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4.
이제르트 자작은 문수르가 오자마자 말대신 자신의 이름 앞으로 온 편지를 건네줬다.
편지는 두 장이었다.
문수르는 편지를 받고, 읽었다.
‘이런.’
두 장은 각기 다른 곳에서 온 편지였다.
‘드디어 움직이는군.’
제이머스 후작가와 불스 백작가.
두 곳에서 거의 동시에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제르트 자작가는 제이머스 후작 파벌에 속해 있는 상황이고, 불스 백작과는 긴밀한 관계다. 두 귀족 가문에서 이제르트 자작가에 편지를 보내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내용이다.
내용 자체는 비슷했다.
만나자는 이야기다. 자세한 이야기는 적어두지 않았지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둘이 갈라졌어.’
그래서 특별한 것이다.
사전 합의가 있었다면 적어도 두 곳에서 동시에 초대장이 올 리가 없을 테니까.
날짜는 똑같지 않아도, 영지를 오고 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그런데 그 둘은 비슷한 날짜에 동시에 초대를 했다.
사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군.’
목적은 비슷하나, 그 배경에는 서로가 주도권을 잡기 위한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다는 의미다.
‘나쁘진 않지.’
이제르트 자작가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불스 백작가는 제이머스 후작 파벌의 핵심 귀족이 됐다. 가진 기가스 전력을 비롯해 불스 백작가의 저력은 굉장했다. 무엇보다 불스 백작은 정치를 할 줄 알았다. 제이머스 후작 주변에는 정치보다는 전쟁에 특화된 귀족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 불스 백작의 등장은 제이머스 후작에게 강력한 기가스보다 더 반가운 것이었다.
실제로 지금 불스 백작은 거의 혼자서 빅토리안 공작과 언쟁을 벌이는 중이다.
제이머스 후작 파벌의 대변인 수준이다.
그런 불스 백작과 제이머스 후작 사이에 틈이 있다면, 이제르트 자작가는 몸값을 올릴 좋은 기회다.
‘핵심은 부르는 이유겠지.’
물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초대의 이유다.
그냥 식사 한 끼 하자고 부르진 않았을 것 아닌가? 필시 앞으로 있을 거대한 전쟁을 앞두고 어떠한 지령을 내리기 위해 초대를 한 것이 분명하다.
‘뭘까?’
제이머스 후작이나 불스 백작, 그들이 고를 선택지는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확신은 금물이다.
선택지가 적다고 해도 어설프게 선택지를 골라 생각의 폭을 좁히는 일은 피해야 한다.
‘누구를 고르지?’
그럼 과연 누구를 골라야 할까?
사실 답은 나와있다.
“제이머스 후작쪽을 택해야겠군요.”
“내 생각과 문수르 경의 생각이 똑같군.”
“길게 고민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제이머스 후작이다.
불스 백작이 제이머스 후작 파벌 내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까지 올라온 건 맞지만, 결국 제이머스 후작 이름 아래에 놓여 있다. 제이머스 후작 파벌에서 제이머스 후작을 제외하면 이야기가 안 된다.
결국 제이머스 후작을 만나야 한다.
불스 백작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할 처지가 못 된다. 오히려 가슴을 조릴 것이다.
만약 이번 일이 잘못 왜곡된다면, 불스 백작이 제이머스 후작에게 반기를 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불스 백작은 그럴 의도가 없다. 정치를 할 줄 아는 불스 백작은 빅토리안 공작가가 왕가의 눈 밖에 난 걸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반기를 들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지금 내가 영지를 비우긴 힘들 듯하군.”
제이머스 후작을 만나러 가는 길.
예의상으로는 이제르트 자작이 가는 게 맞다. 이제르트 자작은 엄연히 제이머스 후작 파벌 소속이다. 제이머스 후작이 정중히 초대장까지 보냈는데 다른 사람을 대리인으로 보내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다.
그러나 사정이 좋지 못하다.
이제르트 자작도 자각하고 있다.
데스나이트의 습격 이후 이제르트 자작은 굉장히 많은 우려를 표했다. 아니, 단순히 우려를 표한다,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진지하게 문수르에게 말했다.
영지를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두 곳의 부속령 중 한 곳을 이제르트 자작령으로 삼는 게 어떻겠냐고 말이다.
테블스 산에 대한 스트레스가 절정에 다다른 것이다.
또한 제1, 제2 부속령이 잘 운영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제르트 자작은 정말 고민했다.
영지 이전을 말이다.
그런 스트레스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제르트 자작은 그런 테블스 산 앞의 영지를 놔두고 어디론가 가는 걸 원치 않았다. 더군다나 이제르트 자작가에는 중요인물이 한 명 더 있다.
메르디아 삼왕녀.
폐욤 족장이 잠시를 한 이후 조용해진 그녀지만, 혹시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문수르에게 맡길 수도 있다.
그러나 책임감이란 게 있다.
영지 일 모든 걸 문수르에게 맡기는 건 납득할 수 있다. 스스로가 납득하지 못한다.
그런 이제르트 자작의 고민을 문수르가 모를 리 만무했다.
‘내가 가는 게 나을까?’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문수르가 가는 것도 좀 그렇다. 문수르가 이제르트 자작가의 충신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외인이다. 그런 그가 진정 이제르트 자작가를 대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
문수르의 고민.
“그래서 말인데, 문수르 경이 롤로이, 그 아이와 함께 제이머스 후작가에 다녀와주었으면 하네.”
그 고민을 꿰뚫은 답이 이제르트 자작의 입에서 나왔다.
‘롤로이!’
롤로이 이제르트.
이제르트 자작가의 장남, 훗날 이제르트 자작가를 계승할 자.
