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4.
다시 밤이 왔다.
물러났던 빅토리안 공작가의 병력이 다시금 왕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밤에 이루어진 공격은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젠장, 저 놈들은 잠도 없나?”
“빌어먹을, 낮 동안 성벽 보수를 하느라 힘을 다 썼는데…….”
빅토리안 공작은 몬스터 데스나이트 때문에 낮중에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왕군 입장에서는 그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오히려 낮 동안 왕군은 혹시 모를 2차 공격에 대비해 철저하게 경비를 서야만 했다.
그뿐인가?
무너진 성벽을 임시로나마 복구하기 위해 병사들이 투입됐다.
밤중에 고된 전투를 치리고, 낮중에는 고된 복구 작업에 투입됐으니, 녹초가 될 수밖에. 적이 밤에 올 것에 대비해 낮중에 낮잠이나 푹 자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반대로 적이 그 점을 노리고 때를 가늠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결국 다시 밤중이 되자 적이 등장한 것이다.
병사들은 죽어갔다.
그나마 휴식을 취한 기사들과 기가스 파일럿들 역시 컨디션은 엉망이 된 상황이다.
적어도 밤에 싸우도록 몸의 컨디션을 맞추는 기사들은 없다. 사람의 컨디션이란 건 결국 낮에 활동하고, 밤에는 쉬도록 설정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억지로 밤낮을 바꾸었으니, 컨디션이 좋을 리 만무하다.
반면 적에게는 컨디션 따위는 없었다. 몬스터 데스나이트에게는 태양만 없으면 된다.
빅토리안 공작 휘하의 기가스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그들은 며칠 전부터 밤에 맞추어 컨디션을 조절해둔 상황이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전투!
이번에 왕군은 성벽 안에서 싸우고자 했다.
성벽 안의 투석기 따위를 이용해 적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주고자 했고, 성벽이 무너지면 그곳에 병력을 집중시켜, 무리하세 성벽을 넘으려는 적을 처치하고자 했다.
어쨌거나 성벽을 무너뜨리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까.
왕군도 안다.
지원군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간만 벌면 된다.”
“조금만 시간을 더 벌면 지원군이 도착할 것이다.”
처음에는 적을 일망타진하고자 했던 왕군도 이제는 수성(守成)으로 전술을 바꿨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공성보다는 수성이 훨씬 더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성벽 한 부분이 무너지긴 했지만, 여전히 왕도의 성벽은 높고, 두터웠다. 오히려 어설프게 무너진 성벽 부분을 뚫기 위해 병력을 집중하면 빅토리안 공작 역시 큰 피해를 입을 터.
이때부터 지루한 공방전이 시작됐다.
투석기의 공격을 피해 어떻게든 성벽을 더 무너뜨리기 위해 공격을 시도하는 빅토리안 공작 측과 어떻게든 그런 공격을 막고, 방해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하는 왕군 측!
일진일퇴가 거듭됐다.
여기서 빅토리안 공작은 다시금 다크 나이트 카드를 꺼냈다.
초반에 투입한 다크 나이트 중 적지 않은 숫자가 사멸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스무 기가 넘는 다크 나이트가 수중에 있었다.
다크 나이트는 그들 전부를 소모할 생각이었다.
표적은 다름 아니라 일반 병사였다.
‘공포를 심어주는 거다.’
백 명 이상만 죽이면 된다.
그러면 왕군의 머릿속에는 공포가 심어들 것이다. 특히 병사들 사이에 공포가 전염되면, 사기는 급속도로 저하된다.
메리트는 또 있다.
나중에 빅토리안 공작이 왕위를 찬탈했을 때,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절대 반역을 저지르지 못할 것이다.
빅토리안 공작의 수는 그렇게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빅토리안 공작, 그에게는 충분히 한 나라를 이끌어 갈만한 지식과 능력이 있었다.
반면 왕군은 이러다할 지도자가 없었다.
필로스 왕의 침묵은 길었다. 그 밖에도 유능한 군사가 필로스 왕 휘하에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까지 필로스 왕은 유능한 군사를 왕도에 둘 필요가 없었다.
