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51화. 새벽녘.>
1.
카라카크는 처참하게 망가진 데스나이트의 조각들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데스나이트.
그건 카라카크의 역작이었다.
카라카크는 강력한 군대가 필요했다. 그 군대의 핵심병력으로 데스나이트를 뽑았다.
그러나 데스나이트의 기반이 되는 강력한 기사의 시체를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테블스 산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몬스터들을 이용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몬스터들을 단련시켜 기사에 가깝게 만든 후에 놈들을 시체로 만들어 데스나이트의 재료로 쓰자는 거였다.
오랜 세월이 걸렸다.
무지한 몬스터들에게 기사의 도리, 검술의 이치, 오러를 다루는 법을 익히게 만드는 건 기가스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러나 결국 성공했다.
방법을 만들어낸 이후에는 양산에 들어갔다. 강력한 몬스터들, 오우거나 자이언트 트롤 따위를 잡아다가 훈련을 시켰다. 개중에는 또투 같은 별종도 생겨났다.
어떤 의미에서 자식 같은 놈들이다.
그런 자식이 걸레가 되서 돌아왔다. 다시 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다시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분노해도 이상할 게 없는 광경이다.
“이 정도였군.”
그러나 카라카크는 의외로 담담했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력이 이 정도였어.”
그 순간 카라카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그어졌다.
“할루이 이제르트, 네가 남긴 유산은 고작 이 정도였나?”
이윽고 카라카크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하하!”
참으로 불길한 웃음소리였다.
2.
메르디아 삼왕녀는 나탈라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나탈라의 이야기는 길었다. 또한 나탈라의 이야기에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나탈라는 울분을 토해내듯 말했다.
사실 나탈라는 사전에 문수르와 대화를 나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문수르는 나탈라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이번 기회가 제르둔 후작가의 명예를 살릴 유일한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빅토리안 공작의 마수에서 벗어난 이후, 운 좋게 문수르의 밑에 들어가게 된 나탈라.
그 이후 나탈라의 삶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이제르트 자작가에서의 삶은 괜찮았다. 제르둔 후작가가 잘 나갈 때보다는 대접도, 대우는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훌륭했다. 그 누구도 나탈라가 제르둔 후작가의 여식이란 걸 알지 못했지만 나름 그녀를 잘 대해줬다. 하녀와 하인들은 물론 기사들까지도.
이리아 이제르트의 가정교사 비슷한 역할을 맡게 된 이후에는 솔직히 어떤 의미에서는 제르둔 후작가 때보다 나았다. 제르둔 후작가 때에는 풍족함은 넘쳤어도 자유는 없었다. 언제나 파티에 나가야 했고, 남자들에게는 미소를 지어야 했고, 여자들 사이에서는 파벌을 만들어 가꾸어야 했다.
이제르트 자작가에서는 그런 게 없었다.
평온한 삶이었다.
이대로 살다가 어느 기사와 눈이 맞아 가정을 꾸리고, 제르둔 후작가의 여식이 아니라 나탈라란 이름만 남긴 채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몸 한 구석에는 제르둔 후작가의 피가 분명하게 흐르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피였다.
어떻게든 억울하게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진 못하더라도 그 불명예를 씻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 기회가 왔을 때, 나탈라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문수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문수르는 그런 나탈라에게 완벽한 답안지를 주었다. 나탈라가 봐도 놀랄 정도였다. 그 완벽한 답안지를 습득했다. 메르디아 삼왕녀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표증을 짓고,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하는지, 모든 것을 익혔다.
그리고 말 마지막에 눈물을 흘리는 것 역시 문수르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메르디아 삼왕녀의 감성에 호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눈물을 이용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나탈라의 눈물은 결코 조작된 눈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울분을 토해냈다. 억울함을 토해냈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문수르가 나섰다.
