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184화 (182/293)

184화

6.

모든 준비가 끝났다.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롤로이는 다시금 제이머스 후작령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제이머스 후작에게 선물할 몇 가지 것들은 수레 하나면 전부 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여기에 호위를 위한 병사 7명과 일꾼 3명이 추가됐다. 총 12명의 인원이 구성됐다.

조촐한 인원이다.

제이머스 후작을 찾아가는 것치고는 많이 조촐하다.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가 입장에서는 최선이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어디까지나 제이머스 후작을 돕는 귀족이지, 그의 신하가 아니다. 때문에 곡식들을 가득 가지고 바칠 이유가 없다. 자연스럽게 짐이 줄어들게 된다.

짐이 줄어들면 호위 병력도 줄어든다. 짐이 적은데 오히려 병력을 늘리면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가뜩이나 병력 한 명이 아쉬운 이제르트 자작가의 상황을 봤을 때 최대한 병력을 줄이는 게 맞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문수르와 롤로이, 이 둘만 이동하고 싶다. 외부 간섭도 없고, 주변 눈치 볼 것도 없고, 호위 문제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최소한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적당한 숫자를 채운 것이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났다.

“문수르 경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 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떠나기에 앞서, 롤로이와 문수르가 짧게 인사를 나눴다. 사실 앞으로 계속 두고 볼 사이니, 굳이 나눌 필요가 없는 인사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떠나는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 이제르트 자작이 나왔다. 이제르트 자작은 말없이 문수르와 롤로이 일행을 바라봤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어차피 전날, 그 전날 이미 많은 말을 나눈 사이인데. 더 이상의 대화는 사치고, 낭비다.

그래도 예의상 한 마디는 해야겠지. 주변에 보는 눈도 있으니.

“잘 다녀오게.”

이제르트 자작이 짧게 인사를 건넸다.

문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인사가 섭섭하진 않았다. 이제르트 자작의 심정 정도는 얼마든지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응?’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갑작스런 상황에 모두가 긴장했다.

이제르트 자작령이란 그런 곳이다.

긴급한 일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몬스터의 침입이 있을 수도 있고, 흑마법사가 등장할 수도 있다.

영지를 떠날 때까지 긴장을 풀 수가 없다.

‘이리아 아가씨로군.’

그러나 이내 오는 이의 얼굴을 확인한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아 이제르트였다.

그녀가 달려오고 있었다.

‘다행이군.’

그 모습에 문수르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녀는 뛰는 건 커녕, 제대로 두 발로 서있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뜀박질을 한다. 더 이상 그녀의 모습에 나약함과 초라함은 없다.

그런 그녀를 일으켜 세운 게 문수르다.

직접 그녀의 가슴을 가르면서, 문수르가 제 손으로 그녀를 설 수 있게 만들었다.

이리아는 열심히 뛰었다.

그녀는 문수르 앞까지 뛰어왔다. 계속해서 뛰어오는 그녀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하지만, 그 어떤 기사들도 그녀를 제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그녀가 이제르트 자작을 스쳐갔다.

그때에도 그녀의 달리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문수르를 향해 달려갔다.

‘아!’

그 순간 문수르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갔다.

생각은 짧았다.

그건 기습이었다.

오러 마스터 문수르조차 감히 예상치 못한, 때문에 감히 피할 수 없는 습격이었다.

이리아의 입술이 문수르의 입술을 포갰다.

시간이 흘렀다.

하나, 둘…….

이리아는 고개를 빼지 않았다. 문수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셋, 넷…….

그리고 서로의 숨이 한계에 도달했을 무렵, 이리아는 조심스럽게 포개진 제 입술을 땠다.

“저, 저는…….”

그제야 그녀는 떨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은 화살이 되어 그녀의 온몸을 관통하기 시작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얼굴을 붉게 만들었고, 무언가를 해냈다는 사실에 대한 성취감에 온몸을 떨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질 문수르의 말 앞에선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의 그것처럼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반면 갑자기 폭풍처럼 스치고 지나간 입술 위의 여운에 문수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한 채 그저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8.

롤로이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님이 문수르 경을 사모했구나.’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영주의 딸이 훌륭한 기사를 사모해,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로맨스는 이미 질리도록 사용된 소재다. 비단 소설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영주의 딸과 기사가 결혼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특히 보잘 것 없는 영지의 영주와 실력 좋은 기사의 만남에선 더더욱 그런 경우가 자주 보인다.

영주 입장에서는 뛰어난 기사를 딸을 주고라도 잡고 싶어 한다. 적어도 그냥 기사보다는 사위가 더 친근하고 다루기 쉬우니까.

기사 입장에서도 귀족가문의 여인과 결혼을 하는 건 나쁠 것이 없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보통 준귀족이다. 말 그대로 귀족에 준하는 위치지, 귀족이 아니다. 그들이 가진 기사 작위는 계승이 안 된다. 또한 영주와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다.

이런 건 비단 기사와 영주 사이의 일만이 아니다.

더 크게, 더 넓게 보자.

왕가의 경우에는 왕녀의 혼인은 그 무엇보다 유용한 정치적 카드로 활용된다.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에게 있어 혈육의 혼인이란 건 지도자의 역량과 능력을 평가할 잣대이기도 했다.

‘아버님은 반대하지 않으시겠지.’

이제르트 자작은 이리아와 문수르가 만약 혼인을 한다면, 절대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쌍수를 들고 반길 것이다.

이리아는 이미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그 부끄럼 많은 누이가 문수르에게 먼저 입을 맞췄다.

