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58화. 무너지는 성벽.>
1.
슈페언 백작의 군대가 콩탄 왕국의 국경을 넘었다.
페스로 제국의 군대가 콩탄 왕국의 국경을 넘은 셈이다. 굉장히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보통 경우라면 이런 걸 선제공격 또는 적습이라고 표현할 것이다.
더군다나 페스로 제국 아닌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쟁을 통한 팽창주의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던 이들이다.
혼전적이고 공격적인 자들.
이제까지 페스로 제국이 써온 전쟁의 역사는 대륙 전쟁의 역사 중 10퍼센트 이상을 차지할 것이다, 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런 그들의 군대가, 강력한 군대가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런 슈페언 백작의 군대를 제지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감히 슈페언 백작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만큼 담이 큰 귀족도 없었고, 혹여 그렇게 담이 크다고 해도 슈페언 백작이 이끌고 온 엄청난 기가스 전력 앞에서 목소리를 높일 만큼 강력한 전력을 가진 귀족들 역시 없었다.
오히려 영지를 방문하는 슈페언 백작의 병사들에게 식수와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발이 땀이 나도록 뛰는 게 콩탄 왕국 귀족들의 현실이었다.
몇몇 귀족들은 속이 썩어문드러졌다.
“젠장, 내가 왜 페스로 제국의 귀족을 위해서, 그것도 우리 왕국에서 군대을 이끌고 온 귀족에게 식량을 바쳐야 하는 거지?”
물론 속으로 하는 말이다.
슈페언 백작 앞에서는 미소를 짓고, 아부를 떨었다.
여하튼 덕분에 슈페언 백작은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슈페언 백작의 군대는 어느 순간 몬스터 군대와 조우했다.
변수의 등장이었다.
2.
“빌어먹을!”
슈페언 백작의 3배 급 기가스가 움직였다. 그의 3배 급 기가스의 표면에는 도금이 되어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슈페언 백작의 3배 급 기가스를 골든 자이언트라고 불렀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기가스다.
도금을 위해 쓴 황금만 해도 작은 영지 하나 가격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심지어 기가스 곳곳에는 큼지막한 보석도 박혀 있다. 루비, 사파이어 등…… 모두 드워프 장인의 솜씨가 깃든 놈이다.
골든 자이언트는 병기라기보다는 예술품에 가까운 놈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골든 자이언트의 모습이 참 끔찍했다. 기가스 본체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도금은 벗겨져 나갔고, 보석 중 일부는 깨져버려 바닥 어딘 가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슈페언 백작은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의 아름다운 이 예술품을 추잡하게 만드는 눈앞의 적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죽어! 죽으란 말이야!”
슈페언 백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기가스에 탑승한 그의 외침에 밖의 병사들에게 또는 기사들에게 전해질 리 만무했다.
그리고 기사들은 지금 슈페언 백작의 상황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기사들 앞에는 무려 30여 마리의 오우거들이 단체로 난리법석을 떨고 있었다.
오우거 한 마리의 능력은 기가스 한 대에 버금갈 정도다. 그런 오우거가 30여 마리나 있었다.
또한 오우거 주변에는 그 머릿수보다 곱절은 많은 수의 자이언트 트롤이 난리를 치고 있었다.
솔직히 자이언트 트롤은 덩치는 기가스만하지만 오우거에 비하면 그다지 강한 놈이 아니다. 자이언트 트롤 두세 마리가 모여야 간신히 오우거 한 마리를 상대할 수 있다. 더군다나 상대할 수 있다는 거지, 이길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다.
기가스 입장에서는 자이언트 트롤이 4마리 이상이 동시에 덤벼들지 않으면 솔직히 무난하게 자이언트 트롤을 잡을 수 있다. 회복력이 문제가 되긴 하지만, 적어도 지진 않는다.
그래도 모이면 무섭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는 백 마리에 가까운 자이언트 트롤이 설치고 있었다.
오우거와 자이언트 트롤, 이들의 합공은 슈페언 백작의 병력들을 기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뿐인가?