“메르디아 삼왕녀님께 고합니다. 빅토리안 공작은 사사로운 목적으로 흑마법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그를 이용해 무고한 제르둔 후작가를 핍박하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고문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빅토리안 공작이 막강한 흑마법사와 손을 잡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나탈라의 호소에 감성이 젖어버린 메르디아 삼왕녀. 저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무방비가 된 그녀에게 문수르는 돌직구를 던졌다. 너무나도 강력한 돌직구였다.
맞은 사람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자, 잠시…….”
메르디아 삼왕녀는 문수르의 갑작스런 말에 놀랐다.
문수르는 메르디아 삼왕녀가 느끼던 어렴풋한 의심을 직접 말로 정리해줬다.
결국 내용은 간단하다.
빅토리안 공작이 흑마법을 익혔다.
제르둔 후작가는 누명을 썼고, 빅토리안 공작은 그런 제르둔 후작가를 사악한 흑마법을 이용해 악랄하게 다뤘다.
빅토리안 공작이 엄청나게 강력한 흑마법사 무리와 손을 잡고 왕위 찬탈을 노리고 있다.
내용정리는 간단하지만, 각각의 이야기가 가지는 파급효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특히 왕위 찬탈.
이건 너무나도 무거운 이야기다. 곱게 말해서 왕위 찬탈이지, 대놓고 말하면 반역이다.
반역 앞에서 평정심을 쉽게 유지할 수 있는 왕가의 인물은 없다.
왕조차도 말이다.
너무 거대한 충격이기에 메르디아 삼왕녀는 곧바로 대답이란 걸 할 수가 없었다.
문수르는 그 부분을 노리고 들어갔다.
“필로스 전하께서도 그 사실을 알기에 메르디아 삼왕녀를 이제르트 자작가로 보내신 것 아닙니까? 반대로 빅토리안 공작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왕녀님의 암살을 기도한 것입니다.”
그동안 애매했던 부분을 과감하게 치고 들었다.
‘메르디아 삼왕녀를 무너뜨린다.’
문수르는 오늘 이 자리에서 메르디아 삼왕녀를 확실하게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무엇을 원하든, 쉽게 얻을 생각은 하지 마라.’
기세를 잡았다.
기세를 잡은 이상 끌려다닐 필요는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문수르는 메르디아 삼왕녀를 이용할 것이다.
‘필로스 왕의 성정 그리고 이제까지 메르디아 삼왕녀에 대한 세간의 평가 그리고 내가 직접 보고 느낀 메르디아 삼왕녀에 대한 것들…… 이 모든 걸 조합했을 때 메르디아 삼왕녀와 필로스 왕 사이에서는 이러다할 합의가 없었다.’
문수르가 이제까지 메르디아 삼왕녀를 상대함에 있어서 굉장한 주의를 기울인 이유.
메르디아 삼왕녀가 필로스 왕의 어떠한 의지를 가지고 왔을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메르디아 삼왕녀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이제르트 자작가를 상대로 정치적 역할을 할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그리고 초반에는 그렇게 의심할 만한 정황이 보였다. 그래서 문수르는 더 긴장했다.
하지만 가만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초반에 보여줬던 정치적인 느낌은 메르디아 삼왕녀의 성정 때문이지, 필로스 왕과의 어떠한 지시 때문이 아니다.
그럼 이야기는 간단해진다.
문수르는 무릎을 꿇었다.
“반역을 꾀하는 빅토리안 공작가를 막기 위해서라면 이제르트 자작가는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절대적인 충성의 표현!
메르디아 삼왕녀는 그런 문수르 앞에서 예, 라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만요, 잠시만…….”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지금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반면 메르디아 삼왕년의 그런 모습에 문수르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확실해졌군.’
왕가에 대한 충성?
까놓고 그딴 건 없다. 문수르가 필로스 왕과 완만한 관계를 맺으려는 건 그게 이제르트 자작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로스 왕이 나름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다고 해도 모든 주도권은 필로스 왕의 손에 잡혀 있다. 이제르트 자작가 입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충성도 할 만큼 했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는데 필로스 왕에게 버림받는 일이다.