남은 건…….

‘문수르 경의 마음이 문제군.’

문수르다.

문수르가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문수르가 원한다면, 그는 이제르트 자작가의 사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가 무엇인가?

이제르트 자작가 전체가 나서서 축복을 내리겠지.

‘그런데 지금 문수르 경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문수르.

그러나 지금 문수르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황이었다.

9.

이리아 이제르트.

솔직히 문스르에게 그녀는 딸아이 혹은 사촌동생 같은 존재였다. 연심을 품을 대상은 결코 아니었다.

‘내게 문제가 있는 건가?’

문수르,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오해를 살만한, 문제를 살만한 행동을 한 건가?

아니면 이리아 이제르트의 치기 어린 사랑인 것일까? 한 여름 밤의 꿈같은?

‘아니, 그보다 어떻게 해야 하지?’

더 큰 문제는 앞으로의 일이다.

‘거절해야지.’

문수르는 다른 세계 사람이다. 그는 언제까지나 케르빈 월드에 남을 수는 없다.

이리아를 사랑한다고 해도, 함부로 결혼을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결혼을 배제한 채 그저 인조이 형식으로 만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이야기 아닌가?

거절해야 한다.

거절하는 게 맞다.

‘하, 하지만…….’

거절하는 순간 이리아가 지을 표정이 눈앞에 선명했다. 가뜩이나 부끄럼을 많이 타는 그녀가 정말 큰 각오를 하고 입맞춤을 시도했다. 그런 그녀의 각오가 그저 한 여름 밤의 꿈같은 치기로 보이진 않는다.

정말 거절하는 게 최선인가?

문수르가 고뇌를 시작했다.

그때였다.

“문수르 경.”

“예?”

“너무 심각하신 것 같아서 말을 걸어봤습니다.”

롤로이 이제르트, 그가 문수르의 고뇌를 깨고 들어왔다. 롤로이의 물음에 문수르는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좀…… 혼란스럽습니다.”

“제 누이가 싫으십니까?”

“그, 그건 아닙니다.”

“그럼 문제가 있나요? 아버님께서 누님과 문수르 경의 사이를 절대 반대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롤로이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제게 말씀하세요.”

눈빛을 빛내는 롤로이.

그 역시 영지를 보고 알았다. 이제르트 자작가에는 문수르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문수르가 이제르트 자작가의 사위가 된다면, 나쁠 건 전혀 없다.

오히려 이번 여행길에 어떻게든 문수르와 이리아 사이를 가깝게 만드는 게 롤로이의 역할일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문수르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남매 덕분에 지루할 틈은 없을 듯하다.

10.

어둠이 깔렸다.

콩탄 왕국의 왕도는 고요했다.

왕이 잠을 청하는 곳이다. 왕이 잠을 청해야 하는 시각, 왕도는 그 어떤 소란도 용납지 않았다.

그 고요함을 비집고 무언가가 움직였다.

스르르!

얼핏 보면 그림자가 출렁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눈이 좋지 못한 이는 헛것을 봤다고 착각할 정도다.

그림자는 빠르게 움직였다.

왕도를 스쳐 지나갔고, 단숨에 내성 안으로 들어갔다.

화르륵!

내성은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틈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병사들의 사이사이에는 횃불이 활활 타올랐다. 그 어디에도 사각이라 할 만한 장소는 없었다.

이런 장소를 뚫고 가는 건 가능하다.

강력한 힘과 기술이 있다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들키지 않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이런 장소를 물흐르듯 지나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밤중에 깔린 그림자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림자의 움직임을 눈치 챈 사람조차 없었다.

그림자는 단숨에 내성 안으로 들어갔다왕이 살아가는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택 받지 못한 자는 평생을 소원해도 바라볼 수도 없는 그 땅에 그림자가 도달했다.

이쯤 되면 그림자의 목표는 분명하다. 적어도 왕도 관광 따위가 목적은 아닐 것이다.

스스스!

그림자는 계속 움직였다.

목적지는 하나, 바로 왕의 침실이다.

츠츠츠!

그림자는 빠르게 그러나 은밀하게 움직였다. 왕의 침실을 향해서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그때였다.

삐이이이이!

귀를 찢을 듯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적이다!”

“적이 침입했다!”

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목청을 높였다.

순식간이었다.

왕의 숙면을 위해서 고요함을 간직했던 왕성이 자잣거리보다 더 시끄러워졌다.

곳곳에서 목소리가, 괴성이 터져나왔다.

쿵쿵쿵!

순간 굉음과 함께 지진이 난 듯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땅울림의 정체는 다름 아니라 기가스였다.

슈우, 슈우!

대기 중이던 기가스가 적습이란 소리에,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움직였다.

보통 영지라면 적이 확실히 파악되기 전까지, 확실하게 파악된 적이 기가스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결단코 기가스를 움직이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영지 내에서, 그것도 내성 내에서 기가스를 움직인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재산 피해를 일으키니까. 기가스가 그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고가의 저택들과 예술품들이 박살이 아니니까.

그러나 왕도에는 그런 개념이 없다.

왕도가 무너지더라도!

설사 왕성이 파괴가 되더라도!

왕을 지키면 된다.

왕만 있으면, 그 왕이 서 있는 땅이 곧 왕도가 다름없다.

때문에 기가스들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기가스들은 앞을 가로 막는 것들을 전부 때려 부수며, 최단거리로 왕을 향해 움직였다.

그 순간 그림자가 슬그머니 제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니라 다크 나이트, 흑마법사의 사악한 생명체가 왕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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