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3.
문수르는 멀티 글라스를 착용했다.
번쩍!
그러자 전장의 상황이, 멀리 떨어진 성 너머의 광경이 눈앞에 들어왔다. 문수르의 눈이 빠르게 상황을 살폈다.
개체 수는 많지 않다.
백 단위다. 그것도 간신히 백을 넘는 수치다.
몬스터의 덩치도 크지 않다. 트롤 정도다. 무시무시한 오우거나 자이언트 트롤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다.
어렴풋한 겉모습의 크기만 보면 이상할 것 없다. 애초에 몬스터란 건 덩치 큰 놈이 더 무시무시한 법이다. 덩치가 없는 놈은 약하다. 몬스터의 세계란 그런 논리가 정설로 통하는 세계다.
때문에 크기 자체는 그다지 위기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을 정도다.
그런데…….
“장난 아니군.”
느껴지는 힘이 장난 아니다.
보면 알 수 있다. 그냥 단순하게 걷는 것 같은데 주변의 나무들이 하염없이 쓰러지고 있다.
그냥 단순히 나무가 부러지는 게 아니다.
'장난 아니군.'
숲이 농락당하고 있다.
테블스 산의 그 무지막지한 몬스터들 사이에서도 수천 년 동안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고, 어떤 의미에서 테블스 산의 절대적인 터줏대감으로 살아왔던 나무가, 숲이 겁을 잔뜩 먹은 게 눈에 보일 정도다.
이건 아니다.
‘자연적으로 태어난 놈들이 아니야.’
이제 문수르도 경력이 쌓였다. 몬스터도 상대해봤고, 흑마법사의 피조물도 상대해봤다. 기가스도 상대해봤다.
보면 알 수 있다.
저게 자연적으로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그리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면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아주 사특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흑마법이다.’
느낌이 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뱃속이 꿈틀거리는 느낌. 살아있는 생물체라면 거부할 수밖에 없는 느낌. 그 존재를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느낌.
‘흑마법사가 또 있었군.’
문수르는 이를 물었다.
테블스 산…… 사실 흑마법사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문수르가 오크 좀비를 만들어내던 흑마법사를 처치하긴 했지만 그 외에도 더 많은 흑마법사가 있을 것이다.
‘아니야.’
그 순간 문수르는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흑마법사들은 자기를 감추기 위해 테블스 산에 상주한다. 그런 놈들이 이제르트 자작가를 향해 이빨을 드러낼 이유는 없어.’
다른 이유가 있다.
흑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놈들은 도망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제르트 자작령을 향해 공격을 시도하는 건 자살행위다.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더군다나 메르디아 삼왕녀가 머무는 지금, 하필이면 지금 이때에 공격을 들어올 리는 없지.”
냄새가 난다.
음모의 냄새.
정치의 냄새.
“빅토리안 공작의 수작인가?”
흑마법사와 빅토리안 공작,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연결점이 있다.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니 왠지 답이 나왔다.
이 모든 일이 빅토리안 공작의 수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제야 문수르는 이를 물었다.
“설마…….”
이게 만약 정말 정치적 목적의 공격이라면, 지금 적이 노리는 것은 단 하나다.
“메르디아 삼왕녀를 노리는 건가?”
메르디아 삼왕녀.
그녀가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죽은다면 필로스 왕은 더 이상 이제르트 자작가와 손을 잡을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필로스 왕이 원해도, 명분이 없다. 왕가의 인물을 제대로 호위하지 못한 책임은 크다. 핑계도,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그저 속죄만이 있을 뿐이다.
문수르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앞에 두 가지 선택지가 놓였다.
전장을 지휘하는 것.
아니면 메르디아 삼왕녀를 호위하는 것.
단순한 몬스터의 침입이라면 전장에 나서는 게 좋다. 더불어 지금 상황은 좋지 못하다. 전장의 몬스터들은 그냥 몬스터가 아니다. 흑마법을 통해 만들어진 강력하고, 악독한 생명체다.