유능한 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주었다. 작위를 수여하고 영지를 주었다.
당연히 유능한 군사들은 왕도가 아닌 자신의 영지에 영주로 머물렀다.
필로스 왕은 설마 자신의 땅이, 왕도가 이렇게 전면적인 공격을 받을 줄은 염두에 두지 못했던 것이다.
군사가 없으니, 급변하는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떨어졌다. 심지어 병력을 다독일만한 카리스마를 가진 자도 없었다.
루이 노믹스는 오히려 일선에서 물러난 채 상황을 방관하고 있었다.
루이 노믹스는 콩탄 왕국의 왕을 위해서 제 목숨을 마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 무엇보다 단단할 것 같았던 왕성…… 하지만 그들은 결국 온실 속의 화초에 불과했다. 진짜 혹독한 전쟁을 맞이했을 때 그들은 너무나도 많은 허점을 노출했다.
콰앙!
“남쪽 성벽이 무너졌다.”
결국 왕군이 가장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남쪽 성벽의 붕괴.
콰앙!
“동쪽 성벽이 무너졌다!”
그것을 시점으로 연쇄적인 성벽 붕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방의 성벽이 무너졌다.
그리고 거대한 기가스와 무시무시한 몬스터 데스나이트가 무너진 성벽을 넘기 시작했다.
그 무렵이었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력이 왕도 근처에 도달한 것은 말이다.
5.
빅토리안 공작은 기겁했다.
“아니, 저게 무슨!”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보기에도 20기는 넘을 정도로 많은 기가스가 왕도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냐!”
이건 아니다.
이런 것은 빅토리안 공작의 계획 어디에도 없었다
“설마 제이머스 후작이?”
너무나도 많은 숫자의 기가스였다. 제이머스 후작이 이끄는 결사대가 아니면 이 정도의 기가스를 움직일만한 세력은 페스로 제국의 영주들 빼고는 없었다.
그리고 페스로 제국의 영주들, 특히 슈페언 백작이 왕도로 올 것을 방해하기 위해 몬스터 군단을 페스로 제국과의 국경 근처에 배치해뒀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저 만한 숫자의 기가스가 왕도를 향해 온단 말인가?
빅토리안 공작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흑마법을 사용해 적의 존재를 샅샅이 파악하고자 했다.
“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알게 됐다.
“저 기가스…… 보통 기가스보다 작군.”
지금 오는 기가스들의 숫자는 많았지만 그 크기는 일반 1배 급 기가스보다 작았다.
무엇보다 기가스의 형태가 처음 보는 타입의 것이었다.
빅토리안 공작의 머리가 빠르게 계산을 내놓았다.
분명한 건 지금 등장한 기가스들은 높게 쳐줘도 1배 급, 그 이상은 되지 못할 거란 사실이었다.
1배 급도 안 되는 기가스라면 전장에 영향을 줄 수는 있겠지만 전황을 단숨에 뒤집을 수는 없다.
빅토리안 공작의 머릿속이 빠르게 계산을 내렸다.
‘좋아.’
그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전력이 배분되었다. 빅토리안 공작은 그 명령을 기가스 파일럿들에게 전했다. 사실 빅토리안 공작이 제대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기가스 파일럿들뿐이었다. 몬스터 데스나이트는 어디까지나 빅토리안 공작의 것이 아닌 카라카크의 것이었으니까. 지금 빅토리안 공작이 몬스터 데스나이트에게 내릴 수 있는 명령을 단순한 공격과 후퇴, 그 두 가지 뿐이었다.
‘어차피 성벽은 뚫렸다.’
몬스터 데스나이트 숫자면 충분히 성벽 너머의 왕군과 전투를 벌일 수 있다.
기가스 전력을 빼도 문제될 건 없다는 소리다.
그러나 그 순간 빅토리안 공작은 한 명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
루이 노믹스.
그 짐승 같은 사내를 말이다.
6.
“모두들, 무사하도록.”
이제르트 자작이 명령을 내렸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가스 파일럿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두가 아이언히트에 탑승했다.
쿠웅!
