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176화 (174/293)

176화

4.

순식간이었다.

자신을 대신에 앞장서서 시녀 메르비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허리춤이 잘려나갔다.

메르비의 하체는 경직된 채 꼿꼿이 서있었고, 상체는 미끄러지며 바닥 위에 너부러졌다.

너무나도 깨끗하게 잘려나간 절단면에서는 핏물조차 튀어오르지 않았다. 잘려나간 장기의 절단면이 너무 생생하고, 깨끗하게 보여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메르디아 삼왕녀는 이 갑작스런 상황에 대응하지 못했다. 나름 똑똑하고, 마법에 대한 지식도 깊은 그녀지만 이런 상황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상상해보지도 못했다.

사고가 정지됐다.

“꺄악!”

그 와중에도 본능이 메르디아 삼왕녀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나오도록 만들었다.

그 비명 소리와 함께 건물 곳곳에서, 방금 막 도착한 탈라트 부족의 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격!”

누군가 소리쳤다.

파바밧!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엘프들의 화살은 그 숫자가 많지 않았다. 날아오는 화살의 숫자는 일곱 개가 전부였다.

그러나 엘프들이 날린 화살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다.

무엇보다 그 화살은 폐욤 족장이 항마(降魔)의 마법을 담아 넣은 화살이기도 했다.

흑마법사의 사악한 마력을 정화시키는 재료로 화살촉을 만들고, 화살촉과 화살대에 마법을 새겨 넣었다.

흑마법의 피조물에게는 그 무엇보다 효과적인 무기였다.

푸부붓!

결과는 확실했다.

일곱 개의 화살이 전부 명중했다.

퍼엉!

화살에 맞은 다크 나이트의 몸뚱이가 폭발했다. 다크 나이트의 몸을 이루는 어둠이 항마마법에 의해서 힘을 잃은 것이다.

가누스의 오러 공격에도 거뜬했던 놈이 고작 화살 공격에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었다.

일곱 발이나 맞았고, 때문에 한순간에 다크 나이트의 온몸이 터져나갔지만 이후 다크 나이트는 다시금 제 모습을 갖추었다. 힘이 빠지긴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무너진 몸, 산산조각 난 몸을 복구하는 데에까지 걸린 시간, 그 시간 동안 탈라트 부족의 엘프들은 메르디아 삼왕녀를 구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메르디아 삼왕녀를 구출한 건 히스티였다.

히스티의 품 안에 안긴 메르디아 삼왕녀는 공포에 질릴 눈으로 히스티를 바라봤다.

“에, 엘프?”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히스티의 뾰족한 귀는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사실 메르디아 삼왕녀는 엘프를 몇 번 봤다. 콩탄 왕국에서 엘프는 귀한 노예인 탓에 보기 힘들지만, 왕가의 인물 정도라면 엘프 정도를 보는 건 어렵지 않다. 물론 그녀가 본 엘프들은 전부 여성 엘프였고, 가혹한 성적 학대에 인격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까웠다. 그래서 메르디아 삼왕녀는 엘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을 안고 있는 엘프는 달랐다. 그 엘프의 눈동자는 그 누구보다 불타오르고 있었다.

반면 히스티는 메르디아 삼왕녀의 반응에 이를 물었다.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메르디아 삼왕녀가 이리아 이제르트의 말을 듣고 대피소에 얌전히 들어갔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흥.’

이런 인간 때문에 엘프들이 목숨을 걸어야 하다니?

히스티는 메르디아 삼왕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개인적은 감정은 거기까지였다. 히스티 그녀도 가누스처럼 이제르트 자작령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르트 자작령에서는 엘프들이 마음껏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 엘프 사냥꾼들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몬스터들의 위협도 이제는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생활이 풍족하다. 겨울이 와도 언제든 배가 부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다.

이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탈라트 부족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각오는 얼마든지 있었다.

‘일단 여길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다.’

다른 건 볼 것 없다.

지금 당장 메르디아 삼왕녀를 데리고 대피소로 이동할 것이다. 문수르와 말론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대피소는 그 어느 것보다 안전하다.

“당신 엘프가 맞는 거죠?”

그런 히스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메르디아 삼왕녀는 히스티에게 질문을 던졌다.

“왕녀님, 조용하세요. 지금 상황이 어떤 지 아세요? 지금 당신을 잡기 위해 흑마법사가 움직였어요.”

