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56화. 왕도로 향하다.>
1.
쿠웅!
굉음과 함께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쭉한 창을 들고 있는 거인은 투박한 움직임을 보였다.
쏜살처럼 날아왔던 거인의 몸이 멈췄다.
거인이 잠시 침묵했다.
침묵한 거인은 마치 주변을 둘러보는 것 같았다. 먹이를 찾는 것일까? 아니면 쉴 곳을 찾는 것일까?
하지만 주변 상황을 봤을 때 먹이를 찾는 것도, 쉴 곳을 찾는 것도 어려울 듯했다.
주변은 폐허였다.
거대한 성벽은 한쪽 면이 허물어져 있었다. 처참하게 그리고 구차하게. 무너진 성벽의 벽돌이 해자 위를 가득 채웠다.
인기척은 없었다.
무너진 성벽 너머로 보이는 건물들은 죽어 있었다. 그 어떤 생명체의 움직임, 숨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귀신들의 세상 같았다.
거인은 그런 귀신들의 세상 속에 발을 내딛었다.
쿵!
거인의 박소리가 울렸다.
크게 울렸다.
그 큰 소리가 귀신들을 깨웠다.
시체를 파먹고 있던 귀신들이 거인의 방문에 고개를 들었다. 묵직한 갑옷을 입은 귀신들이 섬뜩한 검을 꺼내들어 높이 들었다.
2.
문수르는 두 눈을 감았다.
“전멸이군.”
알고 있었다.
쿠틀러 백작령에 오기 전에 이미 GPS파일럿이 쿠틀러 백작가를 감시하고 있었다.
때문에 쿠틀러 백작령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았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30여 기의 몬스터 데스나이트의 공격은 무지막지했다. 마치 성난 바다가 내뿜는 파도 같았다. 거침이 없었다.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다. 문수르는 소름이 돋았다.
과거가 떠올랐다.
100여 기가 되던 몬스터 데스나이트를 마주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땐 목숨을 걸고 싸웠다. 싸움에 집중하느라, 전투에 몰입하느라 공포 따윈 없었다.
만약 그때 거기서 몬스터 데스나이트가 성벽을 넘었다면, 과연 그랬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한 광경.
그 광경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서 펼쳐졌다.
문수르는 이를 물었다.
“아주 갈 데까지 가는군.”
처참하게 무너진 쿠틀러 백작령.
그리고 해가 떴을 무렵, 몬스터 데스나이트들은 사라졌다. 다시 해가 가라앉았을 때 놈들은 다시 등장했다.
천만다행.
놈들은 태양 아래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그 사실이 문수르에게…… 아니, 콩탄 왕국에게 유일무이한 희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문수르가 쿠틀러 백작령에 도달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문수르가 쿠틀러 백작령에 도착했다.
긴 말은 필요없다.
문수르는 와이어를 잡아당겼다.
후웅!
기가스가 문수르의 명에 따라 움직였다.
3.
빅토리안 공작은 하늘을 봤다.
밤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새카맣기 그지없었다. 달빛조차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훌륭한 밤이다.
“후후후.”
빅토리안 공작의 코에서 절로 노래가 나올 정도로 훌륭한 밤이었다.
이보다 더 멋진 밤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쿠틀러 백작가가 무너지고…… 그 후에 무너지는 건 제이머스 후작가.”
빅토리안 공작의 머릿속에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의 정치적 숙적들의 얼굴이었다.
몇몇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제르둔 후작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 부분에서 빅토리안 공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딸년을 찾지 못한 게 문제군.”
나탈라 제르둔.
그녀를 놓쳤다.
“아직도 모르겠군. 어떻게 도망친 거지?”
그때 분명 제르둔 후작가 일가를 데려다가 가둬두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제르둔 후작가의 딸이 도망을 쳤다.
철두철미하게 감시를 했음에도 말이다.
그 사실이 가끔 빅토리안 공작의 가슴을 철렁이게 만들었다. 적어도 좋은 징조는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아히만트 백작…….’