현재 페르코 아카데미에서 공부 중이다.
‘나쁘진…… 않다.’
아직 아카데미에서 공부 중이긴 하지만, 이런 중요한 상황이라면 휴학도 가능하다.
나쁘진 않다.
이제르트 자작은 영지에 남으면서, 반대로 충분히 의미는 세울 수 있다.
이리아 아가씨가 대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딸보다는 아들이 더 무게감이 생긴다.
최소한의 체면은 세워줄 수 있다.
더군다나 이제르트 자작은 페르코 아카데미에서의 공부보다는 문수르로부터 배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문수르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제르트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들을 비롯해서 잘 부탁하네.”
"염려 마십시오. 가장 좋은 결과를 들고 오겠습니다."
5.
메르디아 삼왕녀가 문수르를 찾아왔다.
예상외의 방문이었다.
“왕녀님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최근 메르디아 삼왕녀는 폐욤 족장으로부터 마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 이익이 맞았다. 메르디아 삼왕녀는 7서클의 마법사인 폐욤 족장으로부터 마법을 배우니 좋았고, 반대로 폐욤 족장 입장에서는 콩탄 왕국의 왕가의 인물, 메르디아 삼왕녀가 사제관계나 다름 없는 끈끈한 인연을 만들 수 있으니, 나쁠 게 없었다.
탈라트 부족, 더 나아가 엘프 족에게 큰 도움이 될 일이다. 폐욤 족장이 나름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메르디아 삼왕녀를 봐주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덕분에 이제르트 자작이나, 문수르는 메르디아 삼왕녀에 대한 신경을 덜 쓸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갑작스레 찾아온 것이다.
문수르는 긴장부터 했다.
‘뭐지?’
그런 문수르를 향해 메르디아 삼왕녀는 대뜸 말했다.
“부탁할 게 있어요.”
갑작스런 부탁이다.
그러나 문수르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침착하게 되물었다.
“어떠한 부탁입니까?”
“제가 되도록 오랫 동안 이제르트 자작령에 머물 수 있도록 힘을 써주세요.”
참으로 포괄적인 부탁이다.
그래도 문수르는 나름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왕도로 다시 돌아가는 게 싫다는 거로군.’
메르디아 삼왕녀는 왕가의 인물이다. 때문에 왕의 명령에 그 누구보다 확실한 복종을 보여야 한다.
필로스 왕이 왕도로 귀환하라 그러면, 무조건 귀환해야 한다. 변명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
만약 이제르트 자작가와 필로스 왕, 둘 사이에 조금이라도 금이 간다면 필로스 왕은 주저 없이 메르디아 삼왕녀를 왕도로 부를 것이다. 그것만큼 이제르트 자작가에 정치적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으니까.
그녀는 그런 상황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지금 문수르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감은 있군.’
지금 문수르가 정치적인 이유로 이제르트 자작령을 떠난다는 걸 눈치 챈 말이다.
더군다나 문수르는 분명 말했다.
메르디아 삼왕녀의 우군이 되겠다고. 그렇다는 건 지금 같은 상황에서 되도록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맞다는 거다.
‘좋아.’
물론 문수르가 부탁이란 걸 그냥 들어줄 리 만무하다. 문수르가 부탁을 그냥 들어주는 건 이제르트 자작가만 포함된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때까지 메르디아 삼왕녀님께서도 이제까지처럼 이제르트 자작가를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협박이다.
이제까지처럼 조용히 영지에 쳐박혀 있으라는 의미를 그냥 돌려 말한 것뿐이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빚은 걸어두면 걸어둘 수록 좋지.’
이런 식으로 계속 메르디아 삼왕녀가 이제르트 자작가와 얽히게 되면, 나중에는 메르디아 삼왕녀가 원치 않아도 이제르트 자작가로부터 떨어질 수 없게 된다.
빚이 쌓여서 목을 옥죄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런 문수르의 의중을 파악한 메르디아 삼왕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돌려 말했다고 하지만 진의는 분명 그냥 듣고 넘어갈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냥 넘어갔다.
“그보다 폐욤 족장님과의 생활은 어떠십니까?”
문수르는 그런 메르디아 삼왕녀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좋아요.”
메르디아 삼왕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폐욤 족장을 만난 건 메르디아 삼왕녀 일생 최고의 행운이나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다.
“그 인연을 소중히 여겨주십시오.”
문수르는 그런 메르디아 삼왕녀에게 짧게 충고했다.
메르디아 삼왕녀의 기분이 충분히 나빠질 수도 있는 충고다. 그러나 메르디아 삼왕녀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어쩌면 근래 들어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가장 많이 변화한 건, 메르디아 삼왕녀, 그녀일지도 모르겠다.
6.
빅토리안 공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이 결단코 아니었다.
악재가 쏟아지고 있었다.
가장 큰 악재는 필로스 왕의 견제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귀족 간의 충돌을 방관했던 필로스 왕이 은연 중에 빅토리안 공작과 그 파벌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느낀 귀족들 중 일부가 빅토리안 공작 파벌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박쥐같은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을 탓할 순 없다.
또한 그들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귀족들은 친왕파라고 스스로를 분류한다. 왕을 따르는 자들이다. 왕명에 협조적인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왕을 따른다고 하는데 그걸 가지고 손가락질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제까지 견고하기 그지없던 빅토리안 공작 파벌에 금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빅토리안 공작은 웃었다.
“그래, 박쥐들은 떨어져 나가는 게 좋지.”
오히려 그는 자신의 곁을 떨어져나가는 박쥐 귀족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준비는 끝났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여름이 오기 전, 콩탄 왕국의 태양은 바뀐다!”
왕위 찬탈!
빅토리안 공작의 반역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