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183화 (181/293)

183화

<54화. 급변.>

1.

롤로이 이제르트는 마차 밖으로 보이는 이제르트 자작령의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정말 아버님이 영지인가?’

아직도 기억한다.

페르코 아카데미에 가기 위해 이제르트 자작령을 떠날 당시, 롤로이는 마차조차 제대로 구하지 못해 도보로 이동했다. 물론 그 당시 이제르트 자작가는 그래도 어느 정도 여력이 있었다. 롤로이가 원해서 이제르트 자작이 조금 무리를 했다면 마차 한 대 정도는 충분히 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롤로이는 원치 않았다.

멀쩡한 두 다리가 있고, 튼튼한 몸이 있는데 굳이 마차를 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편의를 위해 아버지의 시름을 더 깊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막되 먹을 불효를 저지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걸어서 영지를 가로 질렀다.

그리고 영지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왔다. 이제르트 자작령은 궁핍했고, 초라했고, 궁상맞았다. 영지민의 얼굴에는 언제나 근심걱정이 어렸다. 그리고 영지민들의 행동에는 힘이 없었다.

마치 죽어가는 시체마냥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렸다. 차라리 시체가 나을 때도 있었다. 시체는 적어도 죽음의 공포로부터는 자유로울 테니까.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몬스터에 대한 공포는 그 자체만으로도 영지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꿈도 희망도 없는 땅이었다.

그래도 영주의 자식이라고, 자기들 먹을 것도 없으면서 어떻게든 롤로이 앞에 그럴싸한 식탁을 마련할 때면 가슴이 아팠다.

다짐했다.

페르코 아카데미에 돌아가서 모든 지식을 습득할 것을, 그 지식으로 자신의 영지를 그 어느 것보다 훌륭한 땅으로 만들기를.

언제나 꿈꿨다.

웃음이 넘치고, 활기가 넘치는 영지와 영지민의 모습을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 꿈이 현실이 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문수르 경.’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문수르가 있다.

마치 하늘의 신이 이제르트 자작가를 보살피기 위해 보낸 것 같은 자, 구세주나 다름 없는 자.

그로 인해 이제르트 자작령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아마 그 어떤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변화이며, 성공일 것이다.

롤로이는 그 모든 과정을 아버지인 이제르트 자작과 누나인 이리아 이제르토부터 들었다.

사실 그래도 솔직히 제대로 실감은 가지 않았다. 편지를 통해서만 전달 받은 탓에 확실한 느낌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보니, 오히려 글로 접했던 것들이 초라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가슴이 뿌듯했다.

넘치는 풍요로움, 넘치는 활기!

‘먼 훗날…….’

그리고 그 넘치는 활기와 기쁨은 어느 순간 묵직한 돌덩이가 되어 돌아왔다.

‘먼 훗날 이 평화를 내가 지켜야 한다.’

롤로이.

아직 어린 그는 이미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2.

롤로이 이제르트의 귀환.

아직 이른 귀환이었지만, 이제르트 자작가는 차기 영주의 귀환을 열렬하게 환대했다.

내성과 외성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이제르트 자작이 이러다할 말을 전하지 않았음에도 소식을 들은 영지민들이 알아서 준비를 했다.

길을 깨끗하게 청소했고,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어떻게든 좋은 모습으로, 보다 깨끗한 모습으로 롤로이 이제르트를 맞이하고자 한 것이다.

참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영지민들이 나서서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것,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

영주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뿌듯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르트 자작은 실제로 감상에 빠졌다. 그는 분주한 성의 거리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변했구나.’

많은 게 변했다.

몰라볼 정도로 변했다.

그리고 너무나 훌륭하게 변했다.

‘내 능력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물론 알고 있다.

이 모든 게 본인의 능력이 아니라 문수르 덕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 이제르트 자작은 반성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알았다. 다른 영주들이라면 그저 하늘에서 떨어진 기쁨와 재물에 취해 정신을 잃어버리겠지만, 이제르트 자작은 어떻게든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고뇌하고, 노력하고, 공부했다.

