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4.
밤이 내려왔다.
왕도의 밤은 고요했다. 최근 들어 왕도에 소란이 일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평소보다 더 많은 이들이 왕도 안에 있었다. 더불어 밤중에 경비를 서는 병력은 예전보다 곱절이나 됐다.
그러나 병사들은 고요했다. 머릿수가 곱절이 되었지만, 조용함은 절반이 된 듯했다.
병사들의 눈빛에는 불꽃 비슷한 것들이 가득했다. 왕도의 병사들, 왕의 군대라 할 수 있는 그들은 어설픈 영주들이 육성한 사병들과는 질적으로 급이 달랐다.
기본적인 훈련양 부터가 비교가 불가능하다. 어마어마하다. 훈련을 소화하는 것자체가 굉장히 힘들다. 그 훈련을 소화하지 못해 탈락하는 자가 적지 않다. 혹여 그 힘든 훈련을 통과한다고 해도 실력이 부족한 자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퇴출된다. 어설프게 머릿수만 맞추기 위해 수준 이하의 실력을 가진 병사라도 어쩔 수 없이 채워두는 영주들의 사병들과는 근본자체가 전혀 다르다.
또한 왕도의 병사들에게는 자긍심이란 놈이 있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왕도를 지킨다는 자긍심과 왕을 지킨다는 자부심!
말이 병사지, 기사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진 자들이다.
그런 그들의 경비는 철저했다. 그 누구도 졸린 눈을 비비거나, 잡담을 떠들거나 하는 등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경비들 사이로, 짙게 깔린 어둠 사이로 다크 나이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크 나이트들은 단숨에 외성을 지나, 내성의 성벽을 타고 올라갔다. 어둠을 이루어진 그들의 몸뚱이는 너무나도 쉽게 굳건한 성벽을 타고 넘어갔다.
그때였다.
삐이이이!
귀를 찢을 듯한 경고음이 들렸다. 동시에 성벽을 넘어가려던 다크 나이트이 벼락에 맞은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적습이다!”
“모두 움직여라!”
다크 나이트.
이미 한 번 왕도를 뒤집었던 놈이다. 왕도에 마법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다크 나이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두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온갖 함정 마법을 설치했다. 기가스를 관리하기 위해 존재하는 마법사들이 때아닌 노동에 지쳐 쓰러졌을 정도다.
그래도 다행이다. 그런 마법사들의 노고가 물거품으로 돌아가진 않았으니까.
어쨌거나 그 함정에 다크 나이트가 걸렸다.
함정에 걸린 다크 나이트는 그림자 형태의 몸에서, 기사 형태로 강제 변환되었다. 동시에 감전이 된 듯 움직이지 못했다.
"공격해!"
"창을 찔러!"
성벽 위의 병사들은 경직된 다크 나이트를 사정 없이 찔렀다. 보통 경우라면 병사들의 창은 다크 나이트에 이러다할 상처조차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함정 마법에 걸린 다크 나이트들은 달랐다.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병사들의 공격은 다크 나이트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줬다.
다크 나이트의 몸뚱이에 수십 개의 구멍이 생겼다.
5.
“흥,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왕도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빅토리안 공작은 조소를 머금었다. 상황은 금방 파악이 가능했다.
다크 나이트가 들킨 것이다.
“예상했던 바다.”
당연히 이 정도 상황은 빅토리안 공작도 충분히 파악하고, 인지하고 있었다.
이 정도 대비도 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빅토리안 공작은 슬퍼했을 것이다. 그것 밖에 안 되는 필로스 왕에게 밀려 왕위를 놓치고,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영지에서 숨을 죽였다는 의미니까. 이제까지 살아온 빅토리안 공작의 삶을 처절하게 만드는 일이다.
“좋아.”
그걸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웠다.
다크 나이트가 난리를 치면 좋겠지만, 걸려도 상관없다.
자연스럽게 병력 이동이 보일 것이다.
“지금쯤이면 되겠군.”
그럼 다시 다크 나이트가 움직일 것이다.
2진이 움직이는 것이다.
단순한 논리다. 1진의 다크 나이트가 마법에 걸리면, 자연스럽게 마법은 소모되는 것이다.
그 사이 2진이 넘는 것이다.
