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7.
카라카크는 하늘 위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건 콩탄 왕국의 왕도 그리고 그 왕도를 향해 달려가는 몬스터 군단이었다.
“흠.”
그 순간 카라카크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한때는 쭈글쭈글, 당장 말라비틀어질 것 같았던 손은 어느 순간 예전의 젊음을 되찾았다. 아니, 예전 이상의 젊음을 되찾았다. 탱탱한 피부, 뽀얀 피부, 정말 백옥을 갈아 만들어도 이런 피부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세월의 흔적이 없다.
카라카크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젊은이의 손짓 한 번이면 콩탄 왕국의 왕도를 무너뜨리는 건 정말 일도 아니다.
몬스터 군단의 전력은 왕도에 몰린 왕군의 전력에 비하면 약하다.
더군다나 왕도까지 오기 위해 적지 않은 오크들이 오우거와 자이언트 트롤의 식량이 되어버렸다. 반대로 오크들은 제대로 먹지 못했다. 결국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있는 건 오우거와 자이언트 트롤 정도인데, 제 아무리 성벽 곳곳이 무너졌다고 해도 왕도의 성벽을 높고 굳건하며, 해자는 넓고 깊다.
하지만!
불끈!
지금 카라카크가 움켜쥔 주먹, 그 손짓 한 번이면 전세는 단숨에 뒤바꿀 수 있다.
심지어 지금 왕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대기 중인 슈페언 백작이 도와준다고 해도!
카라카크가 마음만 먹으면 싹 쓸어버릴 수 있다. 도륙을 낼 수 있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있다.
“하하!”
그러나 지금 그 힘을 쓸 생각은 없었다.
몬스터 군단은…… 미끼다.
“그래, 몬스터 군단은 왕도에서 죽어야 한다. 그리고 필로스 왕, 네놈은…… 자립을 꿈꾸어야지.”
빅토리안 공작과 손을 잡는 순간부터 떠올렸던 계획.
오랜 세월 준비했던 그 계획이 이제 정말 시작되려고 있었다.
8.
공세가 시작됐다.
불스 백작은 최전선에서 몬스터 군단의 상태를 살폈다. 그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백작님 위험합니다.”
“뒤로 피하시는 게 좋으실 듯합니다. 후방에서 명령은 충분히 내리실 수 있으실 텐데…….”
기사들이 충고를 했다.
불스 백작은 그런 기사들의 충고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오크 놈들이 비실거리는군.”
불스 백작은 무시무시한 몬스터 군단 앞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정도였다. 기사들도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불스 백작은 진심이었다.
허세가 아니다.
정말 딱 봐도 오크 놈들은 비실거렸다. 다른 이들이 몬스터 군단의 모습에 기가 죽어 그런 걸 보지 못하겠지만, 냉정하게 보면 오크들은 정말 싸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부분을 찾는 게 지도자의 역할이다.
병사들이 겁을 먹는 건 당연하다. 겁을 먹고 제대로 상황을 보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만약 그러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고,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면 병사로 남을 리가 없다. 그보다 더 높은 자리, 군사 혹은 기사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말하면 그런 병사들에게 그 사실을 인지시켜주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다.
불스 백작은 그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오크들은 신경 쓰지 말라고 병사들에게 전해라. 또한 오크들이 어떤 상태인지도 명확히 설명하고.”
“예.”
“오크들을 상대할 걱정이 없다면, 오히려 편해지지. 기가스 전력을 앞세우는 게 피해도 적을 터.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작전을 짜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불스 백작이 상황을 보고 실시간으로 전략 상황을 수정했다.
그런 불스 백작의 수정된 작전이 떨어진 직후 몬스터 군단이 왕도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9.
콰앙!
거친 굉음이 왕도 성벽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몬스터 군단은 왕도를 포위한 후에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을 동시에 공격했다. 최전선에 뛰어든 건 다름 아니라 오크들이었다. 오크들은 조잡한 도구들, 사다리 따위들을 들고 돌진했다.
