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51화. 새벽녘.>
1.
데스나이트를 상대로 드래곤 파이터와 아이언히트는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텼다.
더불어 성벽 위에 오른 병사들은 그냥 놀지만 않았다.
데스나이트라는 엄청난 적을 상대로 그들은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공세를 바꾸었다.
“대형몬스터라고 생각하면 돼!”
“발리스타를 준비해!”
애초에 이제르트 자작령의 성벽은 사람을 막기보다는 몬스터를 막는데 중점을 뒀다.
테블스 산을 상대하기 위해 세운 성벽이다.
더불어 문수르는 이런 성벽 위에 쓸만한 전투 병기를 설치하는 걸 잊지 않았다.
제 아무리 병사들을 단련시켜고, 도검이나 활 따위로는 줄 수 있는 데미지는 한계가 있다.
자이언트 트롤, 오우거와 같이 거대한 놈을 잡기 위해서는 그에 버금가는 무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만든 게 발리스타였다.
단순한 발리스타가 아니었다. 병사 열 명이 달라붙어야 겨우 한 대를 제대로 작동시킬 수 있는 크기의 발리스타다. 거기에 장착되는 화살은 화살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창에 가깝다.
그 창이 날아가는 것 자체가 신기(神技)에 가까울 정도다.
그렇기에 위력적이었다.
이제르트 자작령의 병사들은 적지만, 많아봐야 한 번에 대여섯 발 정도지만, 그래도 열심히 발리스타를 장전했다.
그건 결정적인 도움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도움은 됐다. 단 한 기의 데스나이트도 처치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시간을 끄는 데 있어서는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전장을 바라보고, 전장에 있는 이들에게는 1초가 하루 같은 시간, 그래도 시간은 흘렀다.
쿠궁!
그제야 지원군이 도착했다.
호우투 부족, 탈라트 부족에서 보낸 아이언히트가, 통합 18기의 아이언히트가 전장에 새로 참가한 것이다.
2.
18기나 되는 아이언히트의 참전.
그것으로 인해 전황은 확실히 바뀌었다. 그동안 수세만 취하던 이제르트 자작가는 곧바로 공세를 취했다.
18기의 아이언히트가 전투 포메이션을 취한 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제 아무리 몬스터로 만들어낸 데스나이트라고 해도 그 무시무시한 기가스 앞에서는 제대로 버틸 리 만무했다.
더군다나 방패를 앞세우고, 그 사이로 창을 내찌르는 아이언히트의 전술은 제각각 따로 노는 데스나이트들을 곤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콰직, 콰직!
아이언히트의 창이 데스나이트의 몸뚱이를, 갑옷을 사정없이 찌르고, 분질렀다.
카앙, 카앙!
그러나 데스나이트들도 반격을 시도했다. 거대한 검을 휘둘러 아이언히트에 공격을 퍼부었다.
공격은 굉장히 위력적이었다.
특수제작한 방패가 아니었다면 진즉이 아이언히트의 본체가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콰직!
“으악! 빌어먹을!”
더군다나 방패는 무적이 아니다. 사용자가 방심하는 순간, 틈을 보이는 순간, 방패는 무용지물이 된다.
그리고 데스나이트는 그 틈을 노리고 공격을 시도했다. 거대한 검을 휘둘러 아이언히트의 동체를 공격했다.
데스나이트는 단순한 몬스터와 차원이 달랐다. 놈들은 기사였다. 기사의 검을 익힌 놈들이었다.
놈들의 검은 교묘했으며, 놈들은 검에 위력을 실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데스나이트의 공격은 강력했다.
틈을 보인 아이언히트는 그 공격을 쉬이 버티지 못했다.
기어코 아이언히트 한 대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데스나이트들이 넘어진 아이언히트에 달려들었다.
“막아!”
“방패를 들어!”
다른 아이언히트 파일럿이 잽싸게 방패를 앞세웠으나, 이미 늦었다.
콰직, 콰지직!
데스나이트의 검들이 무방비한 아이언히트를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파일럿이 탑승한 가슴 부위도 엉망이 됐다. 파일럿은 그 자리에서 즉사였다. 생존가능성은 1퍼센트조차 되지 않았다.
사망자의 발생.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의 끈이 잘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쿠웅!
그때였다.
굉음과 함께 조각난 데스나이트의 몸뚱이가 전장에 흩뿌려졌다.
드래곤 파이터.
전장의 중심에 그 거대한 기가스가 굳건하게 섰다. 그리고 창을 머리 높이 들고 흔들었다.
그건 지휘였다.
