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177화 (175/293)

177화

6.

폐욤 족장.

탈라트 부족 내에서 그가 맡은 역할 중에 족장이란 지위가 차지하는 비중은 사실 많지 않다.

엘프들은 규율을 잘 지킨다. 어느 정도 번듯한 규율만 만들어주면 딱히 족장이 할 일은 많지 않다. 애초에 마음에 들지 않은 자는 부족을 떠나면 되는 일이니까. 이래라, 저래라 일일이 명령할 이유가 없다.

폐욤 족장의 가장 큰 역할은 결국 부족을 지키는 것이다.

가누스가 검으로 부족을 지킨다면, 폐욤은 마법으로 부족을 지킨다.

테블스 산이란 땅은 가누스를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있어서 스페셜리스트로 만들어줬다. 그리고 폐욤 족장에게는 흑마법에 대한 스페셜리스트로 만들어줬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테블스 산에 숨어든 온갖 사악한 흑마법사들로부터 부족을 지키기 위해 폐욤이 해야 했던 일은 결국 흑마법의 공부하고 파훼법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 덕분이었다.

메르디아 삼왕녀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말이다. 만약 폐욤이 아니었다면 메르디아 삼왕녀는 제 아무리 다크 나이트를 처치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고 해도 살아남는 게 쉽진 않았을 것이다.

7.

데스나이트가 물러났다.

문수르는 물러나는 데스나이트를 보며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새끼들. 시체를 수거하는군.’

물러나는 데스나이트들은 드래곤 파이터와 아이언히트 그리고 병사들의 공격에 걸레가 된 데스나이트들의 시체도 같이 가지고 물러났다.

데스나이트의 무시무시한 점은 일단 시체만 있으면 된다는 거다. 애초에 시체로 만들어진 기사다. 죽는다고 해도 그 시체 조각만 있으면, 흑마법사의 실력만 좋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데스나이트로 탄생할 수 있다.

문수르 입장에서는 시체라도 수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어야 했다. 이대로 시체를 보내면, 오늘 희생의 가치는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수르는 그러지 못했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는군.’

아직 해가 뜨기 전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은 상황. 또한 남은 데스나이트의 숫자도 적지 않다.

추격전은 불가능하다.

놈들도 그걸 알기에 지금 이 순간 물러나는 거겠지.

‘대체 누구지?’

이 말도 안 되는 공격의 배경이 대체 누구일까? 정말 빅토리안 공작이 관계된 일일까?

‘누구든 간에 흑마법을 이용해 이렇게 막강한 전력을 세웠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콩탄 왕국의 정세에 막강한 힘을 지닌 흑마법사가 끼어들었다.

혼돈의 도가니다.

“후우!”

문수르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터질 같은데도 계속해서 계획을 세웠다.

“일단 나탈라를 움직여야지.”

8.

아닌 밤중에 홍두께, 정말 말도 안 되는 밤이 지나갔다.

그 여파는 컸다.

이제르트 자작가는 뒤숭숭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글쎄 엄청난 몬스터가 쳐들어왔다는군.”

“기사분들이 크게 다쳤데!”

단순한 몬스터의 침공이었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런 일에 대해서는 이골이 났으니까.

그러나 이번은 조금 이야기 달랐다.

처음 보는 몬스터였다.

몬스터라기보다는 악마 같은 놈들이었다. 몬스터 따위로 분류하는 게 미안할 정도다.

미지(未知)라는 거다.

미지에 대한 공포는 클 수밖에 없다. 그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제르트 자작은 그런 민심을 다지기 위해 전면에 나섰다. 민심이란 게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주체할 수 없게 된다. 잡을 수 있을 때, 초기에 잡는 게 중요하다.

이제르트 자작은 영지 순회를 결정했다. 대신에 문수르를 대동하진 않았다.

이건 이제르트 자작의 노림수이기도 했다.

이제르트 자작이 이렇게 영지를 비우게 되면, 자연스럽게 문수르가 대리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 문수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메르디아 삼왕녀와 대화를 나누고 거래를 할 수 있게 된다.