토사구팽.
그걸 가장 조심해야 한다.
토사구팽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같이 목줄을 걸어야 한다. 같이 죽는 건 힘들더라도, 이제르트 자작가를 치려면 팔 하나쯤은 내놓을 각오를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탈라를 꺼내든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나탈라 제르둔이 필로스 왕, 그 본인에게 영향력을 주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메르디아 삼왕녀는 다르다.
지금 메르디아 삼왕녀는 대답을 나중으로 미뤘다. 달리 말하면 그녀는 나탈라 제르둔의 존재를 용납한 것이다.
반역죄로 처형 당했고, 모든 일가친척이 멸족을 당했어야 할 제르둔 후작가의 여식을 왕가의 여식인 메르디아 삼왕녀가 용납했다는 것!
이건 메르디아 삼왕녀에게 큰 흠이다.
필로스 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여차할 때 메르디아 삼왕녀를 처치할 수도 있다.
반대로 메르디아 삼왕녀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숨기거나 혹은 정말 제르둔 후작가가 반역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전자의 경우라면 결국 이제르트 자작가에 전면적인 협조를 할 것이고, 후자라면 빅토리안 공작과 척을 지게 된다.
뭐가 됐든 이제르트 자작가에는 이득이다.
결과적으로 이제르트 자작가는 정치적 입지는 크지 않지만, 정치적 명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왕가의 인물을 어느 정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 거다.
앞으로 있을 정쟁에 있어서 이 카드는 엄청난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3.
문수르는 빠르게 영지를 수습했다.
전쟁의 흔적은 의외로 크지 않았다. 데스나이트와의 전쟁은 성벽 밖에서 이루어졌고, 내부적으로 침투한 다크 나이트의 경우에는 내성 내에서만 움직이다 사라졌으니까.
인명피해도 적었다.
영지민 열두 명, 그리고 기가스 파일럿 세 명이 사망했고, 메르디아 삼왕녀의 시녀 한 명이 죽은 게 전부였다.
사람이 죽은 일이긴 하지만 쳐들어왔던 어마어마한 전력에 비하면 정말 가소로운 피해였다.
그러나 심리적인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이제르트 자작가는 언제나 승리했다. 제 아무리 힘든 적이 와도 결국에는 승리했다.
물론 승리 자체에 취한다거나, 패배 자체에 무너진다거나 그렇다는 건 아니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그 정도로 약골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전황을 보면 누가 봐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상대가 정말 제대로 나왔다면, 전면전을 행했다면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즉, 상대의 배려 아닌 배려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병사들은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일선에서 싸운 기가스 파일럿들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제 아무리 입단속을 시킨다고 해도 결국 병사들과 영지민도 진실을 알게 된다.
‘일단 화제를 전환해야 돼.’
영지 분위기는 최대한 좋은 쪽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제르트 자작의 영지 순회는 그런 의미에서 정말 절호의 행동이었다. 아마 이제르트 자작 역시 전후 사장을 파악한 후에 내린 결정일 것이다. 이제르트 자작이 영지를 순회하면 영지 분위기는 악화되지는 않는다.
‘그 다음은 메르디아 삼왕녀.’
더불어 메르디아 삼왕녀란 카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메르디아 삼왕녀가 바보도 아니고, 어느 순간 자신의 사정을 파악하고는 나름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수를 쓸 것이다.
메르디아 삼왕녀를 너무 코너로 몰아세우면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어느 정도의 보상은 줘야 한다.
‘마법에 대한 게 좋겠지.’
그녀가 마법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더군다나 히스티가 말해줬다.
다크 나이트를 처치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나름 관심만 있는 게 아니라 지식도 깊다는 의미다.
‘무엇을 붙여주면 좋을까?’
메르디아 삼왕녀가 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녀의 흥미를 끌만한 무언가를 던져주면 된다.
더불어 그녀의 안전도 어느 정도 담보할 수 있는 환경이어야만 한다.
“흠.”
문수르는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