더군다나 엘프 족과 드워프 족의 공백이 있는 상황, 움직일 수 있는 아이언히트는 7대에 포비어 경의 기가스, 총 8대가 움직일 수 있다.
물론 그건 엄청난 전력이다. 어설픈 몬스터들 따위는 가볍게 처치할 수 있는 전력이다.
그러나 피해가 생길 것이다.
그럴 바에는 드래곤파이터가 나가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최선이다.
‘그렇다고 메르디아 삼왕녀를 그대로 놔둘 수도 없고…….’
피해를 감수하고 안전을 택하느냐, 아니면 피해를 막기 위해 도박을 하느냐.
답은 뻔하다.
‘메르디아 삼왕녀다.’
메르디아 삼왕녀를 보호해야 한다. 그녀의 목숨은 도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문수르는 달리던 걸 멈췄다.
그때였다.
포비어 경이 보였다.
문수르는 살짝 놀랐다. 포비어가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다.
“포비어 경, 무슨 일입니까?”
종소리가 났으니 반응은 했을 터. 그렇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아무런 명령을 받지도 못한 상황에서 움직일 줄이야.
마음이 통한 걸까?
“가누스 경이 말을 전해줬습니다.”
“가누스…… 경?”
순간 문수르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가누스란 이름도 의외지만, 그 뒤에 경이란 표현을 붙이는 건 더 의외였다.
‘그런 사이인가?’
최근까지 포비어가 가누스로부터 검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딱히 나쁠 건 없어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아무래도 가누스와 포비어 사이에 새로운 연대감이 생긴 모양이다.
‘잠깐, 가누스가 있어?’
문수르는 생각의 방향을 달리 했다.
계획대로라면 가누스는 엘프들을 이끌고 안전 지역으로 피신했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제르트 자작령에 있다고?
심지어 포비어 근처에?
‘가지 않았구나.’
머물었다는 거다. 엘프의 안전보다는 영지의 안전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어둠 속에서 대기했다는 의미다.
‘오케이.’
최고다.
원래도 든든한 아군이지만, 지금 이 순간 가누스 만큼 안전한 아군은 없을 것이다.
‘바꾸자.’
가누스를 메르디아 삼왕녀의 호위로 붙인다. 아이언히트를 다룰 줄 아는 가누스보다는 드래곤파이터를 다루는 문수르가 전장에서는 더 도움이 되니까. 반대로 오러 마스터인 가누스라면 메르디아 삼왕녀의 호위에 제격이다. 엘프 특유의 감각은 암살자를 막는데 있어서는 문수르보다 낫다.
무엇보다 기가스가 아닌 단순한 무력이라면 가누스가 문수르보다 훨씬 뛰어나다.
역할 분담은 이게 최선이다.
‘포비어는 중추에 둔다.’
더불어 포비어는 최전선이 아니라, 최전선과 이제르트 자작의 내성, 사이. 그 중심에 놓을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서 그는 훌륭한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을 테니까.
“포비어 경, 가누스 경에게 메드리아 삼왕녀의 호위를 부탁한다고, 그 말을 전해주세요.”
그 명령에 포비어는 반문 따윈 하지 않았다.
“알았습니다.”
포비어가 빠르게 움직였다
단숨에 보법을 밟아 움직이는 그의 몸놀림은 인간의 그것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다.
더불어 문수르는 놀랐다.
‘내가 가르쳐준 보법이 아니다.’
보법을 배우지 못한 포비어에게 문수르는 보법을 가르쳐줬다. 그 이후 포비어는 그 보법을 열심히 연마해 제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포비어의 보법은 문수르가 가르쳐준 것보다 더 빠르고, 더 세련된 것이었다.
새로 배운 것이다.
아마도 가누스에게 배운 것이겠지.
‘바뀌는구나.’
이 긴박한 순간에서 무언가 뿌듯함이 느껴졌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변화가 보이는 것 같아서, 이제까지 한 일이 결실을 맺은 것 같아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그렇기에 문수르는 각오를 다시 다졌다.
