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3.
빅토리안 공작.
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무능하군.”
“젠장, 지금 그럴 말을 할 때가 아니오.”
카라카크.
수백 년을 살아온 사악한 흑마법사가 빅토리안 공작 앞에 젊을 적 모습으로 등장했다.
빅토리안 공작은 그런 카라카크를 볼 낯이 없었다.
‘빌어먹을!’
카라카크, 그는 분명 약속대로 빅토리안 공작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그가 빌려준 몬스터 군단과 몬스터 데스나이트는 정말 전세의 판도를 바꿀 정도로 강력했다.
그가 준 병력은 충분하다.
그러나 빅토리안 공작은 그 병력을 가지고도 아직까지 왕도를 점령하지 못한 상황이다.
주둥이가 있어도 카라카크 앞에선 말이 안 나온다.
물론 빅토리안 공작은 이 상황에서도 말을 뱉었다. 지금 빅토리안 공작은 평소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흑마법에 의해서 감정이 뒤틀리고, 비틀리고 고조된 상황이었다.
“당신이 보내준 몬스터 데스나이트 중 일부가 왕도에 도착하지 않았소. 그것만 있었어도 전세는 달라졌을 것이오.”
변명이다.
그러나 맞는 말이기도 했다.
본래 대로 왔어야 할 몬스터 데스나이트 중 30여기가 오지 않았다. 소식도 없다.
몬스터 데스나이트 30여기란 전력은 엄청난 전력이다. 솔직히 그 전력이 온전하게 왔다면, 이제르트 자작가의 지원이 있기 전에 승부를 봤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쪽이 제대로 일을 처리했으면 당신은 이 허름한 곳이 아니라 왕국의 왕위에 있는 나와 이야기를 했을 것이오.”
“그래서?”
카라카크 말에 빅토리안 공작은 침음을 삼켰다.
제 아무리 빅토리안 공작이 대단하다고 해도 눈앞의 상대는 과거 할루이 이제르트란 대마법사가 살았던 시대에 이미 드높은 악명을 떨쳤던 무시무시한 흑마법사다.
이제까지는 기 싸움에서 지기 싫어서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정말 서로가 기 싸움을 한다면, 빅토리안 공작은 절대 카라카크 앞에서 눈조차 뜰 수 없다.
더군다나 빅토리안 공작은 다급했다.
지금 이 순간 카라카크가 이번 일에서 손을 뗀다면, 그는 더 이상 왕위를 꿈꿀 수조차 없는 처지가 된다.
그뿐인가?
이미 필로스 왕은 빅토리안 공작이 반역을 저지렀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페스로 제국도 이번 일을 보고 있다.
여기서 패배하면 빅토리안 공작가는 몰락이다. 지도 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가문이 된다.
죽는 건 두렵지 않다. 까놓고 빅토리안 공작은 이미 살만큼 살았다. 당장 죽어도 솔직히 호상(好喪)이다.
그러나 수백 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자신의 가문이 몰락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더군다나 자신의 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더더욱 용납할 수 없다.
두렵다.
너무나도 두려워서 이가 갈릴 정도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세상 모두를 적으로 둔다고 하더라도, 흑마법사임이 밝혀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대에서 빅토리안 공작가가 무너지는 건, 몰락하는 건 피해야 한다.
“카라카크. 솔직히 말하겠소. 도움이 필요하오. 당장 몬스터 군단을 왕도로 이동시켜주시오.”
“이미 이곳으로 오고 있다. 몬스터 데스나이트의 일부에 이상이 생겼을 때부터 움직였다.”
“그렇소?”
“그런데 문제가 있다. 원하는 시간대에 몬스터 군단이 올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건…….”
빅토리안 공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몬스터 군단을 국경으로 보냈다. 국경에서 왕도까지 거리가 보통 거리가 아니다. 적어도 이제르트 후작의 결사대보다는 늦게 도착할 것이다.
그럼 문제가 커진다.
이제르트 자작 파벌의 결사대까지 포함된다면, 왕도의 전력을 더 강해지게 된다.
또한 계속해서 지원군이 올 터.