오크들이 있었다.
오크들은 기가스에게 감히 덤비지 못한다. 기가스가 그냥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오크 수백, 수천 마리를 학살할 수 있다.
그러나 병사들은 달랐다.
기가스의 보조 또는 전투를 위해 슈페언 백작은 천 명의 사병을 데리고 나왔다.
그 병사들에게 오크들은 무시무시한 적이었다.
기가스가 있을 때야 기가스가 알아서 오크들을 처치해주니, 병사들이 오크들을 신경 쓸 이유가 없지만, 지금 기가스들은 자이언트 트롤과 오우거를 상대하느라 바빴다.
결국 오크들은 병사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오크들의 숫자 역시 적지 않았다. 1만 마리가 넘어가고 있었다.
엄청난 숫자다.
솔직히 처음 이 대군을 만났을 때 꿈이 아닌가, 의심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몬스터가 이렇게 무리지어 다니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오크는 그렇다고 치자. 오크들이야 원래 무리를 지어 활동하는 놈들이니까.
자이언트 트롤도 그렇다고 치자. 놈들 역시 단독으로 움직이기보다는 어느 정도 무리를 지어 다니니까.
그러나 오우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천지에 오우거가 어깨동무를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우거는 그런 놈이다.
같은 종족이라도 자기 영역에 들어오면 가차 없이 물어 뜯고, 죽자살자 싸우는 놈들이다.
그런데 그런 오우거가 식량이나 다름없는 자이언트 트롤, 오크와 함께, 그리고 자기 동족과 함께 군대를 이루어 싸운다고?
믿기 힘든 일이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때문에 그 몬스터 군단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인간이 가진 최고의 무기는 도검(刀劍) 따위가 아니다. 요즘에야 기가스라고 하겠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기가스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 가진 절대적인 무기는 다름 아니라 전술과 전략이란 놈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전략과 전술은 생각 따위와는 거리가 먼 몬스터들을 상대로 인간이 압도적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그러나 지금 몬스터 군단에게는 그런 전술과 전략이 먹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오우거가 다른 몬스터와 같이 협공한다는 걸 염두에 두고 전술이나 전략을 만들지 않으니까.
혹여 만들었다고 해도 그 전술을 병사들에게 연습시키는 기사나 영주는 없다.
굳이 꼽자면 테블스 산을 지키는 이제르트 자작가 정도만이 그런 연습을 시키겠지만…… 적어도 슈페언 백작가와는 연관이 없는 이야기다.
슈페언 백작 휘하의 병사들은 강군이었지만 예상외의 공격에 대항할 만큼의 대처능력을 가진 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병사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으아악!”
“사, 살려줘!”
오크들은 가차 없었다.
놈들은 단숨에 인간들을 도륙하고, 그 자리에서 인간들의 살점을 물어뜯었다.
오크들 대부분이 입에 인간들의 사지(四肢) 하나씩을 매달고 있었다. 거대한 인간의 다리 한 짝을 입에 문 채 다른 먹잇감을 찾는 놈도 있었고, 어떤 놈은 억지로 사지가 잘려나간 몸통을 입에 물고 있는 놈도 있었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그런 오크들의 무지막지함에 병사들은 더 겁을 먹었다.
“방패를 들어라!”
“뒤로 물러나지 마라! 물러나면 죽음이다!”
기가스에 탑승하지 않은 기사들이 어떻게든 병사들을 다독이려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쿠웅, 콰앙!
한편 그런 전장 곳곳에서는 기가스와 오우거 또는 기가스와 자이언트 트롤의 전투가 한참이었다.
긴박한 전투 속에서 기가스 파일럿들은 자신들의 발밑에 있는 병사들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때문에 기가스들의 발에 까려 죽는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기가스 파일럿들은 그런 병사들을 보고도 모른 체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대체 어디서 이런 몬스터 군단이 나온 거야!”
“사악한 흑마법사의 짓이 분명해!”
당장 눈앞의 적에 집중하지 않으면 그들의 목숨이 위험할 상황이다. 병사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제 목숨을 포기할 정도로 기사들의 희생정신은 숭고하지 못했다.
