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5.
왕도를 향해 접근하는 몬스터 군단의 무리가 왕도에서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몬스터 군단의 공격이 가까워졌을 무렵.
제이머스 후작은 필로스 왕을 찾아갔다.
“전하, 어찌하여 슈페언 백작의 제안을 거절하신 겁니까?”
최근 비밀회담에서 제이머스 후작과 필로스 왕은 거래를 했다.
필로스 왕은 제이머스 후작에게 빅토리안 공작을 대신에 왕국에 하나 뿐인 공작의 위(位)를 하사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정치적,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며, 빅토리안 공작령의 일부를 주겠다고 했다.
큰 선물이었다.
목숨을 걸고 왕도로 달려온 보람이 있는 제안이었다. 제이머스 후작은 그런 필로스 왕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제안에 따른 대가는 충성이었다.
필로스 왕은 제이머스 후작의 완벽한 충성을 요구했다. 또한 앞으로 정치적 파벌을 만들어 자신을 견제하지 말고, 자신의 우직한 충신이 되라고 말했다.
제이머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이머스 후작은 혹여 필로스 왕이 자신과 정치 싸움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할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제이머스 후작에게 정치적 능력은 굉장히 부족했으니까. 정치 고단수인 필로스 왕과 정치 싸움을 하게 되면 제이머스 후작이 불리하다. 결국 제이머스 후작은 휘하의 귀족들에게 정치를 위임해야겠는데 이렇게 되면 주객전도, 나중에 오히려 제이머스 후작의 입지가 줄어들 수도 있다.
즉, 제이머스 후작은 애초에 필로스 왕과 정치적 대립각을 세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더군다나 제이머스 후작은 콩탄 왕국이 낳은 최고의 기사다.
기사의 본분을 너무나도 잘 아는 사내다.
그런 그가 왕을 배신하고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나름 충분히 좋은 분위기로 합의가 끝났다. 필로스 왕은 곧바로 제이머스 후작에게 큰 힘을 실어줬다.
그런데 그런 필로스 왕이 갑자기 슈페언 백작과 반목한 것이다.
슈페언 백작의 병력이 지척까지 왔다. 도움을 요청하면 슈페언 백작의 병력이, 특히 그 3배 급 기가스인 골든 자이언트가 몬스터 군단을 가차없이 쓸어줄 것이다.
“제이머스 후작, 지금 병력으로 확인된 몬스터 군단을 처치하는 게 불가능한가?”
“그건…… 그건 아닙니다.”
제이머스 후작은 확신한다.
지금 왕도에 있는 전력만으로도 몬스터 군단은 처치할 수 있다.
하지만 피해가 적진 않을 터!
슈페언 백작의 병력이 도와준다면 더 쉽게, 더 적은 피해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슈페언 백작은 남이 아니다.
“그래도 피해는 최소화하는 게 전술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하물며 슈페언 백작이 페스로 제국의 사람이지만, 전하와 긴밀한 관계의 귀족이지 않습니까? 굳이 그런 슈페언 백작의 도움을 거절하시는 이유를……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이머스 후작.”
필로스 왕이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일세…… 평생을 페스로 제국의 품 안에서 지낼 생각이 조금도 없다네.”
“예?”
“말 그대로일세. 내가 페스로 제국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른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내 왕국을 페스로 제국에게 평생 동안 헌신시킬 생각은 조금도 없다네.”
제이머스 후작은 직감했다.
“제국과 대립각을 세우시려는 겁니까?”
필로스 왕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페스로 제국!
최근에야 잠잠하지만, 역사를 놓고 봤을 때 페스로 제국만큼 호전적인 국가도 찾기 힘들 정도다.
무차별적인 팽창주의, 전쟁을 즐겼던 국가다.
그런 페스로 제국의 품을 벗어난다는 건 단순히 간섭을 받지 않는다, 라는 문제가 아니다.
페스로 제국과 적이 된다는 것이다.
페스로 제국에게 중립 따위는 없다.
적 아니면 아군이다.
슈페언 백작과 잡은 손을 놓으면 슈페언 백작은 곧바로 적이 되어 콩탄 왕국을 노릴 것이다.
이건 위험하다.
지금 페스로 제국은 오래 동안 전쟁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축적된 힘이 넘치는 상황이다.
반대로 콩탄 왕국은?
페스로 제국의 비호 아래에서 호사를 누리긴 했다. 그러나 그 호사 때문에 지금 콩탄 왕국은 굉장히 약해져 있는 상황이다.