전장의 모든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지휘였다.
동료의 죽음에 잠시 멍해졌던 파일럿들이 그 지휘에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복수다!”
“공격하자!”
허탈감은 어느새 분노로 바뀌었다. 힘이 빠져가던 파일럿들의 몸뚱이게 분노라는 연료가 가득 찼다. 분노는 활활 타올랐다. 파일럿들의 기세도 활활 타올랐다.
아이언히트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래곤 파이터도 움직였다.
3.
이제르트 자작가의 모든 전력을 투입했다.
그러나 상황은 백중지세.
이제까지 데스나이트 수십여 기를 후려친 것 같은데 막상 바닥에 너부러진 데스나이트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로이드, 몇 기 남았지?”
- 89기 남았습니다.
“간신히 20기 정도 처치한 건가? 우리쪽 피해는?”
- 아이언히트 3대 파손, 그 중 한 대는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 정도가 심각합니다. 기가스 파일럿은 두 명 사망했으며, 한 명은 부상을 입었습니다만, 치료가 가능한 수준입니다.
아이언히트 3대 파손.
큰 피해다. 그러나 아이언히트의 제조 단가를 생각하면, 보통 기가스 1대가 파손한 것보다 저렴하다.
오히려 파일럿의 부상이 더 뼈아프다. 아이언히트의 동력원만 수거할 수 있다면, 동체 제작은 어렵지 않다. 물론 그 동력원 하나가 못쓸 정도로 파괴된 거지만.
반대로 데스나이트는 무려 20여 기를 처치했다. 데스나이트의 강력함을 생각하면 엄청난 성과다.
“수치상으로는 나름 선전했다는 거군.”
- 하지만 전체적으로 피로가 누적되었습니다. 반대로 데스나이트들은 피로도 누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빌어먹을.”
데스나이트.
흑마법으로 만들어낸 이 생명체는 지칠 줄은 모른다.
‘마법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할 걸.’
아무래도 단순 물리공격만으로는 큰 성과를 얻을 수 없는 것 같다. 마법적인 차원에서의 접근이 필요할 것 같다.
“데스나이트를 처치할 수 있는 방법은?”
- 데스나이트는 어둠 속에서는 무적에 가깝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해가 뜰 때까지 버티는 겁니다. 태양 아래에서는 데스나이트는 가진 힘의 절반도 끌어내지 못합니다.
“아침까지 기다리다간 전력 피해가 클 거야. 다른 방법은?”
- 항마(降魔) 계열의 마법을 사용하면 보다 큰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마법사가 없잖아.”
- 없긴 왜 없습니까? 훌륭한 마법사 한 명이 있잖습니까?
“폐욤?”
그 순간 폐욤 족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확실히 그는 훌륭한 마법사다.
그라면 이 상황을 좀 더 타개할 만한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일단 아침까지 버틴다.’
그러나 지금 당장 폐욤과 대화를 나누기에는 상황이 너무 긴박하다.
가장 좋은 건 결국 아침까지 버티는 거다. 태양이 뜨는 순간, 이 전쟁은 끝이 난다.
어쩌면 태양이 뜨기 전에 데스나이트의 주인이 데스나이트를 데리고 도망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추격전이지.’
그때를 대비해서 전력을 아껴둘 필요가 있다.
막말로 이렇게까지 엄청난 전쟁을 치렀는데, 상대를 괴멸시킬 정도의 피해를 입혀야 한다.
‘그보다 대체 데스나이트가 어디에서…….’
한편으로는 의문이 생겼다.
이 데스나이트들은 정말 막강하다. 이제르트 자작령이니까 이렇게 전쟁이 가능한 거다.
보통의 영지였다면 전쟁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방적인 학살만 이루어졌겠지.
강력한 전력이다.
영지가 아닌 왕국에 위협을 줄 정도로 말이다.
더군다나 케르빈 월드를 기점으로 봤을 때 신기술을 이용한 병기의 등장이기도 하다.
기존의 기가스에 사용된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을 이용한 병기. 더군다나 그 기술의 목적은 명백하게도 기가스를 상대하는 것이다.
기가스의 시대에 도전하는 기술이다.
그런 기술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 만무하다.
‘난 하늘에서 뚝 떨어졌지만.’
물론 문수르와 같은 경우를 생각하면,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지도 모르지만 그건 확률이 너무 낮다.
‘목적도 분명히 해야 돼. 이런 엄청난 전력을 고작 메르디아 삼왕녀 암살 또는 납치하는데 쓸까?’