몬스터 군단을 이용해 단숨에 전쟁을 끝내는 게 불가능해진다. 그러면 몬스터 군단을 쓸 이유가 없어진다. 결국 흑마법사와 결탁한 빅토리안 공작은 대륙의 공적이 되어 추적을 당할 테니까.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해주지.”
“무엇이오?”
“공작, 그대에게 힘을 주도록 하지.”
“힘? 무슨 힘 말이오?”
“말 그대로 힘. 자네에게 마음껏 흑마법을 쓸 수 있는 힘을 주겠다. 직접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거다. 받아들이겠나?”
힘을 준다?
빅토리안 공작은 잠시 고민했다. 만약 평소의 그였다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스크가 너무 크니까.
흑마법이 주는 힘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강력한 힘?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러나 지금 빅토리안 공작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는 흑마법에 의해 타락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올라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리고 힘에 대한 탐욕이 생겼다.
“어느 정도의 힘이오?”
결국 빅토리안 공작이 금단의 선을 넘고 말았다.
카라카크는 미소를 지었다.
“세상을 뒤집을 힘이지.”
4.
이제르트 자작 파벌의 결사대가 왕도에 도착했다.
그제야 왕도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게 됐다. 솔직히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력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이제르트 자작이 엄청난 전력을 가지고 온 건 맞지만 그는 이러다할 전공을 세운 이가 아니다.
반면 제이머스 후작은 콩탄 왕국이 낳은 최고의 기사이며, 훌륭한 전술가이기도 했다. 그런 제이머스 후작이라면 뒤숭숭한 왕도 내의 분위기를 바로 잡기에 충분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제이머스 후작은 왕도에 오자마자 이러다할 환영인사 대신에 모든 기사들과 귀족들을 소집했다.
“상황이 긴박하오. 빅토리안 공작이 사악한 흑마법사와 손을 잡고 수작을 부렸소. 그런 빅토리안 공작이 후퇴했을 리 만무하오. 필시 다시금 이곳, 왕국의 심장인 왕도를 노릴 것이외다.”
쿠틀러 백작가의 기사 쥴리언 경이 가져온 소식에는 몬스터 데스나이트에 대한 것도 있었다.
기어코 들킨 것이다.
왕도에서 싸울 때는 어떻게든 몬스터 데스나이트의 시체를 수거해서 들키지 않았지만, 쿠틀러 백작령을 공격했던 시체는 처리해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빅토리안 공작이 반역자임은 알았지만 그가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처음 들었기에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여기서 제이머스 후작은 강하게 나갔다.
‘기회다.’
사실 필로스 왕의 곁에 있던 귀족들은 상당수가 빅토리안 공작 파벌 소속이었다.
당연하다.
콩탄 왕국의 대부분의 귀족들은 빅토리안 공작을 따르던 자들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제이머스 후작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상대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말이다.
더불어 이번 일을 계기로 빅토리안 공작을 막아내기만 하면 제이머스 후작의 위치는 반전될 것이다. 빅토리안 공작의 자리가 단숨에 제이머스 후작의 것이 되는 것이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는 말!
제이머스 후작은 그 말을 지금 너무나도 제대로 체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제이머스 후작은 당장 왕국 내 병력을 재편했다. 보다 효율적인 전투를 위해서 말이다. 물론 그 병력을 다루는 핵심적인 위치에는 제이머스 후작의 측근들, 쿠틀러 백작과 불스 백작을 꽂아 넣었다.
다른 귀족들은 그런 제이머스 후작의 태도에 불만을 가졌지만, 토로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믿고 따르던 빅토리안 공작이 단숨에 반역자가 된 상황이다.
이 전쟁이 끝나면 필로스 왕은 빅토리안 공작과 그 측근들을 제거할 것이다. 반대로 제이머스 후작은 단숨에 정치의 핵심으로 떠오를 터! 지금 귀족들이 해야 하는 건 어떻게든 제이머스 후작에게 굽실거리며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우의 수들이 맞아 떨어진 덕분에 제이머스 후작은 빠르게 왕도 내 주도권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필로스 왕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제이머스 후작이 왕도 내에서 일을 함과 동시에 수시로 필로스 왕과의 만남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 당했다.