단순하다. 정말 이게 가능은 한 일일까? 그런 의문이 들 정도다.
그러나 단순하기에 먹히는 거다.
빅토리안 공작이 마법에 대해 무지할 리 만무하다. 대부분의 방범, 경보 마법들은 일회성이다.
빅토리안 공작의 계획은 통했다. 2진에 배치된 다크 나이트들이 성벽을 넘었다.
삐이이!
그러나 다시 귀가 찢어질 듯한 경고음이 들렸다. 경보 마법이 다시금 발동한 것이다.
왕도의 마법사들도 바보가 아니다. 경보 마법이 일회성이라면 여러 개 설치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경고음 때문에 왕도의 내성의 병사들은 미칠 지경이었다. 귀를 찌를 듯한 소리가 연쇄적으로 고막을 두드렸다.
쿠웅!
그때였다.
마치 지진이 난 듯, 왕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성의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굉음이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마치 메아리의 그것처럼,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습이다!”
적습이란 소리.
“기가스다!”
그 뒤로 기가스란 단어가 꼬리마냥 붙어왔다. 병사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기가스?”
“설마, 기가스가 공격을 온 것인가? 왕도를?”
필로스 왕이 왕위에 오른 이후 왕도는 이제까지 그 어떤 공격도 받지 않았다.
물론 표면적인 이야기다.
암살자가 아주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왕에 대한 불만을 가진 자들은 적지 않으니까.
그러나 의미를 둘 필요가 없을 정도로 허접한 시도가 대부분이었다. 최근 있었던 시도가 거의 유일하게 왕의 목숨을 위협했던 일이었다.
그런 왕도에 기가스가 등장한 것이다.
아군이 아닌 적군이 되어서 말이다.
병사들은 당황했다.
더불어 이 점이 왕도의 병사들이 가진 유일무이한 단점이기도 했다. 왕도는 이제까지 이러다할 공격을 받은 적이 없다. 심지어 몬스터의 공격조차 받은 적이 없다. 공격이 아니라 왕도의 사람들 중에 몬스터를 본 이들조차 극히 드물다.
왕도는 그런 곳이니까.
콩탄 왕국에서 가장 안전한 땅, 평화로운 땅이다.
반대로 말하면 병사들은 전투 경험이 없다.
지독할 정도의 훈련으로 인해 단련은 됐지만, 그뿐이다. 훈련은 훈련이고, 경험은 경험이다.
제 아무리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한다고 해도 실전의 경험을 대체할 수는 없다. 단지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을 뿐이다.
이 차이!
경험이 없다는 것, 진짜 전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
별 문제 없으리라 생각했던 부분이지만, 이 부분은 기어코 틈을 만들었다.
늦은 것이다.
반응이 늦어버렸다.
기가스란 소식을 들었을 때 병사들이 취할 행동은 하나였다.
내성을 침입한 다크 나이트를, 암살자를 처치하는 거다. 기가스는 기가스다. 어차피 병사들보고 기가스와 싸우라고 하는 기사는 없다. 그건 정말 최후의 선택지다. 모든 게 망했을 때, 시간을 끌기 위해 내리는 선택이다.
그러나 이부분에 대해서는 훈련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기가스에 대항하는 법을 배웠다.
최악의 순간에 대비해 병사들로 하여금 기가스의 발을 묶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훈련을 했다.
당연히 기가스란 말을 들었때 병사들의 머릿속에는 다크 나이트의 존재는 사라졌다. 대신에 기가스를 상대하기 위해 필요한 전술들, 전법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 공백!
생각의 공백!
경계의 부재!
다크 나이트는 이 팀을 비집고 움직였다. 대부분의 다크 나이트들이 경보 마법에 걸렸지만 걸리지 않은 놈들도 있었다.
그런 놈들은 더 깊숙한 곳으로, 중요한 인물들이 머무는 곳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렇게 숨어 들어간 다크 나이트에게 더 이상 거치적 거리는 건 없었다.
그림자의 형태에서 기사의 형태로 모습을 바꾼 다크 나이트들은 학살을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저택 한 채, 그 안에 잠을 청하고 있는 이들이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 바닥에 너부러졌다.
비명소리도 없었다.
다크 나이트, 말 그대로 어둠의 기사다. 소란스러운 어둠은 없다. 시끄러운 어둠도 없다.