전투는 계속됐다.
긴박한 상황이었고, 갑작스런 상황이었지만 전황 자체는 슈페언 백작 측이 우세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골든 자이언트의 위용은 감히 오우거나 자이언트 트롤 따위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도금은 벗겨지고, 보석은 박살이 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치레에 불과했다.
그 안에 있는 장갑은 오우거가 있는 힘껏 내리쳐도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단단한 금속이었다.
더군다나 골든 자이언트가 휘두르는 대검은 단 칼에 오우거의 몸뚱이를 도륙 낼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그 골든 자이언트를 조종하는 기가스 파일럿, 슈페언 백작은 페스로 제국이 자랑하는 기사 중의 기사였다. 슈페언 백작은 혼자서 십여 마리의 오우거들을 도륙했다.
그를 따르는 기가스 파일럿들 역시 강했다. 어수룩한 자를 수하로 삼을 정도로 슈페언 백작은 사람이 부족한 자가 아니다. 휘하에 인재가 넘쳐서 곤란한 자다.
더군다나 슈페언 백작 휘아의 기가스들은 대부분 2배 급 기가스였다. 오우거와 1대1로 붙으면 무난히 이길 수 있다. 단지 갑작스런 상황이어서 놀란 탓에, 상대의 숫자가 많은 탓에 압도적 우위를 점하지 못했을 뿐이다.
차츰 전장이 정리되어가자 슈페언 백작 측이 유리해지는 건 당연지사.
그러나 슈페언 백작 측이 무조건 유리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번 전투에서 대부분의 기가스들이 적지 않은 마나 동력을 소모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당분간 기가스들은 제 구실을 못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오우거와 자이언트 트롤 그리고 오크들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인간의 군대처럼, 놈들은 상황이 불리해짐을 느끼자 후퇴를 시작한 것이다.
기겁할 만한 일이었다.
특히 오우거가 뒤로 꽁무니를 빼는 광경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맙소사.”
“저게 말이 되는 건가?”
“지금 우리가 헛것을 보는 게 분명해.”
오우거.
놈들은 죽으면 죽었지 절대 적 앞에서 등을 보이거나 꽁무니를 빼는 족속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놈들이 등을 보이고 있다. 혹여 상대가 따라올까봐, 부리나케 도망치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때문에 슈페언 백작 측은 추격전을 벌이지 못했다. 여기서 적의 뒤를 쫓아 그 수를 줄이는 게 좋을 수도 있겠지만 어설픈 추격전을 하다가 피해가 커질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기가스의 마나 동력 상태가 좋지 못했다.
지금은 전력을 추스르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도 슈페언 백작의 기사들은 훌륭하게 상황을 지휘했다. 부상자를 구별했고, 시체는 따로 모았다. 기사들 중 몇 명은 병사들을 이끌고 근처 영지로 향했다. 지원물품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 와중에 슈페언 백작은 기가스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단순히 기분이 상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골든 자이언트는 출력도 출력이지만, 유지 시간도 보통 기가스보다 곱절이나 길다.
다른 기가스들은 휴식을 취해야만 하겠지만, 골든 자이언트는 아직 여력이 충분했다.
혹시 모를 적의 공격, 그에 대비해 가장 전력이 여유로운 슈페언 백작이 최후까지 보초를 서듯, 경비를 서는 건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슈페언 백작이 독단적인 성향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그는 전쟁에서 자기 욕심과 편의만을 위해 주변 것들을 무시하고 희생시키는 폭군은 절대 아니었다.
슈페언 백작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슈페언 백작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시궁창에 빠진 상황이었다.
"흑마법사 놈이야."
슈페언 백작이 모를 리 없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릴 수 있는 건 세상천지에 흑마법사 뿐이다.
더군다나 흑마법사가 부리는 몬스터 군단이 갑작스레 슈페언 백작을 공격했을 리도 만무하다.
"설마 빅토리안 공작, 놈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건가?"
그 순간!
슈페언 백작의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