적당한 구실을 명분 삼아 문수르와 메르디아 삼왕녀, 그 둘만을 협상 테이블 위에 앉힌 것이다.

문수르를 향한 무한한 신뢰였다.

문수르는 그런 이제르트 자작의 의중을 파악하고는 곧바로 자리를 마련했다.

메르디아 삼왕녀와 문수르, 그들이 둘만의 자리를 가지게 됐다.

9.

“영지의 갑작스런 일에 크게 놀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문수르는 일단 사과부터 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메르디아 삼왕녀는 죽을 뻔했다. 그건 분명한 이제르트 자작가의 책임이다.

실제로 누군가는 죽었다.

특히 메르디아 삼왕녀가 함께 데리고 온 시녀 중 한 명이 죽었다. 누가 보더라도 단순한 시녀가 아니었다. 메르디아 삼왕녀가 아끼는 시녀였다. 아마도 메르디아 삼왕녀의 손과 발을 대신해주는 시녀였겠지.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죠?”

메르디아 삼왕녀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녀 역시 문수르가 그저 아무런 이유 없이, 고작 사과를 하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메르디아 삼왕녀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오는 건 문수르 입장에서 나쁠 건 없었다.

‘왕관을 벗어주겠다?’

왕가의 인물이 왕관을 쓴 채로 활동하면 상대하는 귀족은 예법에 맞출 수밖에 없다.

반대로 상대가 알아서 왕관을 벗어주면 적당한 무례를 저질러도 문제될 건 없다.

사실 왕가의 인물 입장에서도 그 예법이란 걸 귀찮게 생각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길게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일의 배후에는 빅토리안 공작이 있습니다.”

단도직입!

문수르는 크게 터뜨렸다.

메르디아 삼왕녀는 기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지금 이 순간 빅토리안 공작이 거론될 줄은 몰랐다.

“그게 정말인가요?”

순간 메르디아 삼왕녀는 제가 한 말을 부정했다.

그걸 물을 때가 아니다.

“문수르 경은 당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나요?”

빅토리안 공작.

콩탄 왕국의 귀족들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자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왕가의 일원이기도 하다. 그의 몸에는 분명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왕가의 사이가 좋지 못하더라도 일개 기사가 함부로 운운할 만한 이름값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 표면적으로 빅토리안 공작와 필로스 왕은 좋은 관계다. 빅토리안 공작은 아직까지 친왕파란 허울을 벗지 않았다. 제이머스 후작과의 전쟁은 그냥 파벌 전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일단은 지금까진 그렇다.

필로스 왕 역시 이 상황에서 이러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최근 메르디아 삼왕녀를 이제르트 자작가에 보낸 것이 움직임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빅토리안 공작이 범인이라고?

하물며 이번 일에는 흑마법사가 관계되어 있다. 빅토리안 공작이 범인이라면 그건 곧 빅토리안 공작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민감한 주제다.

사실 그래서 문수르도 쉽게 그 카드를 선보이지 못했다.

빅토리안 공작이 흑마법사와 관계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었지만 쉽게 다른 이들에게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왕가의 인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오히려 그 발언을 한 문수르가 매장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겉으로는 아니지만, 필로스 왕은 이미 빅토리안 공작을 눈밖에 두었다.

호박씨를 가도 문제될 건 없다.

근거만 확실하다면 말이다.

그래서 꺼내는 거다.

“소개시켜드릴 분이 있습니다.”

문수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인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는 귀족가의 여식들과는 다르게 짧은 단발이었지만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귀족가의 그것이었다.

그것도 보통 귀족가의 분위기가 아니다. 명문가라 불리는 귀족가, 뿌리가 있는 귀족가의 느낌이다.

무엇보다 메르디아 삼왕녀는 그 여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다.

“제르둔 후작가의 여식?”

“제르둔 후작가의 유일한 생존자, 나탈라 제르둔이 메르디아 삼왕녀께 인사드립니다.”

나탈라 제르둔.

언젠가 빅토리안 공작의 정치적 생명에 비수로 꽂기 위해 문수르가 숨겨두었던 카드다.