아이언히트들과 기가스들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총 30기의 기가스들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전진하지 않았다. 방패병과 창병, 두 부류로 나뉜 채 전열을 갖추어 전진했다.
그런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가스 앞에 선 건 2배 급 기가스들이 주축을 이룬 빅토리안 공작가의 기가스였다.
그 숫자는 21기!
숫자 상으로는 이제르트 자작가 측이 우세했지만, 출력에서는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21기의 기가스 중 2배 급 기가스의 숫자만 15기였다.
0.6배 급 기가스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2배 급 기가스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최소 3기가 붙어야 한다.
이제르트 자작 역시 알고 있었다.
상대의 주축 기가스가 2배 급 기가스란 사실을 말이다.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전쟁은 불리하다고 해서 외면하고, 피할 수 있는 종류의 전쟁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무엇을 위해서?
왕국을 위해서!
‘일단 시간을 끈다.’
물론 이제르트 자작은 밑도 끝도 없이 전쟁을 치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출력이 떨어지지만, 아이언히트에게는 기동력이 있었다. 치고 빠지는 전투를 치를 생각이었다.
더불어 공격으로 상대의 수를 줄이기보다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고자 했다.
적어도 시간을 벌면 그가 나서줄 테니까.
‘문수르 경!’
문수르!
이제르트 자작은 그를 믿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어딘 가에서 문수르는 이 전황을 뒤집기 위해, 왕국을 위해, 그리고 이제르트 자작가를 위해 어떠한 것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문수르의 노림수가 이곳에 도달하기 전까지 시간을 벌면 된다.
이제르트 자작의 그런 의지는 아이언히트를 통해서 표현됐다.
아이언히트는 삼각형 모양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상대와 막 접전을 벌이는 순간, 최후방에 있던 전력이 좌우로 퍼지고, 최전방…… 삼각형의 꼭짓점 부근에 있던 병력이 오히려 후방으로 빠졌다. 그러자 마치 아이언히트가 적을 포위하는 듯한 형세를 갖추었다.
빠른 움직임이었다.
빅토리안 공작가의 기가스 파일럿들도 놀랄 정도였다.
“무슨 놈의 기가스가 저렇게 빨라!”
“움직임이 너무 부드럽군.”
기가스를 조종하기에 알 수 있다.
아이언히트가 보여주는 기동력 그리고 움직임의 부드러움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것인지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언히트가 뒤로 빠졌다.
모든 아이언히트가 교전이 이루어지려는 순간 뒤로 물러난 것이다.
그와 동시에!
후웅!
빅토리안 공작가의 기가스들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콰앙!
일부는 애꿎은 땅만을 내리찍었다.
기가스들의 공격은 위력적이지만, 크다. 때문에 공격을 시도하는 순간부터, 적에게 공격이 닿기 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때문에 능숙한 기가스 파일럿은 교전 전에 먼저 공격을 시도한다.
아이언히트는 그 점을 노리고, 뒤로 뺀 것이다.
애초에 출력에서 압도적으로 지는데 정면 승부를 하는 건 멍청한 짓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방패병을 앞세운 것도 그런 의미에서였다.
적에게 착각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이런 아이언히트의 조직적인 움직임에 빅토리안 공작의 기가스 파일럿들은 잠시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런 타입의 기가스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때문에 당장 답을 내리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상황들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생각을 마친 몇몇은 아이언히트를 쫓아 움직였다. 교전을 택한 자들이다.
반대로 몇몇은 뒤로 물러났다. 방관을 택한 자들이다.
의견이 갈렸다.
그리고 자신들의 의견이 갈렸다는 것을 서로의 행동을 보고 파악하자, 빅토리안 공작의 기가스 파일럿들은 기겁했다.
‘위험하다!’
수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전력을 분산되면, 나눠먹히게 될 것이 뻔하다.
이 순간 저도 모르게 빅토리안 공작의 기가스들이 한 곳에 뭉쳤다. 각개격파를 막기 위한 다급한 행동이었다.
그 무렵이었다.
왕성 내에서 웅크리고 있던 루이 노믹스가 냄새를 맡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