전쟁을 위한 기반이 없다.
몇몇 영주들만이 그나마 전쟁에 대비해 계속해서 군비를 확충했을 뿐, 나머지 귀족들은 그저 호사를 누리기만 했다.
정신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지금 콩탄 왕국은 굉장히 나약해진 상황이다.
그런데 제국과 전쟁을 한다?
페스로 제국이 작정하고 몰아 붙인다면 콩탄 왕국은 1년 후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나도 준비한 게 있네.”
“예?”
“아무런 밑바닥도 없이 제국과 상대할 정도로 난 바보가 아니네.”
“그게 대체…….”
필로스 왕이 준비를 했다?
‘혹시?’
순간 제이머스 후작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이 떠올렸다.
‘이제르트 자작?’
이제르트 자작의 갑작스런 성장세. 엄청난 전력. 여기에 문수르가 쥴리언에게 한 말까지.
톱니바퀴가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다.
어떠한 확신이 들었다.
‘그렇구나.’
제이머스 후작은 이제르트 자작이 바로 필로스 왕이 숨겨둔 비장의 한 수라고 생각했다.
생각 정도가 아니라 확신했다.
‘그래!’
처음 보는 타입의 기가스와 위엄이 넘치느 드래곤 파이터!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력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면, 제국과 전면전은 힘들더라도 제국과 국경을 맞댄 채 신경전은 벌일 수 있다.
물론 반대로 생각하면 제 아무리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페스로 제국이 전면전을 각오하면 콩탄 왕국에게 답은 없다.
핵심은 그거다.
“제이머스 후작 생각이 맞네. 이제르트 자작가는 내가 숨겨둔 한 수지.”
“전하,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력이 추가된다고 해서 제국을 상대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전면전은 안 된다.
그러면 전면전을 일으키지 않도록 수를 쓰면 된다.
“아히만트 백작을 알고 있나?”
“아히만트 백작은…… 제국의 실세 중 한 명 아닙니까?”
“빅토리안 공작의 배후에 아히만트 백작이 있네.”
필로스 왕이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 진실을 들은 제이머스 후작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히만트 백작이 빅토리안 공작의 배후에 있다?
“슈페언 백작이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나야 모르지.”
“그렇다면…….”
아히만트 백작 그리고 슈페언 백작.
같은 페스로 제국의 귀족이며, 황제로부터 3배 급 기가스를 받은 실세 중의 실세들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는 좋지 못하다.
아니, 제국의 귀족들 중에 실세로 불리는 자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력이란 건 만족이 없다.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자는 더 큰 권력을 맛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명예를 건다.
제국이라고 다를 게 있을 리 없다.
아니, 오히려 제국은 이제까지 그런 종류의 명예욕, 권력욕을 전쟁이란 방법을 통해서 분출시켰다. 넘치는 힘을 정치적 상쟁으로 충돌시키기보다는 전쟁을 통해서 소비시켰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제국 내부적으로 정치적 암투가 심하다는 건 제국 외의 타국 사람들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슈페언 백작은 이미 정치 권력에 욕심이 많은 자다. 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필로스 왕을 도와준 게 아니다. 정치 권력에 대한 욕심을 위해, 보다 확실한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거다.
반면 아히만트 백작은 조용한 편이다. 권력을 쥐고 있지만 휘두르기보다는 조용히 몸을 낮추고 있는 경우다.
그런데 그 조용한 아히만트 백작이 빅토리안 공작의 편에 섰다?
슈페언 백작에게 시비를 건 거다. 그냥 시비를 건 것도 아니고, 선방을 날린 거나 마찬가지다.
이걸 이용해야 한다.
“슈페언 백작과 아히만트 백작 사이를 더 크게 갈라 놓아야 하네. 그렇게 하면 제국은 절대 우리 왕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지 못하네.”
필로스 왕의 노림수는 바로 그 부분부터 시작된다.
6.
슈페언 백작은 이를 갈았다.
“감히!”
전령이 가지고 온 소식에 슈페언 백작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나를 엿 먹이다니! 내가 그동안 필로스 왕, 그에게 해준 것이 얼마나 많은데!”
필로스 왕이 왕위에 오른 건 순전히 슈페언 백작의 지원과 도움 덕분이다.
그런데 지금 그 필로스 왕이 슈페언 백작을 내친 셈이다. 슈페언 백작의 손길을 거부한 것이다.
납득할 수 없다.
용인할 수도 없다.
