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2.
문수르는 말했다.
“쥴리언 경,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왕도로 떠나십시오.”
문수르의 말에 쥴리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본래 문수르와 함께 왕도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수르에게는 엄청난 기가스가 있었다. 그 기가스와 같이 이동하는 게 여러 모로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반대로 문수르 입장에서 쥴리언과 함께 하는 건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었다.
설명해줄 것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자신이 다른 세계 사람이며, 드래곤 파이터가 다른 세계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란 걸 말해줄 수는 없다.
그렇기에 문수르는 적당한 변명거리를 준비했다.
“저는…… 전하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왕을 팔았다.
필로스 왕, 이제까지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그를 팔았다.
사실 왕을 팔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왕을 팔아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잘못하면 왕을 능욕한 죄로 여러 곤욕을 치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쥴리언을 속일 수 있는 방법, 그리고 드래곤 파이터란 어마어마한 존재를 적당히 포장할 수 있는 이름 값은 필로스 왕, 그를 제외하면 마땅히 없었다.
왕을 언급한 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쥴리언의 표정이 달라졌다.
“설마?”
“예, 저 거대한 기가스는…… 전하의 명령으로 이제르트 자작가가 만들게 된 작품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생각해보십시오. 콩탄 왕국이 자체적으로 강력한 기가스를 만든다는 게 가능할 것 같습니까?”
“그야…….”
쥴리언은 잠시 생각했다.
콩탄 왕국도 자체적으로 기가스를 만들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1배 급 기가스 정도는 나름 건출한 저력과 자금을 가지고 있는 후작 급 귀족이라면 자체적으로 생산이 가능하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제작단가가 너무 높다. 그냥 시중에 나온 완성품을 사는 게 더 싸게 먹힌다.
어쨌거나 콩탄 왕국은 자체적으로 2배 급 기가스를 생산할 수 있고, 2.5배 급 기가스를 개조해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거기까지가 한계다. 페스로 제국이 보유한 3배 급 기가스의 제작은 아직 머나먼 나라 이야기다. 그럴 만한 기술력도, 자금력도 콩탄 왕국에는 없다.
하지만!
가설을 세워보자.
만약 콩탄 왕국에 3배 급 기가스를 만들 능력이 있다면?
자금도 마련되어 있다면?
과연 그렇다면 만들 수 있을까?
‘힘들다.’
쥴리언은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3배 급 기가스를 생산하고자 한다면 페스로 제국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 페스로 제국이 거의 유일하게 3배 급 기가스를 보유하게 됨으로써 가지게 되는 이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다른 국가가 3배 급 기가스를 보유하기 시작하면 그 이점 상당수가 줄어들게 된다.
더군다나 콩탄 왕국은 페스로 제국의 입김을 강하게 받는 곳이다. 페스로 제국이 그냥 놔둘 리 만무하다. 정치적으로는 군사적으로든 강력한 압박이 올 터.
하물며 페스로 제국을 등에 업어 왕권을 유지하고 있는 필로스 왕이라면 그런 압박이 더 심하게 느껴질 것이다.
대놓고 만들 순 없다.
만들려고 한다면 쉽게 들키지 않는 곳, 은밀하면서도 페스로 제국조차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곳, 상식적이지 못한 곳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
‘이제르트 자작령!’
그런 의미에서 이제르트 자작령은 최고의 장소다.
특히 이제르트 자작가와 필로스 왕 사이의 좋지 못한 관계는 페스로 제국의 의심을 제로에 가깝게 만들어줄 것이다.
쥴리언은 머릿속으로 무언가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가만 생각하면 이제르트 자작가가 그 강력한 빅토리안 공작 휘하의 귀족들을 막는 게 이상했어. 하지만 필로스 전하가 뒤에서 무언가 계획을 세우셨다면 이상할 것도 없지!’
쥴리언은 이제까지 자신이 가졌던 의문이 단번에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착각이다.
