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4.
퍼엉!
하늘 위로 솟아올라 터지는 초록 빛무리에 포비어의 표정은 무겁게 굳어버렸다.
‘도움 요청이다.’
문수르와 사전에 나누었던 여러 종류의 합의.
그중에서 최악의 경우가 지금 펼쳐지고 있다.
“젠장.”
포비어는 이부터 갈았다.
솔직히 포비어는 이제르트 자작가를 계속해서 덮치는 재난이 너무나도 싫었다. 산을 하나 넘으면 새로운 산이 등장한다. 계속되는 재난 앞에서 숨을 돌릴 틈이 없을 지경이다.
정말 신이 있다면, 이제르트 자작가를 증오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분노는 잠시였다.
포비어는 스스로를 추스르고 상황을 바로보았다. 분노에 몸을 맡기기엔 상황이 좋지 못하다.
‘일단 가누스 경을 움직이고…….’
가누스에게 메르디아 삼왕녀의 호위를 맡긴다. 이건 이미 문수르로부터 들었다.
이미 병사를 움직였다. 대기 중이던 가누스는 곧바로 메르디아 삼왕녀의 호위로 붙을 것이다.
“이제는 추가 지원병을 요청해야겠군.”
지금 이 순간 포비어가 해야 할 일은 영지 외곽에 대기 중인 탈라트 부족과 호우투 부족의 아이언히트를 전장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 역시는 준비는 되어 있다. 명령만, 의사만 전달하면 된다.
금방 끝날 일이다.
그리고 모든 일을 처리한 후에는 포비어도 전장에 나가야 한다.
기가스를 이끌고 말이다.
“대체 전장에 뭐가 등장했기에?”
여기서 포비어는 긴장했다.
아이언히트 7대가 나섰다. 여기에 병사들도 경비를 선 상황. 심지어 문수르는 직접 드래곤 파이터를 이끌고 나갔다.
드래곤 파이터의 전투력은 무시무시하다.
대여섯 대의 기가스 정도는 혼자 상대할 정도다. 아이언히트의 보조를 받는다면 과연 기가스를 몇 대까지 상대할 수 있을지, 상상조차 안 될 지경이다.
그런데 추가 도움을 요청했다.
이번 요청으로 숨기고자 했던 엘프와 드워프, 그들의 존재가 드러날 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말이다.
보통 적이 아니라 엄청난 적이 등장했다는 의미다.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의 적이 말이다.
꿀꺽!
포비어는 침을 삼켰다.
“정신 차려야지.”
5.
가누스는 포비어로부터 문수르의 명령을 들었다.
“흥.”
명령을 들었을 때 가누스는 콧방귀부터 뀌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가누스는 문수르의 명령을 거부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나보고 인간을 호위하라고?’
단지 우스울 뿐이었다.
‘나도 참 웃기는군.’
평생 인간과 반목하며 살아왔다.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은 제 사욕을 위해 엘프를 노리고, 엘프는 그런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때문에 인간과는 싸우다 죽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다 보니 이제 인간을 호위하는 처지가 됐다.
자신의 처지를 비하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말 그대로, 우스울 뿐이었다.
‘하긴, 그 인간…….’
더불어 메르디아 삼왕녀에 대해서는 가누스 역시 나름 눈 여겨 보고 있었다.
메르디아 삼왕녀를 본 건 언뜻 스쳐 지나가며서 본 게 전부다. 문수르도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로 짧은 순간이다.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가누스가 누구인가?
탈라트 부족 출신의 오러 마스터다. 또한 수백 년을 살아온 엘프 검사이기도 하다.
능력과 경력, 두 가지 모두를 가진 그다.
짧게 스쳐봐도 충분하다.
‘마법사였는데…….’
한 눈에 알아봤다. 메르디아 삼왕녀라는 인간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마법사는 어떤 의미에서 엘프에 가까운 존재이기도 하다. 자연과 굉장한 친밀도를 가진다.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난다.
