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179화 (177/293)

179화

4.

폐욤 족장이 문수르를 찾아온 건 늦은 밤이었다. 영지일 때문에 밤을 꼬박 새던 문수르 앞에 갑작스레 폐욤 족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문수르는 폐욤 족장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그때 일은 감사했습니다. 폐욤 족장님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큰 봉변을 당할 뻔했습니다.”

다크 나이트.

문수르는 듣기만 했던 흑마법사의 피조물. 그 외에 이러다할 정보도 없었던 그것이 메르디아 삼왕녀를 암살하기 위해 무려 다섯이나 파견됐다고 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일단 데스나이트도 데스나이트지만 다크 나이트까지 부릴 수 있는 적의 전력에 대한 공포심이 생겼다.

폐욤 족장이 없었으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더군다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폐욤 족장과 사전에 합의된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폐욤 족장이 문수르보다 먼저 상황을 눈치 채고 움직여준 것이다.

정말 천만다행이다.

만약 메르디아 삼왕녀가 죽었다면…… 그 결과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아닐세.”

“아닙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가누스에게도 들었겠지만, 이제 탈라트 부족과 이제르트 자작령은 공동체나 마찬가지일세. 내가 도움이 된다면 도와주는 게 당연한 도리지.”

“그리 생각해주신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계속되는 감사의 인사.

폐욤 족장은 그런 문수르의 인사가 부담스러웠다.

“너무 그러지 말게. 인사를 받으려고 이 늦은 밤에 온 게 아니니.”

문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폐욤 족장은 고작 인사 따위를 받으려고 사람을 찾아올 정도로 인사치레를 즐기는 성격은 아니다.

오히려 은밀히, 조용히 나눌 대화가 있기에 이렇게 늦은 밤에 문수르를 찾아온 거겠지.

“말씀하시죠.”

“메르디아 삼왕녀라고 했던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문수르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입은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예.”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예, 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나 이어진 폐욤 족장의 말에 문수르의 표정은 어색하게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내가 맡겠네.”

이건 또 무슨 의미인가?

‘뭐지?’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 폐욤 족장의 입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메르디아 삼왕녀를 폐욤 족장이 맡아 관리하겠다는 의미인가?

‘나쁠 건…… 없지.’

놀라운 말이지만, 어느 정도 합리적인 부분도 많다.

일단 메르디아 삼왕녀는 필시 마법에 대한 것을 요구할 것이다. 할루이 이제르트를 꺼냈을 때부터 눈치 챘다.

아마도 메르디아 삼왕녀는 어떻게든 이번 일을 계기로 보다 높은 수준의 마법을 접하고, 익히고 싶을 것이다.

폐욤 족장은 현재 이제르트 자작가가 보유한 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수준이 높다. 7서클의 마법사다. 폐욤 족장이라면 메르디아 삼왕녀가 요구하는 마법적 호기심을 충분히 충족시켜줄 것이다.

더불어 폐욤 족장은 실시간으로 호위를 받는다. 탈라트 부족의 검사들, 마법사들이 그의 주변을 호위하고 있다. 폐욤 족장과 메르디아 삼왕녀가 같이 움직인다면, 그 호위 병력은 자연스럽게 메르디아 삼왕녀의 호위 병력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엘프다.

“왕가의 인물입니다. 엘프분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지 모릅니다.”

“그 부분은 걱정 말게. 적어도 엘프를 보고 노예로 부릴 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니.”

“그건…….”

엘프인 폐욤 족장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문수르가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문수르는 고개를 숙였다.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몸에는 흑마법사의 표식이 새겨져 있네.”

“예?”

“말 그대로네. 흑마법사의 표식이 있네.”

그 순간 문수르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악마의 증표와는 다른 겁니까?”

악마의 증표.

그것은 흑마법사가 악마를 소환하기에 앞서 악마의 제물로 점찍어둔 이들에게 남겨둔 표식을 뜻한다.

소환된 악마는 악마의 증표가 새겨진 제물을 취하고 힘의 일정부분을 되찾을 수 있다.

