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62화. 대담.>
1.
“전쟁이 끝났어?”
슈페언 백작은 콩탄 왕국 왕도에서 들려온 소식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전쟁이 끝날 줄이야?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적어도 자신의 병력이 왕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전쟁이 끝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왕도가 함락하는 경우도 충분히 있으리라 생각했다. 왕도를 공격한다는 건 충분한 준비와 자신감이 있다는 의미다. 성공률이 높으니까 반역이나 다름 없는 짓을 할 수 있는 거다.
그런 부분을 생각하면 필로스 왕 입장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전쟁이다.
이렇게 쉽게 끝날 만한 전쟁이 아니라는 거다.
‘외부의 도움이 있었나?’
슈페언 백작은 골치가 아팠다.
‘이건 아니야.’
이번 전쟁은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 전쟁이다. 이번 전쟁은 슈페언 백작에게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솔직히 어느 순간부터인가 콩탄 왕국에 대한 슈페언 백작의 영향력은 알게 모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필로스 왕의 왕권이 강화되고, 주변 핵심 귀족들이 필로스 왕에 우호적으로 바뀌면서, 필로스 왕이 더 이상 페스로 제국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어진 탓이다.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왕이 되기 위해 호랑이의 힘을 빌린 여우가, 왕이 된 이후에도 호랑이의 힘을 필요할 리가 없으니까.
그게 정치다.
그래서 때를 가늠했다. 슈페언 백작이 다시 한 번 필로스 왕을 압박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번이 그 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저없이 영지의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콩탄 왕국의 영토를 밟았는데…….
‘끄응…… 이게 아닌데.’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헛물만 켜도 돌아갈 판이다. 솔직히 슈페언 백작은 이미 적지 않은 병력 피해를 입었다. 갑작스런 몬스터 군단의 등장으로 적지 않은 병력이 소모된 건 분명 큰 피해다.
아마 이런 병력 피해를 입은 건 수십 년만의 일일 것이다. 이제까지 페스로 제국은 패자(覇者)로 군림했고, 그 누구도 감히 페스로 제국에 전쟁을 걸지 않았으며, 슈페언 백작은 개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귀족 중 한 명이었으니까.
이런 피해를 입었음에도 여기서 물러난다?
다른 건 몰라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잠깐.’
그 순간 슈페언 백작의 머릿속에 몬스터 군단이 떠올랐다.
‘그래, 놈들을 잠시 잊고 있었어.’
몬스터 군단.
흑마법사의 조종을 받는 무리들이다. 존재 자체가 곧 부도덕이고, 부조리한 것들이다.
당연히 처치해야 하는 대상이다.
“지금 몬스터 군단은 어디 있지?”
더불어 몬스터 군단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니라 왕도였고, 슈페언 백작은 부하를 시켜 몬스터 군단의 이동경로를 계속해서 파악 중이었다.
“여전히 왕도로 이동 중입니다.”
“여전히? 다른 움직임은 없고?”
“예.”
“흠, 왕도에서 전쟁은 끝났는데 몬스터 군단이 움직인다고? 대체 의도가 뭐지?”
슈페언 백작은 고민했다.
몬스터 군단이 2차 공격을 감행하려는 것일까? 전후사정만 놓고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2차 공격이라…….’
몬스터 군단의 공격력은 엄청나다. 슈페언 백작도 혀를 내두를 정도 아니었던가?
이제 막 전투를 끝낸 왕도의 군대는 몬스터 군단을 쉽게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기회다.
지금 이 몬스터 군단이 그대로 왕도를 침략하게 놔둔 후에 슈페언 백작이 나선다면?
슈페언 백작은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얻을 수 있다.
‘그래, 하늘이 여전히 나를 돕는군.’
슈페언 백작이 이내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상황이 진행된다면, 결국 마지막에 웃는 건 그가 될 테니까.
2.
문수르는 여전히 고민 중이었다.
‘필로스 왕과 접촉해야 한다.’
사실 시나리오는 어느 정도 완성된 상황이다. 아이언히트와 드래곤 파이터의 존재를 그럴싸하게 꾸며줄 시나리오는 수십 개도 넘는다.
그러나 결국 모든 시나리오에는 핵심 인물이 필요했다.