히스티는 그런 메르디아 삼왕녀에게 짧게 충고했다.

메르디아 삼왕녀 입장에서는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오냐오냐, 좋은 말만 듣고 자랐던 그녀에게 충고를 던질 만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메르디아 삼왕녀는 그 충고를 그냥 한 귀로 듣고 넘길 정도로 멍청한 여인은 아니었다.

나름 머리가 돌아간다.

그리고 꿈도 있다.

그런 게 있으니까 이제르트 자작령에 온 것이고, 안전한 대피소가 아닌 모험을 택한 것이다.

물론 그 행동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긴 했지만, 메르디아 삼왕녀라고 일부러 문제를 일으킬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다.

“죄송해요.”

메르디아 삼왕녀 입장에서 사과가 나왔다.

그 순간 히스티는 메르디아 삼왕녀를 놓칠 뻔했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죄송하다고?’

왕가의 인물.

계급을 두는 인간들의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인물.

고개를 숙이는 날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날이 훨씬 더 많은 인물.

사과따윌 하지 않아도 그 누구도 무어라 하지 않는 인물.

그런 인물이 노예 취급이나 받는 엘프의 충고에 지금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알겠어요.”

믿을 수 없는 일인데 기분은 나쁘지 않다.

“그보다 지금 저거, 다크 나이트가 맞는 거죠?”

한편 메르디아 삼왕녀의 머리는 빠르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메르비 시녀의 죽음은 충격적이다.

지금도 그녀의 죽음이 눈앞에 선명하다. 그녀의 시체가, 잘려나간 몸뚱이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미칠 것 같다.

미칠 것 같은데…… 메르디아 삼왕녀는 이 상황에서도 머리가 돌아갔다.

필로스 왕의 피를 이은 탓일까?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메르디아 삼왕녀는 질질 짜기보다는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고 있었다.

“다크 나이트는 다루기 힘든 존재에요.”

“갑자기 무슨 소리죠?”

“책에서 봤어요. 다크 나이트는 강력하지만 수행할 수 있는 명령은 제한적이에요. 그래서 흑마법사들은 어느 순간부터 다크 나이트를 쓰지 않기 시작했어요.”

“쉽게 말해보세요.”

“다크 나이트는 강하지만 멍청해요.”

강함과 지식은 상관관계 있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다.

다크 나이트.

무시무시한 존재다. 항마 마법이 아니면 오러 나이트조차 피해를 주기 힘들 정도다.

거기에 어둠 속에서 다크 나이트는 어디든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요인 암살에 있어서 다크 나이트만큼 특화된 존재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흑마법사들은 다크 나이트를 어느 순간부터 외면하기 시작했다.

다크 나이트보다 오히려 데스나이트가 더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 이유는 하나, 다크 나이트가 멍청하기 때문이다.

암살자에게 가장 주요한 능력 중 하나가 상황 대처 능력이다. 인간은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평소처럼 행동하다가 어느 순간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할 수도 있다.

그 변수에 대한 대응력이 뛰어날수록 암살 성공률도 높아진다.

그런데 다크 나이트는 그게 없다. 대상을 지목해서 암살을 지시하면 잘 따른다.

특히 암살 성공 후가 문제다.

암살 성공 직후 다크 나이트는 그냥 물러난다. 상대가 죽은 걸 확인하는 순간 더 이상 뒤로 돌아보지 않고 귀환한다.

상대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그런 건 절대 확인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애초에 암살 위협에 언제나 노출되는 왕이나 영주들 중 일부는 가짜 대역을 두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보통 암살자는 그 가짜 대역도 고려해서 움직인다.

그러나 다크 나이트는 그런 게 없다.

물론 언제나 가짜 대역을 둘 수만은 없다. 더불어 가짜 대역이라고 해도 진짜가 당할 위험도 있다.

핵심은 다크 나이트가 그 정도 분별도 못할 정도로 멍청하다는 것이다.

그 부분을 노리고 들어가면 된다.

“환각 마법이 있어요. 다크 나이트에 환각 마법만 걸 수 있으면 무력화시킬 수 있어요.”

환각 마법!

다크 나이트를 착각하게 만드는 거다.

표적을 처치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다.

