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208화 (206/293)

208화

3.

암살자는 소리 없이 걸어왔다.

이윽고 암살자는 문수르 지척까지 도달했다.

그때까지도 문수르는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뜨지도 않았다. 오히려 숨을 죽였다. 기절한 것처럼 연기를 했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암살자 입장에서는 이만큼 쉬운 암살 대상도 없을 것이다.

대체 왜 일까?

문수르는 왜 암살자의 등장에도 무방비 상태를 고수하는 것일까?

‘적의가 없다.’

거리가 멀면 모른다. 그러나 거리가 지척이 되면, 제 아무리 단전이 깨진 문수르라고 해도 느낄 수 있다.

상대방이 적의를 가졌는지, 호의를 가졌는지 말이다.

물론 정말 뛰어난 암살자라면 제 아무리 죽이고 싶어 하는 철천지원수 앞에서도 적의와 살의를 숨기고, 미소를 지으며, 날카로운 비수를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분은 발소리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등장한 암살자는 실력이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적의와 살의를 감추고 암살을 할 정도로 엄청난 실력자는 결코 아니다.

그럼 대체 왜 일까?

이 밤중에, 기절한 것으로 알려진 문수르를 이런 은밀한 방법으로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문수르는 그걸 알기 위해 숨을 죽였다.

이윽고 암살자가 문수르 근처에 도달했을 때……!

스윽!

암살자는 문수르가 누운 침상 옆에 있는 탁자 위에 무언가를 놓고는 뒤로 걸음을 물리기 시작했다.

스르르!

그리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체 뭐였을까?

‘뭐야?’

문수르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여전히 숨을 죽인 채, 기절한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

무려 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문수르는 눈을 떴다.

그리고 문수르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옆에 놓인 것을 집었다. 그건 다름 아니라 편지였다.

“대체…….”

그 순간 문수르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이름이 번뜩였다.

‘필로스 왕…….’

그렇다.

그 편지는 다름 아니라 필로스 왕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4.

빅토리안 공작이 왕도를 공격하기 전, 그는 다수의 다크 나이트를 이용해 왕도의 내성을 암습했었다.

그 암습은 굉장히 유효했다. 심지어 다크 나이트는 필로스 왕의 곁에까지 도달했다.

여기까지가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

그러나 내부의 이야기는 좀 더 있다.

필로스 왕은 다크 나이트의 등장에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다크 나이트의 등장을 예상했든 듯, 필로스 왕의 주변에는 다크 나이트를 무력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마법 함정들이 준비된 상황이었다.

다크 나이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필로스 왕은 가장 신뢰하는 부하들을 모아두고 말했다.

“이제부터 나는 침묵할 것이다.”

이후 필로스 왕은 계속해서 침묵을 고수했다. 왕도가 위기에 빠졌을 때도, 신하들이 목을 걸고 제발 왕도를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고,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몸만 움직이시면 된다고 읍소했을 때도 필로스 왕은 자리를 버텼다.

그리고 위기가 끝났을 때, 빅토리안 공작이 패배한 이후에도 필로스 왕은 침묵을 고수했다.

신하들은 몰랐다.

대체 왜 왕이 침묵을 고수하는지, 대체 왜 왕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지.

필로스 왕은 그에 대해서 설명해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필로스 왕에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는 왕이었으니까.

그 누구도 그에게 질문을 던질 권한 따위는 없었다.

그런 필로스 왕이 어느 순간 움직였다. 자신의 휘하에 있는 암살자 부대를 움직였다.

그 암살자의 역할은 하나였다.

“이 편지를 문수르 경에게 전달하라.”

이유는 없었다.

기절한 문수르 경에게 편지를 전달하란 왕명이 떨어졌고 암살자는 곧바로 그 편지를 문수르에게 전달해줬다.

그리고 그 편지의 내용은…….

5.

“나를 만나고 싶단 말인가?”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장소가 적혀 있었다. 다른 말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편지 어디에도 필로스 왕의 편지임을 알려주는 내용은 없었다.

그러나 문수르는 확신했다.

이 편지는 필로스 왕이 보낸 것이다. 그 무엇보다 분명한 왕의 상징이 붉게 찍혀 있었으니까.

문수르는 고민했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문수르는 운 좋게도 이 편지를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다. 지금 문수르는 공식적으로 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평생 편지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잠시 동안은 무시할 수 있다.

두 번째 선택지는 이 장소로 가는 것이다.

‘함정일까?’

그곳이 함정인지 아니면 화합의 장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필로스 왕이 나를 죽일 가능성은?’

필로스 왕에게 있어 문수르는 아군이지만, 그렇다고 살려둬야 할 아군이란 말은 아니다.

정치적 관점에서 봤을 때는 오히려 문수르의 존재가 껄끄러울 수도 있다.

어쨌거나 눈엣가시였던 이제르트 자작가의 중심에는 문수르가 있을 뿐더러, 이제 거의 영웅이 되어버린 문수르의 명성은 필로스 왕을 짜증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더군다나 문수르 자체만이 문제가 아니라, 제이머스 후작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제이머스 후작 그리고 문수르.

이 둘의 조합으로 인해 생기게 될 새로운 정치적 파벌은 필로스 왕에게 큰 정치적 부담을 줄 터.

그렇다면 지금 문수르가 비정상적인 상태일 때 해치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시나리오다.

‘그리고 여긴 왕도다.’

더군다나 이곳은 왕도.

왕의 도시다.