가누스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메르디아 삼왕녀 근처를 맴돌기 시작했다.
근접해서 호위할 생각은 없었다. 정체가 드러내는 건 아무래도 좀 그러니까.
물론 정말 중요한 순간, 위험한 순간이라면 움직일 것이다.
‘음?’
그런 순간이 빨리 찾아올 것 같다.
츠릉!
가누스는 검을 뽑았다.
아직 적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가누스는 일찌감치 검부터 뽑은 것이다.
가누스가 적을 단순한 조무래기가 아닌 강력한 적,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생각보다…… 힘들겠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무언가가 오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강력한 기운을 풍기는 놈이 올 줄은 몰랐다.
가누스가 움직였다.
‘근접에서 호위해야 한다.’
여차하면 교전이 아닌 도주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메르디아 삼왕녀와 함께 말이다.
움직이면서 가누스는 준비한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삐이이!
피리에서는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엘프들이라면 들을 수 있는 소리다.
그 소리는 곧바로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대기 중인 다른 엘프들의 귀에 들어갔다.
가누스는 탈라트 부족의 엘프 검사들을 이끄는 수장이기도 하다. 가누스가 원하든, 원치 않던 그의 주변에는 탈라트 부족의 검사들이 달라붙는다. 가누스는 그들을 불렀다.
‘이제르트 자작의 딸도 챙겨야지.’
가누스가 챙겨야할 목숨은 세 명이다.
이제르트 자작과 그의 딸인 이리아 이제르트. 그리고 메르디아 삼왕녀다.
긴급한 상황에서 이 셋 모두를 가누스 혼자 챙기는 건 쉽지 않다.
‘왔다.’
생각은 거기까지.
가누스는 벌써 근접한 적을 향해 움직였다. 이미 뽑힌 가누스의 검이 시퍼런 오러를 내뿜었다.
적 역시 가누스의 오러를 발견한 듯 움직임이 바뀌었다.
가누스를 향해 돌진했다.
시퍼렇게 솟아오른 오러를 보고도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기는커녕 강공을 택한 것이다.
가누스는 가소롭다고 여겼다.
‘어딜 감히!’
단칼!
쉬익!
가누스의 검이 사선을 그었다.
어둠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기고 있던 습격자의 몸뚱이로 갈라졌다.
“음!”
그 순간 가누스가 뒤로 몸을 날렸다.
거대한 낫이 가누스의 잔형을 싹둑! 베어버렸다.
‘베었는데?’
몸이 사선으로 갈라졌다. 반격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 반격이 날아왔다.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군.’
몸이 반으로 갈리고도 반격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시체뿐이다.
가누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흑마법이군.”
흑마법!
탈라트 부족에게는 그렇게 머나먼 존재가 아니다. 테블스 산에는 적지 않은 수의 흑마법사가 있다. 그리고 일부 흑마법사는 테블스 산의 엘프들을 노린다.
성욕의 대상으로 노리는 자들도 있고, 인체 실험의 대상으로 노리는 자들도 있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아서 혹은 제물로 바치려고 노리는 자들도 있다.
몇 번 흑마법사와 충돌하기도 했다.
그런 가누스에게 흑마법이란 의외로 친숙한 소재였다.
더불어 가누스의 분노를 단숨에 한계치까지 끌어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재이기도 했다.
“시체 주제에!”
가누스의 눈이 분노로 불타올랐다. 가누스의 검이 보다 시퍼런 오러를 내뿜기 시작했다.
오러의 길이는 단숨에 3미터까지 길어졌다.
가누스는 그 오러를 휘둘렀다.
휘리리릭!
그건 검이라기보다는 채찍에 가까웠다. 닿는 대상을 찢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채찍!
촤악!
가누스의 검이 적을 후려쳤다. 가누스의 검에 맞은 적은 단숨에 반으로 잘렸다.