때문에 놈들의 공격은 은밀하고, 고요하기 짝이 없다.
잘 단련된 기사라면 모를까, 보통 이들은 절대 다크 나이트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다.
아마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내성 내의 저택, 요인 중의 요인들만이 기거하는 곳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건 엄청난 일이었다.
당연히 그 상황을 파악한 기사들은 기겁했다. 어느 백작이 또는 어느 자작 일가 전체가 몰살 당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경비를 책임지는 기사들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다, 당장 병력을 보내! 당장!”
“내가 직접 간다. 모두들 나를 따라오도록!”
“빨리 이 사실을 알려라!”
기사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렸다.
곤란해진 건 병사들이었다. 기사들이 동시에 서너 개의 명령을 내리니, 누구 명령을 따라야 할지 고민이 됐다. 병사들의 몸은 하나였으니까. 병사들이 당황했다.
어영부영, 병사들이 어설프게 머릿수를 나누고 움직였다.
결국 이건 더 큰 피해를 가져왔다.
다크 나이트는 만만한 적이 아니다. 물리적인 데미지로 놈을 처치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마법의 도움 혹은 오러를 제대로 쓸 수 있는 오러 나이트 이상의 실력자가 나서야 그나마 상대가 가능하다.
그런 놈들을 병사들이 어찌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오히려 시체만 늘리는 꼴이었다.
내성을 지켜야하는 병사들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더 심각한 건 기사들은 그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조차 못했다는 것이다.
견고하지 그지없으리라 생각됐던 왕도의 방어는 그렇게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위험한 붕괴는 외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6.
빅토리안 공작가 휘하의 기가스들, 2배 급 기가스들이 왕도의 외성 성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따로 작전은 없었다.
해자를 사이에 두고 기가스들은 가진 대검을 휘둘러 장작을 도끼로 패듯, 성벽을 야금야금 무너뜨리고 있었다.
성벽은 높고, 굳건했고, 두꺼웠지만 2배 급 기가스가 내뿜는 힘 역시 무시할 게 못됐다.
쾅!
대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성벽에서는 돌무더기가 후두두 거친 굉음을 토해내며 떨어졌다.
성벽 위의 병사들은 혼비백산, 기가스의 공격을 피하기 바빴다.
한편 기가스의 등장 소식에 왕도 내부에서 대기 중이던 기가스들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가스에는 기가스로 대항하는 게 유일무이한 방법이다. 다른 전술이나 전법은 무의미하다.
현재 왕도에 모인 기가스의 숫자는 23대였다. 2.5배 급 기가스 1대와 2배 급 기가스가 12대, 나머지는10대는 1배 급 기가스였다. 2.5배 급 기가스를 제외한 모든 기가스가 움직였다.
왕도의 기가스들은 곧장 성벽을 넘어가지는 않았다.
성벽을 넘어가기 전, 먼저 움직인 건 다름 아니라 투석기였다. 성벽을 무너뜨릴 정도로 위력적인 투석기의 돌은 기가스를 무너뜨릴 순 없지만, 적잖은 타격을 줄 수 있다.
특히 장갑의 방어력을 갉아먹는다.
그렇게 방어력이 감소된 기가스와 반대로 멀쩡 기가스가 충돌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더군다나 기가스는 그 스펙이 정해져 있다. 승패의 차이는 결과적으로 방어력에서 나게 된다. 상대편 기가스의 방어력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승산을 가져올 수 있다.
“발사!”
기사의 외침과 함께 큼지막한 돌덩이들이 성벽을 넘어 기가스 머리 위로 떨어졌다.
명중률은 그렇게까지 높진 않았다. 열 개의 돌이 날아가면 개중 하나 정도만이 기가스에 닿았다. 더군다나 성벽 근처에 있는 기가스를 맞추기에는 발사각도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투석기는 쉴 새 없이 돌덩이를 날렸다.
돌덩이는 많다. 투석기도 많다. 멈출 이유가 없었다.
“발사!”
“발사각도를 수정하라!”
기사들의 외침이, 병사들의 신음소리가 왕도를 울렸다.
쾅, 쾅!
그리고 기가스들의 공격이 왕도를 울리고 있었다.
밤은 이제 막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