그런 쥴리언의 표정을 본 문수르 역시 지금 쥴리언이 굉장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좋았어.’
그러나 그 착각을 문수르가 고쳐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문수르가 기다렸던 착각이다.
“쥴리언 경…… 상황이 시급합니다. 정말 죄송하게도 쥴리언 경에게 내 임무가 무엇인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해하오.”
쥴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문수르가 왕명을 받고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필시 비밀엄수가 중요할 터.
하물며 쿠틀러 백작가를 도와준 것만으로도 이미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 호기심 하나 때문에 문수르를 물고 늘어지는 건 추레한 일이다.
“묻지 않겠소. 하지만 만약 쿠틀러 백작가에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요청하시오.”
“제 몸을 치료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문수르는 미소를 지었다.
쥴리언도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그 둘은 헤어졌다.
3.
쥴리언이 병력 일부를 데리고 왕도로 떠났다.
그가 떠난 후에 문수르 역시 드래곤 파이터를 가지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빌어먹을…… 단전이 망가진 탓에 조종이 힘들군.”
오러를 쓰지 못하는 탓에 드래곤 파이터의 조종이 힘들었다. 그나마 드래곤 파이터니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보통의 기가스였다면 절대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 드래곤 파이터는 로이드의 도움과 자동 조종 장치를 통해 움직이고 있었다.
자동 조종 장치라고 해도 단순한 움직임만 가능하다. 뛰는 것도 불가능하다. 전투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단순히 걸어서 이동하는 것 정도만 가능한 수준이다.
‘젠장…….’
문수르는 상처 입은 단전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동시에 문수르의 눈은 멀티 글라스를 통해 콩탄 왕국의 전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GPS시스템의 정보를 통해 빅토리안 공작의 움직임이 파악됐다.
현재 왕도로 병력이 모이는 중이었다.
“늦어도 일주일 후쯤이면 전면전이 벌어지겠군.”
쿠틀러 백작령에서 왕도까지는 말을 타고 이동하면 5일쯤 걸린다. 드래곤 파이터를 타고 이동하면 좀 더 걸릴 것이다.
“몬스터 군단은 페스로 제국과의 국경 부근에서 움직이고…….”
여기에 움직임이 한 가지 더 있다.
오우거와 자이언트 트롤 그리고 오크로 이루어진 몬스터 군단이다. 이 군단이 가지는 전투력도 어마어마했다.
아니, 전쟁에서는 전력의 질 이상으로 중요한 게 머릿수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몬스터 데스나이트보다는 이 몬스터 군단이 더 위력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제국의 개입을 막겠다는 건가?”
제국의 개입을 막고 흑마법사와의 연관성을 없애기 위해 몬스터 군단을 왕도가 아니라 국경선에 배치한 모양인데…….
“젠장.”
오히려 악효과가 나올 것 같다.
몬스터 군단 자체가 흑마법의 수작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흑마법사의 수작이 페스로 제국의 국경 근처에서 등장했다면 페스로 제국은 어떻게 나올까?
좋은 계기로 삼을 것이다.
콩탄 왕국에 거침없이 전력을 진격시킬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력은…… 빨라야 9일.”
더군다나 빅토리안 공작을 견제할 수 있는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력이 왕도에 도달하기까지는 9일이 남았다.
2일의 시간 차이가 있다.
여기에 제이머스 후작의 결사대가 왕도에 도달하기까지는 빨라도 12일 이상이다.
왕도는 최소 이틀 동안 빅토리안 공작의 공세를 막아야 한다. 그래야만 이제르트 자작가의 1차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가 역시 다시 최소 3일을 버텨야 제이머스 후작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어떻게든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올 빅토리안 공작을 상대로 이틀과 3일이란 시간은 너무 길다.
‘버텨야 한다.’
그걸 어떻게든 버틸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바로 문수르의 역할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나 지금 문수르의 상처는 너무 심각하다. 이걸 고칠 수 방법은 솔직히 하나뿐이다.