잘림과 동시에 거대한 충격파에 날아가버렸다.
무시무시한 공격이다.
그러나 그 순간 다시금 시커먼 낫이 섬뜩한 날을 드러낸 채 가누스를 향해 날아왔다.
가누스는 검을 들었다.
카앙!
검과 낫이 충돌하며 거친 소리를 뱉었다. 가누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시야가 좁혀졌다. 동공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둠 속에 있는 존재가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가누스가 확실하게 베었던 존재, 단숨에 잘라내고 박살을 냈던 존재가 다시 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갑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갑옷 안에 있는 건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었다. 시체도 아니었다.
‘연기?’
검은 연기!
갑옷은 검은 연기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제야 가누스는 적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다크 나이트(Dark Knight)!’
흑마법으로 만들어낸 강력한 기사! 어떤 의미에서는 데스나이트에 버금가는 괴물이라 평가 받는 어둠의 기사!
다크 나이트!
놈이 등장했다.
가누스는 검을 고쳐 잡았다.
“아무래도…… 오늘 일진은 최악이겠군.”
두근두근!
그 순간 가누스의 심장이 긴장감에 떨리기 시작했다.
6.
‘뭐지?’
메르디아 삼왕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왕녀님, 이쪽으로 오세요.”
이리아는 그런 메르디아 삼왕녀를 내성 안쪽에 위치한 대피소로 안내했다.
혹시 모를 상황.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문수르는 말론을 시켜 이제르트 자작령 내성 내에 대피소를 만들었다.
그 어떤 외부의 충격에서도 버틸 수 있는 장소였다. 또한 내부에는 최소 세 달 이상 버틸 수 있는 식량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그곳보다 안전한 곳은 없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그러나 그 사실을 메르디아 삼왕녀가 알 리 만무하다. 애초에 대피소에 대해서 아는 사람 자체가 극소수다.
“대피소에요.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그런가요?”
대답을 한 메르디아 삼왕녀가 저도 모르게 대화 도중에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너무나 긴급한 그 모습에 이리아 역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죠?”
그러나 이리아가 바라본 방향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어둠만 짙게 깔려 있었다.
“아니에요.”
메르디아 삼왕녀는 대충 얼버무렸다.
이윽고 이리아와 메르디아 삼왕녀가 대피소 입구 앞에 도착했다. 대피소 문은 특이하게 생겼다. 이상한 막대기를 돌려야만 문이 열리는 구조였다.
“신기하군요.”
“안에서는 얼마든지 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밖에서는 여는 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리아가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사실 이리아는 지금 메르디아 삼왕녀에게 어떻게든 이제르트 자작가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왕가의 인물에게 이제르트 자작가의 능력을 선보여서 나쁠 건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메르디아 삼왕녀가 온 것 자체가 이제르트 자작가와 왕가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안에 들어가면 언제든지 문을 열 수 있다고요?”
“예.”
“신기하네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슬립!”
메르디아 삼왕녀의 손목에 찬 팔찌가 빛을 뿜었다. 동시에 이리아의 몸이 휘청거렸다.
털썩!
이리아는 그 자리에서 잠들었다.
“세르비!”
그리고 이리아가 시녀 세르비를 불렀다. 그러자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시녀 세르비가 잽싸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아 이제르트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세요.”
“왕녀님, 지금 이제르트 자작령의 낌새가 좋지 않습니다. 지금은 이리아 이제르트와 함께 대피소로 피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아니에요. 지금이 절호의 기회에요. 어쩌면 지금만이 이제르트 자작가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유일한 상황일지도 몰라요.”
“그래도 위험합니다. 왕녀님의 신병이 가장 중요합니다.”
“걱정마요. 메르비와 함께 움직일 테니.”
“그래도…….”
시녀 세르비의 계속되는 걱정에 메르디아 삼왕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명령이에요.”
"명을 받듭니다."
명령이라는 말에 세르비는 더 이상 반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