솔직히 이쯤 되자, 왕도에는 불길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필로스 왕이 죽은 건 아닐까?
소문이다.
감히 입 밖으로, 하물며 왕도에서 그런 말은 귓속말로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필로스 왕의 침묵은 너무 길었다. 몸이 아프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상황이면 측근을 통해서라도 무언가 말을 전달해야 할 텐데, 그조차 없었다.
위기의 순간에야 숨을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된 상황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불길한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소문도 오래 가지 않았다빅토리안 공작, 그의 공격이 다시금 시작됐으니까.
공격의 시작은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노르스름한 빛이 왕도를 가득 채우고 있을 무렵이었다.
5.
문수르.
그는 가라앉은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석양 아래에는 왕도라는 거대한 도시가 있었다.
‘이제 시작이군.’
문수르는 예전에 도착했다.
드래곤 파이터의 마나 동력마저 제 오러처럼 다루게 된 문수르가 조종하는 드래곤 파이터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지치지 않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렸다.
덕분에 문수르는 제이머스 후작의 결사대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도착했었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지원군이 도착해 전투를 치르고, 빅토리안 공작이 물러났을 무렵, 그때 이미 왕도를 시야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문수르는 등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습을 감추었다.
문수르는 느낀 것이다.
‘빅토리안 공작의 작전이 어긋났다.’
빅토리안 공작은 철두철미한 작전을 세우고 왕도에 왔을 것이다. 확신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반역이란 것은 확신이 없고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리스크는 가문의 몰살!
명예에 절대적으로 목숨을 걸며,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된 귀족들에게 가문의 몰살과 몰락이란 것은 죽음보다 두려운 리스크니까.
그 확신을 이제르트 자작이 깨부쉈다.
견고하게 쌓아올린 확신일수록 무너질 때의 피해 역시 클 수밖에 없다.
빅토리안 공작은 물러났을 것이다.
그리고 고민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과연 지금 전력만으로 왕도를 함락시킬 수 있을까?
만약 함락시킬 수 없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미래에 대한 절망감.
결국 빅토리안 공작은 자신이 가진 모든 카드를 꺼내놓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빅토리안 공작이 꺼내놓는 카드는 굉장히 위력적인 것이 될 게 분명했다.
흑마법!
사용하면 빅토리안 공작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공적으로 낙인 찍히게 된다.
하지만!
빅토리안 공작이 모든 카드를 꺼내놓는다면, 그는 패배자가 될 지언정 콩탄 왕국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남길 것이 분명하다.
문수르는 그걸 우려했다.
전쟁의 승리도 중요하다.
그러나 전쟁의 승리보다 더 중요한 건 콩탄 왕국이 무너지는 걸 막는 일이다.
콩탄 왕국이 망해버리면, 전쟁에서 승리한 의미가 사라지는 셈이니까.
문수르는 그걸 막기 위해 모습을 감추었다. 최후의 순간, 절체절명의 순간, 문수르는 나설 생각이었다.
그건 문수르의 처지 때문이기도 했다.
‘한 번 힘을 발휘하면…… 두 번째는 없다.’
지금 문수르는 무지막지하다. 그가 가진 강함은 너무 강력해서 문수르 본인도 덜덜 떨 정도다.
하지만 그 강함은 일시적인 강함이다.
붕괴되는 몸을 대가로 발휘하는 강함이다. 한 번은 가능하다. 한 차례 동안 문수르는 무신(武神)이란 평가가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위엄을 보일 수 있다. 전장을 지배할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는 없다.
그렇기에 빅토리안 공작이 모든 카드를 꺼냈을 때 문수르가 나서야 했다. 문수르는 올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만약 빅토리안 공작이 카드를 감추고 있다면…… 문수르는 그걸 막을 수 없을 테니까.
‘올 것이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빅토리안 공작 역시 시간이 많지 않을 터.
조만간 빅토리안 공작이 모든 걸 걸고 도박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