바로 필로스 왕이 그 핵심인물이다. 필로스 왕을 배제하면 시나리오 전부가 무용지물인 다름없었다.
‘젠장!’
그러나 필로스 왕은 여전히 침묵 중이었다.
모르겠다.
이미 전쟁은 끝났는데, 어째서 필로스 왕이 이제까지 침묵을 고수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대체 왜?’
필로스 왕의 공백은 그냥 공백이 아니다. 그의 공백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왕도의 혼란은 증폭될 것이다.
사실 지금 왕도는 굉장히 불안하다. 말 그대로 모래 위의 성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빅토리안 공작의 반역 사건은 분명 콩탄 왕국 대부분의 귀족에게 큰 충격을 줬다.
그리고 이 소식, 빅토리안 공작의 반역 사건을 비롯해서 왕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콩탄 왕국 전역에 퍼지기 시작할 것이다.
케르빈 월드에는 전화기 같은 게 없다. 한 번 소문이 퍼지면 그 소문을 바로 잡는 게 굉장히 힘들다. 그런 상황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그걸 어찌할 도리가 없다.
더군다나 왕의 공백!
이게 핵심이다.
필로스 왕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의심하는 자들이 더 늘어날 것이다. 그 소문 역시 빠르게 퍼질 터.
왕의 자리는 절대 공석이 납득되는 자리가 아니다. 누가 되도 좋다. 허수아비가 되도 좋다. 누구든 왕위에 앉게 될 것이다.
즉, 필로스 왕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필로스 왕의 왕권은 더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제이머스 후작도 바보가 아니고, 이 기회를 그냥 바라보지만은 않을 터.’
제이머스 후작에게도 필로스 왕의 침묵은 좋지 못한 상황이지만, 이런 상황을 그냥 넋놓고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제이머스 후작은 왕도에 있고, 그는 왕도에 모인 대부분의 전력에 대한 통솔권을 임시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제이머스 후작이 반역을 꿈꾼다면, 그는 정말 왕위에 오를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페스로 제국이 제이머스 후작과 그 일가를 싹 쓸어버리겠지만.
굳이 왕위가 아니더라도 필로스 왕의 침묵이 길어지는 동안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만들 수 있다.
‘빅토리안 공작은 없다.’
더군다나 빅토리안 공작이 없는 지금 상황에서 제이머스 후작의 정치적 기반은 어떤 의미에서 콩탄 왕국의 핵심 파벌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 후에는?
이제까지 빅토리안 공작과 제이머스 후작 파벌이 친왕파 노선을 걸었던 건 두 세력이 서로 견제를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느 한쪽이 사라진다면, 친왕파라는 타이틀 대신에 귀족들을 대표해 왕을 견제하는 형태가 나올 터.
당연한 수순이다.
귀족들의 권리와 왕의 권리는 언제나 충돌할 수밖에 없으니까.
‘정말 필로스 왕이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인가?’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필로스 왕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만무하다. 몸이 아프더라도 정치적 손해를 막기 위해 억지로라도 얼굴을 드러내고, 상황을 정리했을 것이다.
이쯤 되자 문수르도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빅토리안 공작의 암습…… 다크 나이트를 이용한 암습.
설마 그 암습에서 필로스 왕이 얼굴조차 드러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타격을 입은 게 아닐까?
말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됐을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라면…….
‘시체가 된 상황일 수도 있지.’
죽음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하다. 죽음이란 건 어떤 의미에서 세상 모든 이들에게 찾아오는 것이니까.
죽음이 찾아오는 과정은 공평하지 않아도, 결국 언젠가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굳이 빅토리안 공작의 암습이 아니더라도 케르빈 월드는 의학마저 발전하지 못한 세계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병명은 감히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하다못해 감기 때문에 죽는 사람도 있다.
필로스 왕이 죽었다고 해서 절대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만약 필로스 왕이 죽었다면…….’
그리고 필로스 왕이 정말 죽게 됐다면.
‘내게는 최고의 상황이겠지.’
문수르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최고의 상황이 연출되는 셈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죽은 필로스 왕을 이용하면 모든 것을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다.
“후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순간 문수르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필로스 왕의 죽음을 염두에 두다니…… 뭐, 딱히 필로스 왕을 존경하는 건 아니다. 그에 대한 충성심도 솔직히 없다. 얼굴을 본 적조차 없는 사이인데, 무슨 충성심이란 말인가?