더불어 그 악마의 증표는 새겨 넣은 흑마법사의 피와 동조한다. 현재 나탈라가 가지고 있는 악마의 증표는 빅토리안 공작이 새겨 넣은 것이다.

“비슷한 개념이네. 애초에 악마의 증표라는 것도 새겨 넣는 건 흑마법사 본인이니까. 흑마법사의 강대한 마력은 그 흑마법사와 계약한 악마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럼 메르디아 삼왕녀가 제물이라는 겁니까?”

메르디아 삼왕녀가 제물이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가 왕가의 그 삼엄한 경계를 뚫고, 메르디아 삼왕녀에게 흑마법사의 표식을 새겨 넣었다는 건데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암살 기도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다.

혹여 메르디아 삼왕녀가 그런 위험에 노출됐다면, 다른 왕가의 인물들도 노출됐을 가능성이 크다.

‘필로스 왕에게도 있다면…….’

그리고 그 마수가 필로스 왕에게까지 도달했다면 콩탄 왕국은 이미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의미다.

“제물이라는 개념과는 조금 다르네. 제물은 말 그대로 제물. 내가 말하는 건 흑마법사가 대상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걸어 놓은 마법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걸세.”

“아…….”

그제야 문수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도할 때는 아니었다.

‘위치 추적 장치 같은 개념인가?’

흑마법사의 표식…… 쉽게 설명하면 위치 추적 장치다.

그런데 이것도 문제가 된다.

결과적으로 흑마법사가 왕가의 사람들 몰래 메르디아 삼왕녀에게 마법을 걸었으며, 그 마법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감시를 한다는 이야기니까.

왕가의 인물들은 필요에 따라서 자신이 있는 위치를 숨길 필요가 있다.

암살의 위협 또는 기타 상황에 맞추어서 말이다.

그런데 흑마법사가 이렇게 왕가의 인물들의 위치를 금방 파악해버리면, 굉장히 무서운 일이다.

“그럼 폐욤 족장님께서 메르디아 삼왕녀를 맡으신다는 건?”

“내가 방해 마법을 사용할 걸세. 적어도 메르디아 삼왕녀를 다시 왕도로 보내는 것도, 그렇다고 이대로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도 힘들지 않은가?”

폐욤 족장이 나선 이유.

자원이다.

이제르트 자작가를 위해서 스스로가 희생하겠다는 의미다.

문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제까지는 폐욤 족장과의 관계는 기브 앤 테이크였다. 그러나 지금 폐욤 족장은 받은 것 없이 먼저 주려고 한다.

엄청난 발전이다.

탈라트 부족이 이제르트 자작가를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니까.

가누스 때도 그랬지만, 폐욤 족장…… 탈라트 부족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그가 나서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몇 가지 부탁할 게 있네.”

“제가 할 수 일이라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왕가의 인물을 엘프 부족이 돕는다는 것. 내가 정치에 대해서는 몰라도 이게 어떠한 식으로든 콩탄 왕국의 정세에 영향력은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네.”

“그렇겠지요.”

“자네가 그 영향력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주었으면 하네.”

폐욤 족장이 원하는 것.

콩탄 왕국 내에서 엘프들의 권리가 보장되길 원하는 것이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그것처럼 말이다.

크나큰 기대다.

누군가는 헛된 망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폐욤 족장이 이런 부탁을 하는 건 문수르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기적 같은 일을 보여준 문수르니까, 그라면 가능할 것 같으니까.

그리고 사실 엘프와 드워프가 나름 권리를 인정받고 살아가는 게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칼란 왕국이란 사례도 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못하겠습니다, 라는 말은 죽어도 못한다.

또한 문수르도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할 것이다.

“고맙네. 자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짊어주는 것 같아서 미안할 뿐이네.”

“아닙니다.”

“그럼 오늘은 물러가겠네. 메르디아 삼왕녀에 대한 일은 나에게 맡겨주었으면 하네.”

“알겠습니다.”

폐욤 족장은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문수르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짐이 하나 덜어졌군.’

메르디아 삼왕녀의 거처를 이제 고민할 필요는 없다. 더불어 이제부터 그녀는 이제르트 자작가에 유용한 정치적 카드다.

