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209화 (207/293)

209화

4.

차내음이 났다.

문수르는 냄새를 맡자마자 그것이 굉장히 고급스러운 차일 거라고 생각했다. 코끝을 타고 들어와 머릿속을 환하게 만드는 것이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 냄새를 따라갔다.

계단을 타고 내려간 지하실 공간은 넓었다. 그리고 화려했다. 단순한 벽돌로 음침하게 꾸며진 지하실이 아니었다. 바닥부터 벽면 천장까지 모든 게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가는 길목에는 누가 보더라도 장인의 솜씨로 만들어진 게 분명한 융단이 깔려 있었다. 가는 길목 또는 구석에는 그림 또는 장식품들이 놓여 있었다.

정말 화려하다.

예술에 대해 눈이 짧은 문수르도 이것들이 정말 억소리가 나올 정도로 대단한 명작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문수르도 알 수밖에 없다.

‘필로스 왕이 여기서 머물렀구나.’

이정도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자는 케르빈 월드를 통틀면 의외로 많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콩탄 왕국의 왕도에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명뿐이다.

필로스 왕!

이제까지 침묵을 고수한 채 두문불출하던 그는 자신의 성이 아니라 이 저택 지하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하긴, 암습 등에 대비해서 왕도 곳곳에 대피소를 만드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왕도는 왕을 위해 존재하는 도시다. 위험한 상황에서 왕을 지키기 위한 온갖 것들이 마련되어 있다. 지하에는 미로 같은 것이 존재할 것이며, 한 번 들어가면 수 년을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버틸 수 있는 대피소도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저택 쯤은 애교다.

아주 우스운 수준의 애교.

“문수르 경인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고급스럽기 그지없는 차내음이 짙게 묻어 있었다.

차를 굉장히 많이 마신 모양이다. 물마시듯, 차만 마신 모양이다.

“필로스 전하이십니까?”

“얼굴을 대면하는 건 처음이로군. 들어오도록.”

필로스 왕이 대면을 허락해줬다. 문수르는 걸음을 옮겼다. 로이드에게도 말했다.

‘로이드, 밖에서 조짐이 보이면 바로 알려줘.’

- 알겠습니다.

로이드에게 경고를 두고 문수르가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차내음이 난 곳으로 향했다.

한 사내가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사내. 그러나 50대 치고는 머리가 굉장히 희었다. 흰머리가 많았다. 그 때문일까? 왠지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그리고 굉장히 피곤해 보였다.

적어도 문수르가 상상한 필로스 왕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문수르가 생각하는 필로스 왕은 강인한 인상을 가진 자였다. 형을 끌어내리고, 제국의 힘을 빌어 왕위를 찬탈한 자다. 삶 자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역시 사람은 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군.’

문수르는 일단 필로스 왕의 얼굴을 보고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필로스 전하의 옥체를 보게 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왕 앞이다.

예의, 그것도 극도의 예를 극례를 취해도 모자르는 자리다. 문수르는 그 예의를 갖추었다필로스 왕은 그런 문수르를 내려다 봤다. 필로스 왕의 눈이 문수르를 스캔 하듯 훑었다.

“기절한 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들었는데 이렇게 보니 제법 멀쩡한 것 같군.”

필로스 왕은 살짝 놀랐다.

기절했다고 알려진 문수르가 편지를 받자마자 이렇게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심지어 여기까지 오면서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했다. 문수르가 저택의 문을 열었을 때 필로스 왕은 혹여 자신을 죽이기 위한 암살자가 온 게 아니가 조금 걱정도 했다.

그러나 이 장소를 아는 이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그 장소를 아는 이들 중 이곳에 오는 것을 허락해준 인물은 단 한 명, 바로 문수르 뿐이었기에 저택의 방문자가 문수르라는 사실을 거의 확신하고 있긴 했다.

어쨌거나 문수르를 바라보는 필로스 왕의 눈빛은 그다지 살갑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수르 때문에 필로스 왕은 자신의 명예에 오점이라 할 수 있는 이제르트 자작가와 손을 잡게 됐다. 본래 대로라면 찍어 눌렀어야 할 이제르트 자작가를 곁에 두어야만 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살갑지 않다 뿐이지, 문수르를 증오한다거나, 혐오하는 듯한 시선 역시 한 점도 없었다.

왕은 왕이다.

왕이 가져야 할 무수히 많은 덕목 중 하나가 바로 사람을 보는 눈이고, 사람을 쓰는 법이다.