오히려 이제르트 자작가와 필로스 왕과의 사이는 좋지 못하다. 정치적 이유로 최근 사이가 좋아졌을 뿐이다.
이런저런 경우를 생각해보면 문수르가 필로스 왕을 좋아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단지 필로스 왕의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그 어떤 시나리오도, 계획도 세울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문수르는 짜증 날 뿐이었다.
결국 그가 하는 건 도박이다. 주사위를 던져서 보다 나은 눈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꼴이다.
도박에 이제르트 자작가의 운명을 걸다니?
‘어스 월드로 돌아가면 한 소리 듣겠군.’
한석균이 안다면 크게 화를 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잔소리를 들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낫지.’
그러나 지금은 그런 잔소리가 그리웠다.
‘젠장.’
어스 월드로 돌아가지 않은지 꽤 됐다. 지금 어스 월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궁금할 뿐더러, 솔직히 말해서 어스 월드에 가서 무엇이든 가져오고 싶다.
한석균이라면 필시 이제르트 자작가의 부흥에 도움이 될만한 것을 준비해뒀을 것이다.
뭐든 좋다.
지금 이제르트 자작가에는 뭐든 필요한 상황이다.
‘시간이 나지 않아.’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특히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일단 단전부터 고쳐야 돼.’
어떤 의미에서 지금 문수르가 해야 하는 고민은 필로스 왕에 대한 것이 아닐 지도 모르다.
문수르의 깨진 단전…… 몸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지만 단전이 상처는 그대로다.
문수르에게 오러 마스터란 타이틀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 타이틀이 없으면 문수르가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은 본래 가진 것의 반의 반도 되지 못한다.
물론 방법은 있다.
‘일단 영지로 가서 탈라트 부족의 신목의 도움을 받아야겠지.’
엘프 족의 신목, 바나푸스 나무. 그 바나푸스 나무의 열매를 이용하면 문수르의 단전도 어느 정도 회복될 것이다. 이미 전례도 있다. 더불어 탈라트 부족은 충분히 열매를 내어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제르트 자작령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왕도에 있어야 한다.
왕도에서 어떤 식으로든 콩탄 왕국의 미래를 결정할 무언가가 터질 것이다.
- 주인님.
“응?”
그때였다.
로이드가 말을 걸었다. 문수르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 사람이 오고 있습니다.
‘누구지? 이제르트 자작인가? 아니면 헤인 경?’
지금 현재 문수르는 기절한 상황으로 알려져 있다. 누가 오든 당연히 기절한 척을 해야 한다.
하지만 단전이 깨져 기감(氣感)이 떨어진 문수르는 기척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상황.
이 부분을 해결해주는 건 로이드였다. 문수르가 머무는 방 주변에 몇 개의 감시 장치를 설치해두고 로이드가 주변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 둘 모두 아닙니다. 은밀하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암살자 같습니다.
‘뭐?’
문수르는 놀랐다.
손님이 오는데 그 손님이 암살자라니?
‘어떻게 해야 하지?’
문수르에 대한 암살…… 충분히 가능하다. 콩탄 왕국의 태풍의 눈이 되어버린 이제르트 자작가를 곱게 보지 못하는 귀족들은 넘쳐난다. 그런 그들 중 누군가 이미 인사불성 상태인 문수르를 노리고 암살자를 보냈을 가능성은 오히려 굉장히 높은 축에 속한다.
더군다나 빅토리안 공작이 휩쓸고 간 상황에서 문수르의 암살을 빅토리안 공작의 잔당이 한 것으로 위장할 수도 있다.
시기도 적절하다는 거다.
그래서 염두에 두긴 했다.
단지 암살자가 왔을 때 기절했던 연기를 멈추고, 암살자를 처치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가 될 뿐.
‘접근한 후에 나설까?’
그러나 문제는 시기다.
암살자가 지척까지 접근한 후에 나서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 전에 미리 놈에게 경고를 하는 게 좋을까?
문수르의 머릿속에 복잡해졌다.
그 순간!
툭!
무언가가 천장에서 떨어졌다. 문수르는 그게 바로 로이드가 말한 암살자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처벅처벅!
그리고 암살자가 천천히 문수르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