물론 대부분이 해자에 빠졌다. 깊이가 깊은 해자에 떨어진 오크들은 절명하거나 혹은 병신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오크들은 계속 몸을 날렸다. 개중 극소수의 놈들은 성벽에 닿았고, 성벽을 올랐다.
처음에는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후 자이언트 트롤 따위들이 성벽으로 돌진하다 쏟아지는 화살을 맞고 해자 근처에서 쓸어졌을 때.
“어?‘
“저거 뭐야?”
그제야 병사들은 눈치 챌 수 있었다.
오크들의 시체 그 위에 다시 자이언트 트롤의 시체가 엉키자, 놀라울 정도로 굳건한 다리가 만들어졌다.
그 다리가 완성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오우거들이 흉포한 안광을 토해내며 움직였다.
먹지 못해 힘이 빠진 오크들에 비해 오우거들은 배가 가득 찬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배고플 때마다 오크를 주식으로 먹었다. 오히려 야생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배가 부른 상황이었다.
그런 오우거 수십여 마리가 동시에 성벽을 향해 달려왔다. 오크들과 자이언트 트롤의 시체를 밟고, 거대한 몽둥이를 성벽을 향해 휘둘렀다. 굳건하지만 빅토리안 공작과의 전쟁으로 인해 곳곳이 붕괴된 성벽은 오우거의 공격을 쉬이 버티지 못했다.
쾅쾅!
굉음과 함께 성벽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무렵이었다.
대기 중이던 기가스들이 나섰다.
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10.
마차가 길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이랴!”
마부는 힘차게 말에게 채찍질을 했다. 마차를 끄는 말은 무려 여덟 마리나 됐다.
여덟 마리나 되는 말이 끄는 마차를 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가스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에 말의 가치가 예전 만큼은 아니지만, 말은 여전히 비싼 동물이다.
대체 누굴까?
대체 어떤 인물이 여덟 마리나 되는 말이 끄는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일까?
“후우!”
마차에 탄 이는 다름 아니라 문수르였다.
그것도 문수르 혼자였다.
마차 안에는 문수르 누워있었다. 그런 문수르의 눈이 조심스럽게 마차 밖을 향했다.
창창한 하늘이 보였다.
맑은 하늘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뻥! 뚫릴 정도로 말이다.
“미치겠군.”
그러나 그 하늘을 바라본 문수르의 입에서 나온 다름 아니라 한숨이었다.
문수르는 슬그머니 제 배에 손을 가졌다. 손가락을 가져가자마자 복부가…… 단전이 부르르 떨었다.
문수르가 이를 물었다.
고통은 참을만해졌다. 더불어 오러를 쓰지 못하는 상황에 몸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힘들었고, 금방 지쳤다.
마차의 떨림, 충격 따위도 문수르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주는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문수르는 두 눈을 감았다.
‘빨리 영지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문수르가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니라 이제르트 자작령이었다.
필로스 왕과 거래를 했다.
이후 문수르는 필로스 왕에게 말했다. 몸을 치료해야 하니, 이제르트 자작령에 다녀와야 한다고.
필로스 왕은 잠시 고민했다. 문수르는 솔직히 거기서 필로스 왕이 질문을 할 줄 알았다.
왕도에도 훌륭한 힐링 마법사들이 있는데 왜 꼭 치료를 위해서 이제르트 자작령으로 가야 하는가?
그러나 필로스 왕은 묻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는가?”
오히려 문수르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자신이 도와줄 일이 있는지, 그걸 물어봤다.
필로스 왕의 그런 모습에 문수르는 새삼 놀랐다. 필로스 왕은 사람을 다룰 줄 안다. 자신의 사람들에게 막연한 질문보다는 그 사람에게서 진정한 충성심을, 호감을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의심보다는 걱정을, 적의보다는 호의를 보내는 자였다.
문수르는 그런 필로스 왕에게 말했다.
“마차가 필요합니다.”
“준비해두지.”
상황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필로스 왕은 왕가의 문양이 찍힌 마차를 주었다. 무려 여덟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였다.
마부 역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때문에 콩탄 왕국 내에서는 그 어느 영지에서도 이러다할 검문 없이 지나칠 수 있었다.