물론 그 이후 마땅한 기회가 없어서 이리아의 가정교사나 다름없이 지내긴 했지만.

그런 그녀가 지금 등장했다.

‘양날의 검이다.’

솔직히 나탈라는 양날의 검 같은 존재다.

제 아무리 빅토리안 공작가의 음모라고 해도 반역으로 처형된 가문의 일원이다.

본래는 죽었어야 하는 여인이다. 그런 여인을 숨겨줬다는 것만으로도 이제르트 자작가는 위험하다. 더군다나 반역이 무엇인가? 왕가에 대한 도발이고, 도전이다. 왕가의 인물들만큼 반역에 민감한 자는 없다.

그래서 메르디아 삼왕녀가 나탈라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근래 들어 반역으로 처형된 가문은 제르둔 후작가 하나뿐이었으니까.

메르디아 삼왕녀는 문수르를 노려봤다. 왕가의 여식치고 조금 독특한 면이 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문수르 경, 반역자를 숨겨준 건가요?”

메르디아 삼왕녀의 발언.

“필요하시다면 이 자리에서 목을 베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문수르는 담담하게 받아쳤다.

진심이다.

메르디아 삼왕녀가 여기서 나탈라를 죽이라고 하면 죽일 것이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다.

“그러나 그 전에 나탈라, 그녀로부터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들을 가치가 있나요?”

“빅토리안 공작, 그가 진정한 반역자란 사실을 증명해줄 단서입니다.”

“빅토리안 공작이 반역을 저지른다고요?”

“빅토리안 공작은 본인이 흑마법사이며,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나탈라 제르둔, 그녀를 빼돌린 건 그 누구도 아닌 빅토리안 공작이었습니다. 비단 빅토리안 공작은 그녀만 빼돌린 게 아닙니다. 제르둔 후작마저 빼돌렸습니다. 처형당해 시체로 남았어야 하는 그들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모른다.

솔직히 문수르의 말만 듣고 결정을 내릴 순 없다.

그러나 빅토리안 공작과 필로스 왕가 사이에는 분명 균열이 존재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탈라가 살아있다는 건 분명 중요한 문제다.

그녀는 시체가 됐었어야 했다. 됐었어도 진즉에 됐었어야 했다.

더군다나 제르둔 가문에 대한 처리를 맡은 건 그 어디도 아닌 빅토리안 공작가였다.

나탈라의 생존은 빅토리안 공작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

메르디아 삼왕녀는 혼란스러웠다.

사람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가장 먼저 취하는 선택은 그 무엇도 아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선택이다.

어차피 무조건 골라야 한다면 보다 이익이 되는 선택지를 고르게 되는 게 사람 심리다.

메르디아 삼왕녀, 그녀가 원하는 건 뭘까?

‘할루이 이제르트의 유산이 필요해.’

할루이 이제르트.

그가 남긴 마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가능성을 봤다.

‘이제르트 자작가는 엘프와 손을 잡고 있어.’

이제르트 자작가에는 신비(神秘)가 존재한다. 그 신비의 배경에는 필시 할루이 이제르트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메르디아 삼왕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말했다.

“이야기는 듣겠어요.”

문수르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건 문수르, 더 나아가 이제르트 자작가의 약점을 쥐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약점을 이용해 원하는 걸 얻어낼 생각이었다.

문수르는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제 아무리 왕가의 인물이라고 해도 정치 경력이 없다는 게 여기서 드러나는군.’

이제까지 나름 열심히 신경전을 벌였던 메르디아 삼왕녀,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밑천이 드러나고 말았다.

밑천이 드러난 그녀가 문수르의 적수가 될 가능성은 전무했다.

============================ 작품 후기 ============================

소설 내에서 문수르가 지구과학력을 전폭적으로 이용하지 않는 건, 사실 소설 내 스토리 진행을 위한 무언의 장치입니다. 개연성 측면에서는 여러 부분에서 오류가 큰 게 사실입니다. 개연성에 영향을 주면서도 이런 장치를 설치한 이유는 제 작가 역량의 부족 때문입니다.... 사실 독자분들의 충고가 맞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과 충고해주시는 독자분들에게는 언제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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