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5.
메르디아 삼왕녀가 문수르를 찾아왔다.
예상외의 방문이었다.
“왕녀님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최근 메르디아 삼왕녀는 폐욤 족장으로부터 마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 이익이 맞았다. 메르디아 삼왕녀는 7서클의 마법사인 폐욤 족장으로부터 마법을 배우니 좋았고, 반대로 폐욤 족장 입장에서는 콩탄 왕국의 왕가의 인물, 메르디아 삼왕녀가 사제관계나 다름 없는 끈끈한 인연을 만들 수 있으니, 나쁠 게 없었다.
탈라트 부족, 더 나아가 엘프 족에게 큰 도움이 될 일이다. 폐욤 족장이 나름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메르디아 삼왕녀를 봐주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덕분에 이제르트 자작이나, 문수르는 메르디아 삼왕녀에 대한 신경을 덜 쓸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갑작스레 찾아온 것이다.
문수르는 긴장부터 했다.
‘뭐지?’
그런 문수르를 향해 메르디아 삼왕녀는 대뜸 말했다.
“부탁할 게 있어요.”
갑작스런 부탁이다.
그러나 문수르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침착하게 되물었다.
“어떠한 부탁입니까?”
“제가 되도록 오랫 동안 이제르트 자작령에 머물 수 있도록 힘을 써주세요.”
참으로 포괄적인 부탁이다.
그래도 문수르는 나름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왕도로 다시 가는 게 싫다는 거로군.’
메르디아 삼왕녀는 왕가의 인물이다. 때문에 왕의 명령에 그 누구보다 확실한 복종을 보여야 한다.
필로스 왕이 왕도로 귀환하라 그러면, 무조건 귀환해야 한다. 변명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
만약 이제르트 자작가와 필로스 왕, 둘 사이에 조금이라도 금이 간다면 필로스 왕은 주저 없이 메르디아 삼왕녀를 왕도로 부를 것이다. 그것만큼 이제르트 자작가에 정치적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으니까.
그녀는 그런 상황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지금 문수르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감은 있군.’
지금 문수르가 정치적인 이유로 이제르트 자작령을 떠난다는 걸 눈치 챈 말이다.
더군다나 문수르는 분명 말했다.
메르디아 삼왕녀의 우군이 되겠다고. 그렇다는 건 지금 같은 상황에서 되도록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맞다는 거다.
‘좋아.’
물론 문수르가 부탁이란 걸 그냥 들어줄 리 만무하다. 문수르가 부탁을 그냥 들어주는 건 이제르트 자작가만 포함된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때까지 메르디아 삼왕녀님께서도 이제까지처럼 이제르트 자작가를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협박이다.
이제까지처럼 조용히 영지에 쳐박혀 있으라는 의미를 그냥 돌려 말한 것뿐이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빚은 걸어두면 걸어둘 수록 좋지.’
이런 식으로 계속 메르디아 삼왕녀가 이제르트 자작가와 얽히게 되면, 나중에는 메르디아 삼왕녀가 원치 않아도 이제르트 자작가로부터 떨어질 수 없게 된다.
빚이 쌓여서 목을 옥죄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런 문수르의 의중을 파악한 메르디아 삼왕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돌려 말했다고 하지만 진의는 분명 그냥 듣고 넘어갈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냥 넘어갔다.
“그보다 폐욤 족장님과의 생활은 어떠십니까?”
문수르는 그런 메르디아 삼왕녀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좋아요.”
메르디아 삼왕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폐욤 족장을 만난 건 메르디아 삼왕녀 일생 최고의 행운이나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다.
“그 인연을 소중히 여겨주십시오.”
문수르는 그런 메르디아 삼왕녀에게 짧게 충고했다.
6.
빅토리안 공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이 결단코 아니었다.
악재가 쏟아지고 있었다.
가장 큰 악재는 필로스 왕의 견제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귀족 간의 충돌을 방관했던 필로스 왕이 은연 중에 빅토리안 공작과 그 파벌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느낀 귀족들 중 일부가 빅토리안 공작 파벌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박쥐같은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을 탓할 순 없다.
또한 그들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귀족들은 친왕파라고 스스로를 분류한다. 왕을 따르는 자들이다. 왕명에 협조적인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왕을 따른다고 하는데 그걸 가지고 손가락질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제까지 견고하기 그지없던 빅토리안 공작 파벌에 금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빅토리안 공작은 웃었다.
“그래, 박쥐들은 떨어져 나가는 게 좋지.”
오히려 그는 자신의 곁을 떨어져나가는 박쥐 귀족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준비는 끝났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여름이 오기 전, 콩탄 왕국의 태양은 바뀐다!”
왕위 찬탈!
빅토리안 공작의 반역이 얼마 남지 않았다.
7.
제이머스 후작령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제이머스 후작의 정중한 초대다. 그런데 맨손으로 가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나는 몇 가지 특산품들과 향신료를 챙겼다.
‘불스 백작 때처럼 욕을 먹을 순 없지.’
참고로 불스 백작 때 당시에는 어설프게 조미료를 넣은 스프를 대접했다가 크게 욕을 봤다.
그때 이후로 문수르는 향신료를 직접 생산했다. 이제르트 자작령이 후추 따위를 재배하는 게 토질적으로나, 기후적으로 어울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억지로 환경을 조성하면서까지 키웠다.
사실 문수르는 커피와 후추, 이 두 가지는 단순히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략적인 이유로 생산을 염두에 두었다.
‘두 향신료는 전쟁을 일으킨 향신료다.’
커피와 후추만큼 어스 월드의 문명생활에 큰 영향력을 준 음식도 없을 것이다.
분명 먹힌다.
그래서 전략적인 이유로 그 두 가지를 키웠다.