이 변화를 지켜야 한다.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혹여 제국이 적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 변화는 지켜야 한다.
문수르의 눈빛이 바뀌었다.
‘지금 당장은 저 밖의 몬스터들부터 처리해야겠지.’
다른 적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지금 적은 너무나도 명백하니까.
4.
문수르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기가스 파일럿들도 마찬가지였다.
출동 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들은 왜? 라는 의문 따위는 조금도 붙이지 않았다.
문수르가 하라면 하는 거다.
그가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어야 한다. 더불어 죽을 각오는 언제든지 되어 있다.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병사들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죽음 자체라면 두렵겠지. 그러나 사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건 죽은 후의 것들이다. 특히 가족이 있는 자들은 더더욱 그렇다.
죽은 후에 자신의 가족들, 친인척들, 더 나아가 동료들.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겁다.
그런 그들에게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가는 보여줬다.
죽은 이들이 죽음을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말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풍족함과 고귀함, 문수르는 죽은 병사들을 혹여 시체라도 해도 모든 걸 챙겼다.
죽음에 대한 위로금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이 세계에서, 죽음이 부질없는 이 세계에서 문수르는 죽음에 가치를 주었다.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7대의 아이언히트가 곧바로 전장으로 향했다.
병사들 역시 아이언히트가 보다 빨리 전장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동시에 성벽 위에서 그들을 보조할 수 있도록 빠르게 무기들을 챙기고, 전장을 향해 겨누었다.
일부 병사들은 사전에 계획대로 성 밖으로 갔다. 그들은 성 밖에 가서 준비한 것들을 설치했다.
지금은 어둠이 내리 앉은 상황이다.
솔직히 시야가 제대로 잡히기 힘들다. 거리를 가늠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성 밖으로 나간 병사들은 문수르가 만든 특제 횃불을 이용해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포인트를 만들었다.
활을 쏘는 병사들에게는 그보다 훌륭한 도우미는 없을 것이다.
활시위를 잡아당길 자는 있는 힘껏 잡아 당겼다.
검을 쥔 자는 숨을 골랐다
아이언히트가 성문을 통해 성 밖으로 이동했다. 7대의 아이언히트가 진형을 갖추었다.
쿵!
그 순간 성문이 아닌, 성벽을 넘는 기가스 한 대가 등장했다.
드래곤파이터의 등장.
“우아아!”
“이긴다!”
병사들은 드래곤파이터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외침이 아니었다.
드래곤 파이터는 이제르트 자작가의 수호신이다. 드래곤파이터가 나선 전쟁은 그 어떤 전쟁이라도 패배한 적이 없다. 그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베르베 백작가와의 전쟁에서도 드래곤파이터가 홀로 전쟁을 끝냈다.
패배가 떠오르지 않는 병사들만큼 이 세상에서 무시무시한 병사는 없다.
일기당천!
병사들의 눈빛이 빛났다. 어두컴컴한 하늘 위의 별마냥, 짖게 깔린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병사들의 눈빛.
그 속에서 문수르는 침을 삼켰다.
드래곤파이터에 탑승한 이후 보다 정확하게 상황을 볼 수 있는 문수르는 긴장했다.
‘생각보다…… 힘들지도 모른다.’
오는 몬스터의 존재들.
그것들은 몬스터가 아니었다. 체격은 인간이 아닌 몬스터의 그것이지만, 그것들은 분명 갑옷을 입고 있었다.
보통 갑옷이 아니었다. 검은 빛을 내뿜는 그 갑옷은 딱 봐도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든 무기는 그 무엇도 아닌 검이었다. 거대한 검이었다.
무식하게 힘만 믿고 설치는 부류가 아니다. 강력한 힘, 단단한 갑옷 그리고 뛰어난 기술을 가진 적이었다.
그 순간 한 가지 존재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백여 기의 데스나이트인것 같군."
데스나이트.
흑마법사가 만들 수 있는 최악의 악몽이 이제르트 자작령에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