거침이 없었다는 의미다.
덕분에 문수르는 엄청난 속도로 이제르트 자작령을 향해 이동할 수 있었다.
‘일단 몸의 치료가 먼저다.’
신목 바나푸스 나무의 열매로 몸을 치료하는 게 최우선의 과제다.
‘몬스터 군단은 막을 수 있다.’
일단 문수르가 없어도 왕군이 몬스터 군단을 막는 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몬스터 군단과의 전쟁이 끝난 직후 콩탄 왕국에는 정치적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슈페언 백작 그리고 아히만트 백작.
둘이 움직일 것이다.
필로스 왕은 말했다. 슈페언 백작과의 정치적 접점을 버릴 거라고. 슈페언 백작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반대로 필로스 왕에게는 명분이 있다. 솔직히 나라의 왕이 타국의 귀족과 긴밀하게 지내는 꼴은 모양새부터가 좋지 못하다. 그리고 콩탄 왕국이 페스로 제국이 속국인 것도 아니다. 필로스 왕이 슈페언 백작과 손을 놓아도, 딱히 슈페언 백작 입장에서는 뭐라 할 명분이 없다.
그렇다면 슈페언 백작은 명분을 찾아야 한다.
제국이 타국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 좋은 게 있다.
‘흑마법을 이용할 게 분명해. 백퍼센트야.’
바로 흑마법사!
흑마법 만큼 타국의 정치에 간섭할 수 있는 좋은 소재도 없다. 물론 필로스 왕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건 아니다.
하지만 빅토리안 공작은 분명 콩탄 왕국에서 핵심 귀족이다. 그런 그가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
좋은 명분이다.
슈페언 백작은 필시 그 부분을 물고 늘어질 것이다.
‘흑마법을 소탕하겠다는 명분으로 병력을 이끌고 왕국에 들어와 난리를 칠 게 뻔하다.’
물론 목적이 흑마법사 처치일 리는 만무하다.
흑마법사를 색출한다는 명분하에 마음 내키는 대로 이 영지, 저 영지를 들쑤실 것이다.
그러다 보면 콩탄 왕국을 지칠 수밖에 없다. 귀족들의 불만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냥 불만만 높아지면 다행이다.
문제가 되는 건 파벌이다.
필로스 왕이 계속해서 슈페언 백작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한다면, 슈페언 백작에게 줄을 대려는 귀족들이 모일 테고, 그들이 정치 파벌을 형성할 것이다.
파벌이 형성된 다음은?
뻔하지 않은가?
애초에 정치 파벌이 생기는 이유는 정치적 이유를 위해서다. 그들이 슈페어 백작 때문에 정치 파벌을 만들었다면, 당연히 왕에게 요구할 것이다. 슈페언 백작을 막아달라고.
필로스 왕 입장에서는 결국 또 다시 슈페언 백작과 손을 잡아야 하는 상황…….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때 가서 손을 잡으려고 한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보장해줘야 할 것이다.
오히려 상황이 더 안 좋아지는 거다.
여기에 아히만트 백작의 존재도 부담감이다. 그가 콩탄 왕국에 관심을 가진 이상 또 다시 어떤 식으로든 개입을 할 것이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결국 근본적인 것이 필요하다.
바로 힘!
절대적인 힘, 병력이 필요하다.
혹여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필요한 건 그 무엇도 아닌 힘이다.
더불어 필로스 왕은 어떻게든 아히만트 백작과 슈페언 백작의 사이를 이간질해, 이 상황을 페스로 제국과 콩탄 왕국 간의 충돌이 아니라, 페스로 제국의 두 귀족 실세들의 권력 싸움으로 만들고자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제국이 전면적으로 개입하고자 한다면 콩탄 왕국에게는 승산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여기서 무력 부분을 책임지는 게 이제르트 자작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력의 절반은 문수르나 마찬가지다.
문수르가 어떻게든 빠른 시일 내에 몸을 정상으로 되돌려야 하는 이유다.
‘후우, 제발 바나푸스 나무의 열매가 제대로 열렸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