그러나 나탈라 제르둔에 대한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빅토리안 공작의 머릿속에 아히만트 백작, 그가 떠오른 탓이다.
최근 두 장의 편지가 왔다.
하나는 슈페언 백작이 보낸 편지다. 당연한 일이었다. 필로스 왕의 편에 선 슈페언 백작은 빅토리안 공작의 행동을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온갖 위협적인 문장이 섞인 편지가 날아왔다.
두 번째는 아히만트 백작이 보낸 편지였다. 잘하고 있다고, 온갖 칭찬과 감언으로 치장된 편지였다.
두 편지 모두 빅토리안 공작의 심기를 뒤틀리게 만드는 편지였다.
슈페언 백작은 물리적 행사에 나설 분위기였다. 아니, 조만간 나설 것이다. 필로스 왕은 어수룩한 자가 아니다. 빅토리안 공작의 행동을 눈치 채고 슈페언 백작에게 원조를 요청했을 것이다.
반면 자신의 뒤를 봐주겠다는 아히만트 백작은 칭찬 뿐이다. 사정을 모를 리가 없는데 그저 감언으로 모든 걸 계산하려고 한다.
“흥.”
아히만트 백작, 그는 조금의 도움도 주지 않고 있다.
그가 부추겨서 빅토리안 공작이 이렇게 승부수를 던졌음에도 말이다.
“빌어먹을 제국.”
물론 어차피 원조를 해준다고 해도 거절할 생각이었다. 빅토리안 공작에게는 카라카크라는 흑마법사가 뒤에 있으니까. 어설프게 도움을 받으면 오히려 큰일이 난다.
그러나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게 그리 쉽게 움직이는 게 아니지 않은가?
나름 기대했다.
아히만트 백작이 기세 좋게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한 이상, 그에 걸맞은 대우를, 태도를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다.
제 아무리 콩탄 왕국이 페스로 제국의 딸랑이라고 해도, 빅토리안 공작은 왕국의 공작, 귀족들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우두머리다. 반면 아히만트 백작은 제 아무리 제국의 백작이라고 해도 결국 백작이다. 백작이란 작위는 공작 또는 후작 위의 작위와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그런데!
그런 차이가 있음에도 아히만트 백작은 빅토리안 공작에게 그 어떤 대우도 해주지 않는 것이다.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단순히 아히만트 백작에게만 화가 나는 게 아니다.
제국!
그 자체에 화가 나는 거다.
‘필로스, 너 때문이다.’
콩탄 왕국이 페스로 제국의 속국 처지가 된 건 페스로 제국의 힘을 빌어 왕위에 오른 필로스 왕 때문이다.
결국 필로스 왕이 콩탄 왕국의 위치를 격하시켰다.
‘그래, 나는 바로 잡는 것뿐이다.’
빅토리안 공작이 왕위에 올랐다면, 페스로 제국의 개입은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잡는 거다.
왕위에 올라 페스로 제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오롯한 콩탄 왕국을 세우는 것이다.
‘내가 할 것이다.’
빅토리안 공작은 자신했다.
자신이라면 제대로 된 콩탄 왕국을, 과거 페스로 제국마저 긴장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강인했던 시절로 돌릴 수 있다고!
‘그래, 내가…… 내가 할 것이다.’
공작은 그렇게 주문을 외우듯, 그 말을 되새김했다.
4.
문수르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전장에 등장하진 않았다. 문수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몬스터 데스나이트, 놈들과 이미 싸워본 경험이 있다.
‘해가 뜨는 시각.’
지금으로부터 해가 뜨기 까지 2시간 44분이 남았다.
문수르는 몬스터 데스나이트의 움직임을 계산했다. 놈들은 해가 뜨기 2시간 30분 전 무렵부터 후퇴를 한다. 그리고 해가 뜨는 시간 동안은 활동을 자제한다.
문수르는 그 점을 파고 들었다.
태양이 뜨는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다.
‘잡는다.’
자연스럽게 문수르의 공격은 전면전이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장기전 형태를 띄었다.
창을 이용해 상대를 찌르기보다는 밀었다.