이 방법이 나온 순간 흑마법사들은 다크 나이트를 포기했다. 환각 마법 하나에 무력화되는 다크 나이트에 비싼 돈과 정성을 기울일 바에는 다른 일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 메르디아 삼왕녀의 답에 히스티는 놀랐다.

그리고 그 순간 메르디아 삼왕녀보다 훨씬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를 준비하는 자가 있었다.

폐욤 족장, 그가 나선 것이다.

5.

데스나이트의 움직임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눈치를 챈 건, 아이언히트 두 대가 더 쓰러지고 난 후였다.

데스나이트는 아직 85기가 건재한 상황. 의외로 상황이 이제르트 자작가 쪽에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어쩔 수 없었다.

데스나이트는 지치지 않지만, 기가스 파일럿은 지친다. 기가스 파일럿에게 1시간 동안 기가스를 조종한다는 건 1시간 동안 마라톤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피로도가 쌓이면 저절로 틈이 생긴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문수르는 당연히 공격보다는 방어에 집중했다.

‘아침까지 버티자.’

이미 문수르는 상대의 전멸보다 아침까지 버티며 전력을 최대한 유지하는 쪽으로 결단을 내린 상황이었다.

이러니 데스나이트의 숫자는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공격을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미치도록 공세를 퍼붓던 데스나이트의 움직임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동안 파도처럼 몰려오던 데스나이트들이 소나기가 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어마어마한 공세였지만, 진심을 담은 공격이 어느 순간부터 견제를 포함한 공격으로 바뀌었다.

‘물러나려고 한다.’

딱 봐도 조짐이 느껴진다.

지금 데스나이트들은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

이해하기 힘들다.

데스나이트 입장에서는 지금 호기를 잡은 것이다. 더 몰아 붙이면 상대를 전멸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공세를 줄이는 걸까?

전쟁으로 보자.

데스나이트는 단순한 몬스터가 아니다. 놈들은 기사다. 물론 진짜 기사가 아니라 몬스터를 훈련시켜 만들었기에 전략적, 전술적 움직임이 굉장히 떨어지긴 하겠지만 적어도 본능보다는 명령을 받고 움직일 줄 아는 놈들이다.

놈들의 행동에는 필시 이유가 있다.

공격하던 놈들이 물러날 때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건 무리다, 라고 느낄 때. 포기다.

다른 하나는 목적 일부가 달성되었을 때. 더 이상 문을 두드릴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거다.

지금 경우는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설마!’

놈들의 목표가 정말 메르디아 삼왕녀라면…….

‘젠장!’

메르디아 삼왕녀 암살에 성공했다면 더 이상 피해를 감수하고 전투를 치를 필요는 없겠지.

‘신경을 끌 수가 없잖아!’

제 아무리 메르디아 삼왕녀에 대한 모든 일을 가누스에게 믿고 맡기기로 각오를 다졌지만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로이드.”

- 폐욤 족장이 움직였습니다.

“무슨 말이야?”

- 폐욤 족장이 마법을 사용하자, 메르디아 삼왕녀를 노리던 무리들이 갑자기 물러났습니다.

“그게…….”

-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습니다.

“메르디아 삼왕녀는?”

- 무사합니다.

메르디아 삼왕녀가 무사한데 물러난다?

목적이 메르디아 삼왕녀가 아니었다는 건가? 그게 아니면 폐욤 족장이 어떤 술수를 부린 걸까?

‘좋아.’

이 순간 문수르는 사고의 방향을 바꿨다.

“로이드, 추적은?”

- 흔적이 드문드문 나있는 탓에 추적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침이 된다면 해볼만하다.

그러나 아직은 새벽이다. 어떤 의미에서 물러나기에 최적의 타이밍이다. 추격을 허용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럼 추격을 포기한다.

‘흑마법사의 습격.’

이제부터 생각해야 하는 건 메르디아 삼왕녀를 포섭하는 일이다.

그녀는 암살 위협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암살 위협을 당한 것처럼 만들어야지.’

흑마법사로부터의 암살 위협.

그리고 빅토리안 공작.

여기에 문수르가 가진 몇 개의 카드들.

이 모든 것들을 적당히 조합한다면?

‘드디어 나탈라, 그녀를 꺼낼 때가 온 듯하군.’

문수르의 머릿속에 메르디아 삼왕녀를 완벽한 우군으로 만들 수 있는 계획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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