지금 그 두 가지를 가져갈 생각이었다. 그 정도라면 적어도 제이머스 후작의 초대에 실례는 안 될 것이다.
‘남은 건 롤로이 도련님이 영지에 오는 거로군.’
롤로이 이제르트가 이제르트 자작령에 오는 즉시 떠날 것이다.
‘그 전에 시간이 남았으니…….’
그때까지 문수르이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장시간 영지를 비우는 일이다. 해도 해도 일이 넘치는 문수르 입장에서는 제 일을 대신해줄 사람을 찾아둬야 한다.
문수르는 가장 먼저 포비어를 찾아갔다.
포비어에게는 길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영지를 비우니, 자신 대신에 영지를 잘 지켜달라는 당부,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개인적으로 검술을 가르쳐주고 싶긴 하지만…….’
예전에는 포비어를 만나면 기술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었다. 포비어의 성장은 이제르트 자작가의 성장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최근 들어 문수르는 포비어의 훈련에 개입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가누스 때문이다.
가누스가 포비어를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문수르가 끼어드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솔직히 문수르는 속성법으로 오러 마스터에 오른 자고, 주무기도 창이다. 반대로 가누스는 순수 실력으로, 정석법으로 오러 마스터에 올랐고, 주무기가 검이다. 포비어에게 누가 더 어울리는 선생인지는 비교할 필요가 없다.
덕분에 포비어의 성장 속도는 날이갈수록 달라졌다.
‘조만간 내가 뒤쳐질지도 모르겠군.’
어쩌면 3년 안에 오러 마스터가 될 지도 모르겠다.
포비어를 만난 후에 문수르가 찾아간 인물은 다름 아니라 나탈라 제르둔이었다.
나탈라 제르둔.
그녀는 앞으로 펼쳐질 정치싸움에서 이제르트 자작가에 가장 핵심카드가 될 인물이었다.
‘빅토리안 공작의 명성에 끝장을 내는 방법은 빅토리안 공작이 흑마법사란 사실을 까발리는 거다.’
나탈라에 걸려 있는 악마의 증표.
그것만이 빅토리안 공작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밝혀줄 정확한 증거였다.
‘이번에 빅토리안 공작가를 확실하게 몰락시켜야 한다.’
문수르는 빅토리안 공작가에 반역죄를 씌어, 빅토리안 공작가를 세상에서 없애버릴 생각이다.
하지만 빅토리안 공작 정도로 지지기반과 권력이 있는 귀족에게 반역죄를 씌우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확실한 증거, 명백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나탈라 만큼 명백한 증거는 없을 터.
여하튼 이런 이유로 문수르는 나탈라에 대해서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처우도 훨씬 개선시켜줬을 뿐더러, 그녀가 원하는 대부분의 부탁을 들어줬다.
그리고 지금, 제이머스 후작가로 떠나기 전.
문수르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 나탈라는 그 대화에 기뻐했다.
“제이머스 후작가로 떠나신다고요?”
“예. 얼마 동안 영지에 없을 터니, 만약 부탁하실 게 있다면 지금 말씀해주십시오.”
“마음만으로 감사해요. 그러나 저는 지금 제 상황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요.”
“그렇습니까?”
“예!”
활짝 웃는 나탈라의 모습에 문수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문수르를 바라보는 나탈라의 눈동자에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당사자인 문수르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감정.
반면 그런 나탈라의 감정을 알아차린 이는 따로 있었다.
8.
이리아는 나탈라를 언니라고 부르며 매우 잘 따랐다.
반역죄로 처형 된 제르둔 후작가문의 여식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만큼 이리아는 나탈라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느낄 수 있었다.
문수르를 향하 나탈라의 마음을 말이다.
‘어떡하지?’
나탈라는 문수르를 연모하고 있다. 이리아는 알 수 있었다. 그녀 자신도 문수르를 연모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최근 문수르와 나탈라가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이리아는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나는…… 안 되는 건가?’
처음 문수르를 만난 이후.
그리고 문수르에게 알몸을 보여준 이후.
그 이후 이리아는 문수르에 빠졌다. 결코 벗어나올 수 없는 덫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막상 문수르와의 거리는 좁혀질 줄을 몰랐다.
예전보다 키도 더 크고, 몸도 좋아졌다. 이미 생리도 하고 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 됐다.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이 됐다. 나탈라 역시 이리아가 매력적이라고 칭찬해줬다.
하지만 문수르는 이리아를 여전히 어린 여동생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여동생이라면 다른 의미로 거리가 가까울 것이다. 문수르는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다. 언제나 많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영지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전쟁이 터지면 가장 최전선에 섰다.
그리고 이제 다시 며칠 동안 볼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이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하지?’
고민이 깊어졌다.
그리고 고민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각오도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9.
제이머스 후작은 이제르트 자작이 보낸 편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본인이 직접 오지 못하겠다?”
제이머스 후작은 정중히 초대장을 보냈다. 보통 귀족이라면 귀족 본인이 오는 게 맞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대리로 보내겠다니?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제이머스 후작 입장에서는 결코 쉬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나를 얕보는 건…….”
그러나 그 대리인의 존재.
이제르트 자작가의 장남 롤로이 이제르트. 그리고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부라고 평가 받는 콩탄 왕국 세 번째 오러 마스터, 문수르.
“그건 아닌 것 같군.”
대리인의 품격은 제이머스 후작의 이름값에 충분히 견줄만했다.
그리고 제이머스 후작의 마음에 가장 든 건, 다름 아니라 문수르가 오러 마스터란 사실이었다.
무인이다.
그것도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
보지 않아도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나쁘지 않아.”
제이머스 후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앞으로 제이머스 후작 앞에 닥칠 난제가 무엇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