솔직히 필로스 왕이 대단하다고 해도 수백 킬로미터 밖의 상대를 제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왕도에서는 다르다. 왕도 내에서만큼은 필로스 왕은 원하는 게 있으면 원하는 걸 할 수 있다.

사람을 죽인다?

일도 아니다.

사람을 죽인 후에 뒷처리를 하는 것 역시 전혀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반대로 정말 문수르를 죽이려고 했다면, 방금 전 암살자를 이용해 죽였을 수도 있다.

확실한 처치를 위한 노림수인가, 아니면 다른 의도인가?

‘뭐, 좋아.’

골치 아픈 상황이지만 문수르는 오히려 이걸 좋은 기회로 받아들였다. 꽉 막혀있던 머릿속이 뻥 터지는 느낌이다. 시원하게 폭발하는 느낌이다.

‘어쨌거나 왕과 단판을 지을 수 있다.’

무엇이 됐든 필로스 왕과 단판을 지을 수 있다는 것.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결과가 나온다는 의미다.

물론 되도록 좋은 방향이길 빌어야겠지만 정체되어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다.

‘어떻게 할까?’

순간 문수르의 머릿속에 생각이 떠올랐다. 문수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밤이군.”

지금 세상은 새카만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밤이다. 이 밤이 물러가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딱 좋군.”

문수르가 그 밤중에 움직였다. 깨진 단전, 고통스런 아랫배를 부여잡은 채 문수르는 귀신마냥 움직였다.

그렇게 문수르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니라 편지에 적힌 장소였다.

6.

보통의 저택이었다.

왕도 내에서 귀족들이 머물도록 만들어진 저택! 호화스럽지만, 그 크기는 크지 않았다.

보통 저택의 크기는 작위와 연관된다. 작위가 높을수록 왕도 내에서 가질 수 있는 저택의 크기도 커진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택의 크기는 자작 급 이하의 귀족들이 사용할 만한 크기였다.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정도로 일반적이고 평범한 크기라는 의미다.

‘인기척은 없군.’

그곳에 문수르가 등장했다.

문수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택은 화려했지만 인기척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척까지 왔음에도 일말의 생기(生氣)도 느껴지지 않는다.

-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로이드 역시 저택 주변에서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저택 내부는 어떨까?

문수르는 두 눈을 게슴츠레 떴다. 물론 그렇게 눈을 뜬다고 해서 저택 내부를 투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문수르에게 투시 능력 따위는 없었으니까. 로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외부에서 보는 것으로 내부의 상황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순 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진짜 저택 내부의 상황을 파악하는 건 GPS시스템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래도 로이드의 능력을 생각하면, 인기척이 느껴지거나 사람이 움직인다면 외부에서도 충분히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터.

- 아무런 조짐도 없습니다.

하지만 결국 로이드는 저택 안에서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했다.

- 주인님, 위험합니다.

“아무도 없다며.”

- 아무도 없으니 위험하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로이드가 충고를 했다. 문수르는 그 충고를 무시했다.

“아무도 없다면 차라리 잘 된 거야.”

정말 이 저택에 아무도 없다면…… 문수르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적어도 이곳은 필로스 왕이 보낸 편지가 말하는 장소다.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이용될 장소다.

그런데 이곳에 아무도 없다?

그러면 문수르는 아무런 문제 없이 이 저택 내부를 살펴보고, 조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로이드, 도청 장치는?”

- 소형으로 세 개 정도 있습니다.

“세 개 정도면 충분하겠군.”

심지어 도청장치를 이용하면 문수르는 이 저택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대부분을 마음껏 훔쳐 들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문수르는 오히려 거리낌 없이 저택 안으로 향했다.

“끄응…… 단전이 깨진 게 이 정도로 힘들 줄이야.”

걸음을 내딛는 문수르의 모습은 힘겨워 보였다. 걸을 때마다 바늘로 아랫배를 찌르는 느낌이었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다리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알아. 내 몸인데 내가 모르겠어?”

깨진 단전.

빨리 복구하지 않으면 근골이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다. 제 아무리 잘 지은 건물도 기둥이 무너지고, 그 상태로 놔두다 보면 차츰 붕괴되기 시작하는 법이니까.

“후우!”

이내 문수르는 심호흡을 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뚜벅뚜벅!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람도, 경비도 없었을 뿐더러, 문은 열려 있었다.

저택 문도 마찬가지였다. 문수르가 문을 밀었을 때 문은 너무나도 힘없이 열리고 말았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저택 내부.

나름 고급스러운 것들로 치장되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사람이 있던 흔적은…… 있다.’

그 순간 문수르의 눈빛이 빛났다. 인기척은 없었지만, 분명 사람이 움직였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많진 않다.

‘셋? 아니 둘…… 하나인가?’

숫자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최근까지 이곳에는 사람이 머무르고 또한 생활하고 있었다.

물론 굉장히 조용한 생활이었을 것이다. 흔적은 희미하게 남겨져 있었을 뿐이었다.

문수르는 천천히 그 흔적을 더듬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쪽이다.’

저택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흔적은 2층 위가 아니라, 안 쪽으로만 이어져 있었으며.

‘계단?’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흔적은 그 계단에도 이어져 있었다.

‘지하에서?’

만약 상대가 따로 마련된 지하에서 생활을 했다면 제 아무리 로이드라고 해도 파악하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꿀꺽!

달리 말하면 이곳이 무인지대가 아니라, 사람이 머무는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문수르는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어떻게 할까?’

여기서 물러날까?

아니면 더 안으로 들어가볼까?

짧은 고민.

고민 끝에 문수르가 택한 선택은…….

뚜벅뚜벅!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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