‘그러나 더 큰 짐이 생겨났군.’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몸에 흑마법사의 표식이 있다는 건 확실히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빅토리안 공작도 그렇고, 콩탄 왕국의 곳곳에 흑마법사의 마수가 깊게 퍼져 있다.’

콩탄 왕국 내에서의 흑마법사들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더 크다. 흑마법사라고 하면 무조건 처형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치고는 말이다.

“아무래도 슬슬 제이머스 후작하고 협상을 벌어야겠군.”

문수르가 준비했던 계획들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5.

메르디아 삼왕녀는 저택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어떡하지?”

나탈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슬펐다. 그녀의 말이 그 어느 것보다 진실처럼 들렸다. 그녀의 눈물을 봤을 때는 그녀가 그렇게 된 게 자신의 탓 같아서 미안했다.

그러나 그 이후 문수르가 치고 들어왔을 때, 메르디아 삼왕녀는 당황했다.

반역 이야기부터 빅토리안 공작이 흑마법사라는 음모론까지!

믿기 힘든 이야기뿐이었다.

당황했다.

설마 자신이 모르는 정치 이면에 그런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너무 당황해서 그 자리에서 대답을 피했다.

도망치듯 저택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그리고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은 후에 메르디아 삼왕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근심과 걱정이란 놈이었다.

메르디아 삼왕녀는 파악한 것이다.

자신이 반역자의 생존자를 앞에 두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건 큰 잘못이었다.

만약 이 사실을 다른 이들이 알게 되면, 메르디아 삼왕녀는 정치적 공격을 당할 것이다.

가뜩이나 정치적 입지가 없는 메르디아 삼왕녀에게 이 약점은 뼈아픈 약점이었다.

‘어떻게든 무마해야 돼.’

답은 하나다.

이번 일을 숨겨야 한다. 메르디아 삼왕녀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선, 자유를 보장 받기 위해선 이번 일은 없었던 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이제르트 자작가와 손을 잡아야 한다.

왕녀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문수르가 메르디아 삼왕녀와의 만남을 요청했다.

6.

문수르는 말했다.

“이제르트 자작가를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이제르트 자작가 역시 메르디아 삼왕녀님의 훌륭한 우군이 되어주겠습니다.”

거래의 제안이었다.

노골적인 제안.

그리고 반쯤은 협박이나 다름없는 제안이었다.

“제게 이러는 이유가 뭐죠?”

메르디아 삼왕녀도 직접적으로 물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이제까지처럼 간만 보고 싸우는 건 의미가 없다.

솔직히 메르디아 삼왕녀는 초조하고, 다급했다.

코너에 몰렸다.

그건 메르디아 삼왕녀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제까지 번듯한 왕가의 여식으로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살아왔다. 궁지에 몰릴 일 따위는 겪을 이유가 없었다.

코너에 몰렸을 때 사람은 다급해지고, 다급함은 결국 오판을 불러오게 된다.

지금 메르디아 삼왕녀가 그랬다.

문수르는 웃었다.

“왕가에 대한 충성심 때문입니다. 빅토리안 공작은 흑마법을 이용해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그걸 그냥 두고 볼 수 있겠습니까?”

아니다.

속마음은 그게 아니겠지!

메르디아 삼왕녀는 그리 말하고 싶었지만, 문수르의 말은 분명한 정론이었다.

반박할 여지는 없다.

“제가 원하는 게 뭐지요?”

“이제까지처럼 이제르트 자작가에 머무시면 됩니다.”

“단지 그것뿐인가요?”

“현재 메르디아 삼왕녀님을 노리는 불순한 세력이 있습니다. 메르디아 삼왕녀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되도록 이제르트 자작가의 행동에 협조해주셨으면 합니다.”

말이 협조지, 하는 말에 군말 말고 따르라는 소리다.

메르디아 삼왕녀가 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제르트 자작가가 가지는 메리트는 엄청나다.

“알겠어요.”

“그럼 이제부터 메르디아 삼왕녀님의 호위를 맡게 될 분을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엘프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프?”

“탈라트 부족의 족장, 폐욤 족장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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