“그래도 롤로이, 그 아이를 웃으면서 반길 수 있으니, 더 이상 기쁜 일이 없구나.”

하지만 아버지다.

영주이기 이전에 자식을 둔 아버지의 입장으로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도 뿌듯했다.

롤로이를 페르코 아카데미에 보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던가?

아버지가 되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그런 아버지를 위해서 싫은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던 롤로이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뿌듯했고 동시에 가슴이 저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위풍당당하게, 부족한 점은 있지만 적어도 웃으면서 아들을 반길 수 있었다.

“그래, 오너라, 아들아.”

이제르트 자작은 미소를 지었다.

영지민들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 순간, 단 한 명 만이 미소를 짓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문수르였다.

3.

문수르는 롤로이 이제르트의 방문 날짜가 다가올 때마다 머릿속이 복잡해짐을 느꼈다.

롤로이와의 만남이 처음은 아니다. 페르코 아카데미에서 이미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롤로이와 같이 제이머스 후작령으로 가는 게 두려운 것도 아니다. 롤로이는 충분히 이제르트 자작의 대리인이 될 만한 능력과 성품 그리고 지식을 가지고 있다. 어느 영지의 망나니 자식처럼 밖으로 데려가는 것 자체에 겁을 먹을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일 뿐이다. 케르빈 월드에는 그런 망나지 영주 자식이 넘쳐난다. 아니, 영주 본인이 망나니나 다름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후우, 솔직히 얼굴 보기 겁나는군.’

외적으로 봤을 때 문수르가 롤로이를 어려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결국 이유는 내적에 있다.

‘차후 이제르트 자작을 견제할 집단을 만들어야 하는데…….’

문수르의 계획.

이제르트 자작가의 부흥 이후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가를 견제할 집단을 만들 생각이 있었다.

엘프와 드워프를 주축으로 세력을 만들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부흥, 더 나아가 케르빈 월드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이제르트 자작가에 모든 걸 맡길 수는 없으니까. 이제르트 자작가가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바로 잡아주고, 견제할 수 있는 세력!

결과적으로 롤로이 이제르트는 영지 운영에 나름 제약이 따를 것이다.

솔직히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다. 더불어 문수르는 이 부분에 대해서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정말 자신이 그렇게 해도 좋은 것일까?

물론 이뿐만이 아니다.

‘가르쳐야 하는데…….’

이번 여행에서 문수르의 역할은 롤로이를 보필하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건 부수적인 것이다. 더 중요한 일은 롤로이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가르쳐야 할 건 너무 많다. 그러나 롤로이의 가치관과 생각, 나이, 지식수준을 고려해서 단계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롤로이가 이제르트 자작처럼 모든 것을 무리 없이 받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쓰리다.

“일단 얼굴은 봐야겠지.”

문수르의 깊어지는 한숨.

그 시름은 롤로이가 도착하늘 날까지 이어졌다.

4.

두 번째 만남.

말 그대로다.

페르코 아카데미 이후 두 번째 만남이다. 그 외에는 솔직히 이러다할 설명을 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알고 있고, 나름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뿐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두 번째 만남에서 문수르와 롤로이 이제르트는 서로를 향해 어떠한 감정을 느꼈다.

문수르는 사명감을 느꼈다.

‘내가 롤로이, 이 소년을 바로 세워야 한다.’

어렴풋하게 느끼던 감정에 확신이 섰다.

롤로이도 비슷한 사명감을 느꼈다.

‘내가 믿고 따라야 하는 자다.’

페르코 아카데미에서는 몰랐다. 그냥 대단한 사람, 영지의 귀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평생을 믿고 따르고 배워야 하는 사람! 선생, 그보다 더 대단한 사람으로 보였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바뀌는 순간, 그 둘 사이로는 묘한 침묵이 깔리기 시작했다.

부담스럽고, 무거운 침묵이 아니었다. 침묵을 틈 타 서로가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침묵.