엘프들이 신목으로 섬기는 바나푸스 나무의 열매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이제르트 자작령에 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 순간 문수르는 한 가지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로이드…… 혹시 왕도 근처에 엘프 부족이 있을까?”
- 가능성은 굉장히 낮습니다. 혹여 엘프 부족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순순히 열매를 내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런가?”
- 차라리 늦더라도 영지로 돌아가서 상처를 회복하는 게 더 나을 듯싶습니다. 지금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주인님의 상태입니다. 왕도가 함락되도 주인님이 멀쩡하시면 기회는 있습니다. 반대로 왕도를 지키더라도 주인님이 죽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집니다.
로이드의 말이 맞긴 하다.
그러나 문수르는 그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 소중한 건 맞지만, 이번에 왕도가 함락되면 앞으로의 일이 너무 힘들어진다.
도박이라고 해도 승부를 볼 때는 봐야 하는 법이다.
‘정말 없을까?’
그때였다.
“잠깐.”
문수르의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법한 계획이 떠올랐다.
“지금 내 몸이라면…….”
지금 문수르의 몸은 단전이 깨진 상황이다. 때문에 오러를 몸에 담을 수가 없다. 오러를 끌어와도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마냥 금방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오러를 담을 수 없는 거지, 오러 자체를 쓰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런 문수르가 지금 MX시스템의 마나 동력과 공명을 하면 어떻게 될까? 단전이 멀정한다면 강력한 마나 동력의 힘이 다시금 문수르의 단전으로 들어와 다시 온몸으로 퍼지며 문수르의 몸을 터뜨리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단전이 망가진 지금은 오히려 그냥 깨진 단전을 통해서 마나 동력이 빠져 나갈 것이다.
몸은 폭발하지 않는다.
구멍 난 풍선에 아무리 바람을 불어 넣어도 터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평생 단전이 깨진 채로 살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몸이 점차 죽어가기 시작할 테니까.
그러나 잠시 동안은 괜찮을 것이다.
단전이 깨져서 문제가 생기는 건 몸에서 오러가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오러는 생명력이다. 오러 나이트들은 보다 많은 오러를 다루는 것뿐이지, 오러 나이트가 아닌 자들도 오러를 품고 있으며, 생명 유지를 위해 오러가 소모된다.
어쩌면 오히려 지금 MX시스템의 마나 동력과 공명을 하는 게 문수르의 몸에 더 좋을 수도 있다.
마나 동력이 오러를 대신에 문수르의 몸에 생명력을 주입해주는 것이 될 테니까.
그렇다면 이건 기회일 지도 모른다.
이번에만 사용할 수 있는 기회!
- 주인님, 너무 위험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시도는 해볼만하지.”
-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그 어떤 전례나, 사례도 없습니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저로써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잖아?”
- 주인님…….
로이드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러나 반대로 로이드는 강력하게 반대하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수르의 계획은 그럴 듯했다.
특히 문수르가 기절한 이후 로이드는 문수르의 몸을 다시 한 번 점검해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다시금 점검을 해봤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얻은 신체 데이터와 기타 데이터를 방금 문수르가 떠올린 계획에 입력시켜봤다.
충분히 가능하다는 답이 나왔다.
물론 확실한 답은 아니다. 시뮬레이션의 횟수도 너무 적고, 입력한 정보 자체에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간단한 정보만 믿고 주식을 사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정보는 정보 아닌가?
“로이드, 왕도가 무너질 경우…… 이제르트 자작가가 반석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럼 반대로 묻지. 이번에 이제르트 자작가의 결정적 도움으로 왕도를 지켜내고, 빅토리안 공작을 처치할 수 있다면, 이제르트 자작가가 반석에 오르는데 얼마나 걸릴까?”
- 3년 안에는 처리될 듯합니다.
로이드의 대답!
그 대답이면 충분했다.
“그 정도면 도박을 해볼만하지.”
문수르가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