“흥!”
그러나 슈페언 백작은 분노에 이성을 잃어, 입에 거품을 문다거나, 격렬하게 분노해서 사리분별을 못한다거나 그러진 않았다.
슈페언 백작은 뛰어난 기사이자, 기가스 파일럿임과 동시에 훌륭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드디어 필로스 왕이 내 손을 벗어나려고 하는군.”
필로스 왕이 언젠가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는 것쯤은 진즉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대체 뭘 믿고?”
단지 의문이다.
아무런 것도 없이 다짜고짜 슈페언 백작과 잡은 손을 놓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물론 미친척하고 그럴 순 있다. 사람 일이란 건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까.
그러나 지금 필로스 왕은 미치지 않았다. 또한 필로스 왕은 멍청한 왕이 아니다. 그는 정치를 할 줄 알고, 자신의 행동이, 결정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결과를 내놓을 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왕이다.
확실한 무언가가 있으니까 슈페언 백작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슈페언 백작이 찾아야 하는 건 바로 그것이다.
대체 무엇이 필로스 왕으로 하여금 그런 자신감을 가지게 만들었는가?
“왕도 내에 특이사항은?”
“필로스 왕과 제이머스 후작이 손을 잡은 듯합니다.”
“그렇겠지. 제이머스 후작은 정치하고는 거리가 먼 인간이니, 필로스 왕이 손을 내밀면 넙쭉 잡았을 테니까.”
전령은 자신이 왕도에서 보고 듣고 또한 그것들을 기반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슈페언 백작 앞에 전부 털어 놓았다.
전령은 단순히 말만 전달하는 자가 아니다.
전령은 너무나도 무사히, 아무런 문제 없이 상대 진영을 보고 올 수 있는 자다.
전령 만큼 탐색에 능한 자도 없다.
그런 전령의 자리에 슈페언 백작이 그저 발만 빠른 기사를 앉혔을 리 만무하다.
충분히 정치적 능력과 판단 능력, 탐색 능력 등 종합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에게만 전령의 자리를 주었다.
그리고 전령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슈페언 백작은 들었다. 전령이 하는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수용했다.
“왕도에 제법 병력은 많은 모양이군.”
“일단 당장 몬스터 군단과 싸워 지지 않으리란 자신도 그 병력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흥.”
슈페언 백작은 콧방귀를 뀌었다. 살짝 아쉽긴 하다. 만약 왕도의 병력이 몬스터 군단을 상대하지 못할 정도였다면 필로스 왕은 아무런 고민 없이 슈페언 백작의 손을 잡았을 터.
그럼 혹시 필로스 왕이 그 병력을 믿고 슈페언 백작과의 반목을 각오한 것일까?
‘아니야. 그게 아니야.’
아니다.
분명 다른 무언가가 더 있다.
“그보다……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음?”
“그러니까…… 빅토리안 공작을 따랐던 귀족 중 한 명이 몰래 정보를 주었습니다.”
빅토리안 공작 파벌 소속의 귀족이 정보를 줬다?
슈페언 백작의 눈빛이 달라졌다.
지금 빅토리안 공작 파벌의 귀족들은 죽을 맛이다. 갑작스레 정치 판도가 바뀌는 바람에 그들의 입지는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었고, 당장 앞날을 가늠할 수도 없는 처지다.
그런 그들 입장에서는 슈페언 백작과의 접점을 만드는 게 정치적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아직 콩탄 왕국에서 제국의 입김은 무시 못하니까.
아니, 슈페언 백작의 지지를 받으면 단숨에 새로운 정치 파벌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위기 끝에 기회가 온다고, 정쟁은 없을 수가 없다. 정치란 그런거다. 제 아무리 필로스 왕이 제이머스 후작을 포섭한다고 해도, 그에 맞서는 정치적 파벌은 분명 생길 것이다.
단지 그 파벌이 힘이 있느냐, 없느냐, 그 차이만 있을 뿐.
어쨌거나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슈페언 백작의 전령에 접촉하고자 하는 귀족이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불어 그 귀족이 주는 정보는 굉장히 중요한 정보일 가능성이 크다. 그 귀족 입장에서도 어떻게든 슈페언 백작의 호감을 사고 싶을 테니까.
“말해보아라.”
“다름이 아니라…… 빅토리안 공작의 배후에 아히만트 백작이 있다고 했습니다.”
“큭…….”
그 순간 슈페언 백작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어렴풋했던 무언가가 확 터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