제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자도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보고, 적재적소에 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왕국이란 거대한 세계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왕국이 돌아가지 못하면 그 끝은 왕의 파멸이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왕위를 위해서라도 왕은 사적인 감정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경우에도…… 솔직히 말해서 당대의 이제르트 자작은 유능하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힘이 없었다. 굳이 왕이 이제르트 자작을 등용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물론 이제까지의 이야기다.

이번 일, 특히 빅토리안 공작의 갑작스런 반역 이후 가장 먼저 왕도를 구하기 위해, 필로스 왕을 지키기 위해 온 이가 바로 이제르트 자작이었다.

인정해줘야 한다.

이제르트 자작의 충성심 그리고 지금 이제르트 자작이 가진 전력, 이룬 업적 등을 생각했을 때 필로스 왕에게 이제르트 자작은 더 이상 눈엣가시가 아니라 중요한 창과 방패다.

그래서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

“만나기 전에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무엇이든 물어보시옵소서.”

“그래, 물어보는 건 어렵지 않겠지. 하지만 제 아무리 질문을 해도 정작 진실을 듣긴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말과 함께, 꿀꺽! 차를 마시는 필로스 왕의 모습에서 문수르는 속으로 뜨끔했다.

‘역시 감이 좋아.’

필로스 왕은 이제르트 자작가와 문수르에게 궁금한 것이 무척이나 많을 것이다.

아니, 비단 필로스 왕뿐만이 아니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변화 그리고 등장한 수십여 대의 아이언히트를 본다면 모두가 궁금증을 품을 수밖에 없다.

모두가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러나 문수르가 준비한 대답은 진실이 아니라 그럴싸한 거짓말들이다.

진실을 말해줄 수 없다. 문수르가 가진 진실이란 그가 바로 다른 차원에서 온 사람이란 것이며, 이제르트 자작가가 이룩한 모든 업적은 이 세계의 능력, 기술, 지식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을 어찌 그대로 말해줄 수 있단 말인가?

필로스 왕은 그러한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던 것이다.

자신이 질문을 던져도, 문수르가 해줄 대답은 굉장히 그럴싸한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찌 전하 앞에서 거짓을 고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문수르는 여기서 철면피를 두른 듯 연기를 해야 한다. 필로스 왕이 그렇게 말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사정상 전하께 거짓말만 하게 됐습니다.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고 하지.”

필로스 왕은 문수르의 그런 입에 발린 소리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들도록.”

“감사합니다.”

필로스 왕의 말에 문수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자리에 앉게.”

왕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조출한 식탁과 의자. 문수르는 그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일단 수고했네. 가장 먼저 이 말부터 해야겠지.”

필로스 왕은 가장 먼저 칭찬부터 했다.

할 만하다.

문수르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빅토리안 공작의 반역을 이리 적은 피해로 막을 순 없었을 터.

문수르의 공, 더 나아가 이제르트 자작가의 공은 정말 어떤 상을 줘도 치하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아마 이번 일이 끝나면 최소 백작 위는 보장될 것이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 귀족이라면 마땅히 왕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법이지. 하지만 빅토리안 공작은 그러지 못했어.”

“그야…….”

“재미난 일이지. 왕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자가 귀족에게 가장 중요한 도리를 벗어던지다니 말이야. 하지만 반대로 역사를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반역은 풍요로운 자들로부터 시작됐지. 자작이나 남작의 작위를 가진 귀족이 반역죄로 처형을 당한 적은 있어도 성공한 적은 없지 않은가?”

“전하의 혜안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문수르는 무조건 자세를 낮추고 감탄을 뱉었다. 필로스 왕은 그런 문수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법 많이 준비했군.”

“전하 앞에서 갖춰야할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할 따름이옵니다.”

필로스 왕은 마치 분위기를 풀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수르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작은 꼬투리라도 잡히면 좋을 거 하나 없다.

필로스 왕도 그걸 알기에 더 이상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할 생각이 없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예. 무엇이든 경청하겠습니다.”

“무엇을 원하는가?”

단도직입, 그 자체다.

그러나 문수르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가장 원하는 것을 요구했다.

“이제르트 자작가를 보살펴주십시오.”

백작의 작위? 사실 당장 작위가 급한 건 아니다. 결국 작위는 허울에 불과하다. 백작의 작위를 얻어도 내실이 부족하면 무의미하다.

필요한 건 연출이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현재 상황, 병력, 전력, 영지 사정 등을 그럴싸하게 꾸며줄 연출?

그 연출을 위해서는 필로스 왕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그럼 필로스 왕의 협조를 받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간단하다.

필로스 왕이 이제르트 자작가를 측근으로 두고, 좋게 보고, 굽어 살펴주면 되는 거다.

자기편의 귀족을 내치는 왕은 없을 것 아닌가?

