나게 된다.’
이제르트 자작가에 부족한 건 두 가지다.
땅 그리고 사람이다.
그런데 막상 사람은 그렇게까지 부족하진 않다. 노동력은 기술로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땅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테블스 산을 개간한다면 이제르트 자작령의 영지는 엄청나게 넓어진다.
또한 테블스 산의 땅은 굉장히 기름진 땅이다. 그런 그곳에 개량된 품종들을 뿌린다면 어떻게 될까?
관리도 필요없을지 모른다. 그냥 씨만 뿌려도 알아서 자라날 것이다. 때가 되면 수확만 거두면 된다.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영지의 가치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이제르트 자작령이 저평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결국 테블스 산 때문이다.
영지민들도 그렇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강해져도 영지민들은 계속해서 근심걱정에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한다.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이 언제 뛰쳐나올 지 모르기 때문이다.
테블스 산은 수백 년 동안 그렇게 세상에 공포를 주었다. 그 공포가 고작 몇 년 만에 바뀔 리 만무하다.
그런데 이번에 테블스 산을 개간하면 그 공포가 사라진다. 영지민들의 스트레스가 살아진다.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또한 그 공포 때문에 이제르트 자작령으로의 이주를 고민했던 이들도 생각이 달라진다. 인구 과잉을 걱정할 정도로 많은 영지민이 이주를 해올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제르트 자작령 만큼 합리적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영지는 극히 드무니까.
이런 것들, 테블스 산을 개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들은 이제르트 자작가에게 기반을 마련해줄 것이다.
반석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을!
‘놓치면 안 된다.’
문수르는 단전의 고통마저 잊었다.
지금 단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정확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일세. 그걸 위해서 이 자리를 마련한 거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