창을 휘둘러도 상대를 베기보다는 후려쳤다.
거리를 벌리고, 공간을 확보했다.
‘MX시스템이 있어서 다행이다.’
사실 기가스를 가지고 장기전을 벌인다는 건 결코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
생각?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 어떤 전술가도 기가스를 가지고 장기전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기가스의 마나 동력원에는 시간 제약이 크다. 그리고 혹여 대단한 마나 동력원이 있다고 해도 파일럿의 체력이 문제다.
제 아무리 기가스의 마나 동력이 여유가 있어도 파일럿의 체력이 바닥이 나면 의미가 없다.
그러나 문수르는 아니다.
오러 마스터인 그는 체력적으로 지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기가스인 드래곤 파이터에 탑재된 MX시스템은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 공급이 가능하다.
최고의 조합!
그리고 로이드를 통해 구상한 최상의 시기!
무엇하나 문수르에게 불리한 건 없다.
이것이 바로 문수르가 30여 기가 넘는 몬스터 데스나이트들을 향해 홀로 덤빌 수 있는 자신감의 근거였다.
후웅, 후웅!
그 자신감은 드래곤 파이터가 휘두르는 창을 통해 거침없이 표현됐다.
거침없이 움직이는 문수르의 창 앞에 몬스터 데스나이트는 쉽게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그래도 몬스터 데스나이트들은 기사 답게, 단독으로만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점차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한 겹의 포위망을 형성했고, 그 위에 다시 한 겹의 포위망을 더 형성했다.
어떻게든 문수르를, 드래곤 파이터를 놓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문수르는 그런 몬스터 데스나이트들의 움직임을 반겼다.
“좋아, 나야 이렇게 덤벼주면 고맙지.”
그 순간.
- 전술적으로 위험합니다.
로이드가 태클을 걸었다. 이제까지 작전 계획 수립 대부분의 관여한 로이드가 위험하다고 말한 것이다.
“걱정 마.”
그 이유는 간단하다.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지금 문수르는 로이드가 시뮬레이션을 한 계획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포위당하는 건 작전에 없었다. 어디까지나 계획은 치고 빠지기, 드래곤 파이터의 훌륭한 기동력을 이용한 전투였다.
어째서일까?
문수르는 어째서 위기를 감수하면서까지…… 그것도 기존에 자신 역시 합의했던 로이드의 계획을 무시하면서까지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일까?
‘막아야 한다.’
그건 다름 아니라 문수르가 필사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문수르가 느끼는 압박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30여 기의 몬스터 데스나이트가 주는 압박감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빅토리안 공작과 흑마법 그리고 제국.
이 세 가지가 조합됐을 때 나타나게 될 반응은 문수르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이래 뵈도 문수르는 판타지 소설 작가다. 이제는 누구나 인정하는 정치가, 행정가, 기사가 되었지만, 판타지 소설 작가로 살아가면서 얻은 능력, 가치관은 쉽게 변해는 게 아니다.
문수르는 무의식적에 조합했다
자신이 소설가라면, 지금 이 상황, 빅토리안 공작의 반역과 흑마법이란 소재 그리고 페스로 제국의 존재를 둔다면, 과연 어떤 스토리를 짜낼 수 있을까?
경악할 만한 스토리가 나왔다.
‘콩탄 왕국이 무너질 지도 몰라!’
콩탄 왕국의 몰락!
최악의 경우다.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때 문수르가 느끼게 될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콩탄 왕국은 번듯해야 한다. 콩탄 왕국이 번듯하게 유지 되어야만 이제르트 자작가가 존재할 수 있으니까!
쉽게 말해서 지금 이제르트 자작가의 본질이, 근원 자체가 위협 받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서 어떻게든 데스나이트 중에 10여 기 이상은 작살을 내야해.”
- 무리입니다.
“아니야. 가능해.”
물론 단순히 압박감에 짓눌려 판단을 잘못한 건 아니었다.
문수르, 그 역시 나름 숨겨둔 카드가 있었다.
“지금 나라면…… 가능할 거야.”
문수르.
그가 지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