물론 대가는 왕가에 대한 이제르트 자작가의 충성이다. 이제르트 자작의 힘을 왕가를 위해 쓰는 것이다.

“그런가?”

필로스 왕은 그런 문수르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너무나도 간단하다. 이제까지 문수르의 고민이 무의미하게, 무가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혹여 필로스 왕이 문수르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너무 상황을 쉽게 생각한 것일까?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필로스 왕은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인간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대단한 정치적 감각을 이용해 이 자리, 왕위까지에 오른 인물이 바로 그다.

또한 그에게는 귀가 있고 눈이 있다. 진짜 귀와 눈이 아니라, 그의 눈과 귀가 되어주며 온갖 정보들을 가지고 있는 무리들을 말함이다. 그들로부터 이제르트 자작가의 상황을 분명 들었을 터.

‘목이 타는군.’

그럼에도 문수르의 부탁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이유는 간단하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왕가에 충성을 다하는데, 내 어찌 이제르트 자작가를 내칠 수 있단 말인가? 과거의 악연은 이제 사그라질 때까 됐지.”

필로스 왕과 이제르트 자작가 사이에 얽힌 악연을 너무나도 가볍게 정리했다.

그러나 단순한 정리가 아니다.

필로스 왕은 말했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왕가에 충성을 다하는데……라고.

필로스 왕의 의중.

자신의 충실한 신하가 된다면 충분히 뒤를 봐주겠다는 의미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네.”

그리고 지금 진짜 본론을 내뱉었다.

“아히만트 백작이 우리 왕국을 노리고 있네. 빅토리안 공작이 사라졌지만, 조만간 그에 버금가는 공세가 있을 걸세.”

아히만트 백작?

“혹시 페르소 제국의 아히만트 백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네. 아히만트 백작이 달리 있었나?”

아히만트 백작?

‘이제 확실하군. 빅토리안 공작 배후에 아히만트 백작이 있었어.’

빅토리안 공작이 갑작스레 움직인 이유가 이해된다.

“하오면 슈페언 백작께 말씀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필로스 왕의 걱정을 해결한 방법도 떠오른다.

슈페언 백작도 제국에서 발언권이 큰 귀족이다. 그리고 필로스 왕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가 나서면 아히만트 백작이 콩탄 왕국에서 힘을 쓰기란 힘들어진다.

그리고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히만트 백작을 그대로 놔두면 콩탄 왕국 내에서 슈페언 백작의 영향력이…….

‘아!’

그 순간 문수르는 눈치 챘다.

‘슈페언 백작은 오히려 아히만트 백작의 움직임을 용인할 모양이구나.’

슈페언 백작 덕분에 필로스 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이후 필로스 왕이 견고하게 왕권을 다지면서 슈페언 백작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 들었다.

다시 한 번 그 영향력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가장 좋은 건 다시금 콩탄 왕국에 혼란이 오는 것이다. 필로스 왕이 스스로 슈페언 백작을 찾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빅토리안 공작이 반역을 저질렀을 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병력을 이끌고 콩탄 왕국에 들어왔다.

이번 일로 자신의 영향력을 다시 강화시키기 위해서!

그런데 오히려 이번 반역을 필로스 왕은 자력으로 해결했다. 슈페언 백작의 도움 없이 해결했다.

때문에 반대로 슈페언 백작의 영향력이 더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

슈페언 백작 입장에서는 반전이 필요하다.

“눈치 챈 모양이군. 사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제 콩탄 왕국은 페스로 제국의 도움이 필요 없네. 오히려 이제부터의 도움은 도움이 아니라 내정간섭이 되어버리는 수준이지.”

“그러하다면…….”

“아히만트 백작의 도발을 막을 힘이 필요하네. 무엇보다…… 빅토리안 공작이 흑마법과 손을 잡은 이상 흑마법사들 역시 여전히 왕도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

“전쟁입니까?”

필로스 왕은 대답 대신 차를 홀짝였다.

문수르가 고개를 숙였다.

“전하가 원하신다면 이제르트 자작가는 지옥에라도 뛰어들 수 있습니다.”

“진심인가?”

필로스 왕이 원하는 건 결국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력이다. 더불어 그 전력으로 하려는 건…….

페스로 제국과의 싸움이다.

물론 전면전은 아니다.

하지만 페스로 제국의 재채기만으로도 콩탄 왕국은 몸살이 날 정도로 둘 사이에는 국력의 차이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력이 공중분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거절할 수는 없다.

이미 주사위는 던진 상황.

문수르는 필로스 왕의 진심이란 물음에 두 눈을 불태우며 말했다.

“신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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