처음 습격이 온다고 했을 때 목적은 메르디아 삼왕녀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습격의 이유가, 배경이 될만한 변수는 메르디아 삼왕녀 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적도 많다.
빅토리안 공작은 흑마법사다. 흑마법사는 나름 흑마법사들끼리의 커뮤니티가 있다. 베르베 백작 일도 그렇다. 베르베 백작이 이제르트 자작령을 공격했을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이 이제르트 자작령을 놓고 단합대회를 벌였다.
빅토리안 공작은 테블스 산의 흑마법사와 어느 정도 커뮤니케이션이 된다는 소리다.
그런 빅토리안 공작 입장에서 이제르트 자작가와 필로스 왕의 왕가와 손을 잡는 건 그다지 반갑지 못한 일.
‘그래도 너무 심해.’
하지만 소를 잡는 데에는 소 잡는 칼이 필요한 법이다. 소를 잡으려고 기가스를 끌고 나오는 인간은 없다.
지금이 그 꼴이다.
‘대체 뭐지?’
다른 무언가가 있다.
음모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거대한 계획이라고 해야 할지…… 확실하진 않지만 필시 다른 무언가가 있다.
적어도 이제르트 자작가, 그 하나에만 집중된 무언가가 아니다.
‘궁극적 목적은 콩탄 왕국이겠지.’
“로이드.”
- 말씀하시죠.
“GPS시스템에 여력이 남아?”
- 그렇게 많이 남지는 않습니다. 추가 탐사 지역 설정은…… 힘들 것으로 사료됩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여력은 남긴 남지.”
- 예.
“그럼 데스나이트가 온 루트를 되짚을 수 있어?”
-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제르트 자작령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 내성에서 전투가 치러지고 있습니다. 가누스가 교전 중이며 엘프들이 메르디아 삼왕녀의 주변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아…….
“아?”
갑작스레 말끝에 여운을 붙이는 로이드. 대부분 계산대로 대답하는 로이드가 말끝에 여운을 붙이는 건 굉장히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무슨 일이야? 왜 말끝을 흐려?”
- 방금 메르디아 삼왕녀가 공격을 당했습니다.
“뭐?”
그 순간 문수르의 입에서 비명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콰앙!
동시에 데스나이트 세 기가 드래곤 파이터를 향해 동시에 검을 날렸다.
힘이 실린 세 개의 검은 드래곤 파이터의 동체를 강하게 후려쳤다. 세 방향에서 날아오는 공격이었기에 피하는 것도, 방어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크윽!”
갑작스런 동체의 흔들림.
그러나 당혹감은 없었다.
문수르는 반사적으로 와이어를 조작했다. 드래곤 파이터의 창이 크게 반월을 그렸다.
정면에 있던 데스나이트 한 기를 후려쳤다.
그 기세를 몰아 측면에 있던 데스나이트까지 동시에 후려쳤다.
후방에 있던 데스나이트는 오히려 드래곤 파이터의 그 틈을 노리고 검을 찔러 들어왔다.
그러나 드래곤 파이터는 뒤에도 눈이 달려 있다.
후방은 사각이 아니다.
휘익!
드래곤 파이터의 상체가 비틀어졌다. 데스나이트의 검이 비틀어지는 상체에 튕겨 나갔다.
그 비틀기에서 나온 회전력, 그 회전력을 창에 담았다. 드래곤 파이터의 다리가 살짝 움직였다. 회전이 멈추지 않았다.
콰직!
이윽고 후방에 있던 데스나이트까지 창에 맞고 날아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창에 맞고 날아간 데스나이트들이 갑옷은 흉물스럽게 찌그러졌지만, 데스나이트는 무사했다.
‘갈기갈기 찢지 않는 이상 답이 없군.’
그 순간 문수르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억지로 억눌렀다.
‘전장이다.’
솔직히 지금 딴생각을 할 여유는 없다.
전장이다.
눈앞에는 이제르트 자작가 역사상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적(敵)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 데스나이트를 막지 못하면 이제르트 자작가는 끝장이다. 정치고, 미래고, 나발이고 전부 물거품이 된다.
메르디아 삼왕녀?
지금 문수르가 어찌할 수 없다.
죽으면 어쩔 수 없는 거다.
정말 중요한 건 이제르트 자작의 목숨이다. 이제르트 자작의 목숨과 메르디아 삼왕녀의 목숨,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무조건 이제르트 자작의 목숨이다.
그러니까 신경을 끊는 거다.
‘가누스를 믿는다.’
문수르는 가누스에게 모든 걸 위임했다.
그 각오와 함께 메르디아 삼왕녀에 대한 모든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