“둘이 초면은 아니지 않은가? 왜 그리 어색하게 마주보고 있는가? 안으로 들어가지.”

그 사이로 이제르트 자작이 들어왔다.

이제르트 자작은 둘 사이에서 이루어진 교감일 파악하지 못했다.

“예.”

문수르는 미소를 지으며 이제르트 자작의 말에 대답했다. 롤로이는 아버지를 향해 인사를 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이제르트 자작은 대답 대신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문수르가 입을 열었다.

“식사를 준비해뒀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거기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대적인 환영식을 공식적으로 준비하진 않았다. 대신에 적당한 수준의 만찬을 준비해뒀다.

물론 이제르트 자작의 담백한 성정을 생각하면, 적당한 수준이 아니라 과한 수준의 만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롤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독이 없는 건 아니다. 페르코 아카데미가 위치한 왕도에서 이제르트 자작령까지의 거리는 짧지 않다. 또한 일정이 급하게 잡혔다. 갑작스런 부름에 다급하게 짐을 챙겨 이제르트 자작령까지 왔다.

그러나 여독을 핑계로 휴식을 취할 순 없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와 가족.

또한 여기 놀러온 게 아니다. 휴가를 온 것도 아니다. 굉장히 중요한 일, 제이머스 후작과의 만남에 있어 이제르트 자작가를 대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다.

사실 식사할 시간도 없다.

당장 전후사정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그걸 숙지해야 한다.

그 사실을 롤로이는 제대로 자각하고 있었다.

5.

식사 자리에는 이제르트 자작과 이리아 그리고 롤로이, 여기에 추가로 문수르.

딱 넷 만이 참석했다.

다른 이들은 따로 마련된 장소에서 만찬을 즐기는 중이었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면 기쁨이 배가 되겠지만, 사실 이제르트 자작가에 그럴 여유는 없었다.

내일모레, 곧바로 제이머스 후작령으로 가야 한다.

그냥 가는 게 아니다.

“가장 먼저 내가 네게 해줄 말은 하나다. 문수르 경을 신뢰해라. 그러나 맹신하지 마라.”

잘 차려진 음식들.

그 음식들과 오랜 만에 만난 아들을 앞에 두고 이제르트 자작은 굉장히 진지하면서도 묵직한 어조로 충고를 내뱉기 시작했다.

먹는 음식이 목이 아니라 심장으로 파고들 정도로 분위기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롤로이는 그런 분위기를 담담하게 받아냈다.

“명심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해줄 말은 절대 예의를 잃지 마라. 이제르르트 자작령을 벗어난 이후부터 롤로이, 너는 이제르트 자작의 대표이자, 얼굴이다. 내 행동이 너 하나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르트 자작 전부를 표현하게 된다. 내 그릇된 행동 하나에 네가 아닌 너를 믿고 따르는 영지민들이 고통을 겪게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해줄 말은 절대 화를 내지 마라. 이것은 정치다. 무엇보다 왕국의 미래가 걸린 정치다. 네가 순간을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것으로 영지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제 아무리 구하고, 처참해도 참아라. 절대 화를 내지 마라. 그 누가 도발을 하더라도 웃어라. 오물을 맞더라도, 칼에 찔리더라도 웃으면서 죽어라.”

“예.”

식사를 하면서 나누기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대화.

그러나 꼭 필요한 대화였다.

‘강하게 키우시는군.’

문수르는 부자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끼어들 이유도 없었고, 끼어드는 건 예의도 아니었다.

조용히 들었다.

이제르트 자작의 충고는 끊나질 않았다. 식사가 끝에 다다를 무렵까지 계속됐다.

롤로이 역시 그런 아버지의 충고에 조금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리아가 굉장히 불편해 했다. 그녀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 순간 문수르와 이리아의 눈빛이 부딪쳤다. 문수르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힘드신가 보군.’

힘 내세요, 그런 의미를 담은 눈빛.

그 눈빛에 이리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때까지 몰랐다.

문수르는 자신의 그 눈빛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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