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170화 (168/293)

170화

2.

이제르트 자작은 검소하다.

사실 지금 이제르트 자작은 콩탄 왕국에서도 나름 부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재물이 많다.

당장 식량만 해도 그렇다. 문수르가 전파한 새로운 농법과 농기계의 보급 그리고 우수한 품종의 배급은 이제르트 자작가의 작물 수확량을 곱절 이상으로 만들었다.

그뿐인가?

이제르트 자작가는 겨울에도 농작물 재배가 가능하다. 고구마를 비롯해 겨울에도 생산 가능한 작물들의 종자 배급과 농법 전수 역시 이미 끝난 상황이다.

세금 제도의 개편과 여러 제도의 개편은 암중으로 흘러가는 돈이 없도록 만들었고, 보다 확실하게 세입이 가능토록 만들었다.

여기에 전쟁 배상금과 함께 이제르트 부속령에서 오는 돈 역시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물론 그만큼 쓰는 돈도 적지 않지만 적어도 이제르트 자작이 검소해질 필요는 없다.

사실 영주는 어느 정도 사치를 부려도 나쁠 건 없다. 영주 체면도 체면이지만, 사실 영주가 사치를 부려야 그 아래 사람들도 숨통이 트이는 법이다. 막말로 영주가 검소하게 지내는데 그 아래 있는 기사나 영지민들이 사치를 부리는 건 정말 위험한 행동이다. 정신줄을 놓는 짓이다.

그럼에도 이제르트 자작은 검소하게 행동했다.

그건 이제르트 자작의 본성이었으며 오랜 세월 검소하게 살면서 생긴 습관이기도 했다.

그런 이제르트 자작가에 오랜만에 만찬이 차려졌다.

정말 눈이 돌아갈 만큼 많은 음식들이 올라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왕가의 여식으로 세상 진미들을 대부분 맛본 메르디아 삼왕녀조차 처음 보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만찬에 참석한 건 넷이었다.

이제르트 자작과 그의 딸인 이리아 이제르트. 그리고 문수르와 메르디아 삼왕녀.

이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이리아였다.

지병이 고쳐진 이후로 그녀의 건강은 빠르게 회복됐다. 그 후에도 관리를 위해 그녀는 보양식 따위를 아낌 없이 먹었다. 그러자 멈춰있던 성장이 시작됐다.

키도 커졌고, 얼굴에도 활력이 샘솟기 시작했다. 가슴도 제법 부풀어 올랐다. 그러자 그동안 시들어있던 미색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리아는 꾸준한 운동을 통해 몸매 역시 탄탄하기 그지없었다.

더군다나 최근 제르둔 후작가의 유일한 생존자라 할 수 있는 나탈라가 이리아 곁에서 그녀에게 귀족가의 예법을 비롯해서 보통 귀족가의 여식들이 하는 것들…… 화장을 비롯해 귀족가의 여인들이 스스로를 가꾸는 법을 알려줬다.

어머니가 없어 그런 것을 따로 배울 수가 없었던 이리아에게 나탈라의 가르침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

덕분에 이 자리에 이리아는 조금은 과한 화장을 하고 나타났다.

그러나 문제될 건 없었다.

과하긴 하지만, 메르디아 삼왕녀가 초대된 자리였다. 오히려 그 과한 정도가 왕가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오히려 적당히 꾸미면 왕가에 대한 모욕으로 비춰질 수도 있으니까.

화사한 이리아.

반면 메르디아 삼왕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수수한 차림새로 등장했다.

이렇게 되니 오히려 이리아가 왕녀 같고, 메르디아 삼왕녀가 자작가의 여식 같은 느낌이다.

이리아도 눈치가 있는지라, 이 상황에 적잖게 당황했다. 이리아는 힐끔힐끔 문수르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아기 고양이의 그것처럼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문수르는 그런 이리아의 눈빛을 무시했다.

‘어차피 이런 걸로 일일이 트집을 잡을 생각은 없을 터.’

여기서 괜히 이리아를 변호한답시고 나서면 상황이 더 이상해질 것이다.

‘의중을 끄집어내야 한다.’

만찬 자리를 만든 건 보다 편안한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뭐, 간단한 거다.

서로 식사를 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나둘씩 하는 거다. 돌려 말해도 좋고, 비유를 해도 좋다. 직설적으로 말해도 나쁠 건 없다. 말 그대로 식사하는 자리니까.

모든 대화가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처음 보는 음식들이 많군요.”

대화의 물꼬를 튼 건 메르디아 삼왕녀였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특산물입니다. 아마 처음 맛보시는 음식일 겁니다.”

문수르가 화답했다.

“그런가요? 이제르트 자작가는 참 신비롭네요.”

신비롭다?

문수르는 일단 그 단어를 머릿속에 집어넜다. 다른 많은 표현이 있는데도 굳이 신비라는 표현을 썼다는 건 다른 의미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입맛에는 맞으십니까?”

“이제르트 자작가에 온 이후로 입이 호강을 하네요.”

“다행입니다. 혹여 왕녀님의 입에 맞지 않을까, 요리사가 굉장히 걱정이 많았습니다.”

“걱정 마세요. 딱히 음식을 가리는 성격은 아니니까요.”

화기애애하다.

이제르트 자작은 묵묵히 식사를, 이리아는 문수르와 메르디아 삼왕녀의 대화에 신경 쓰느라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

순간 메르디아 삼왕녀가 감탄했다.

“이 요리 정말 맛있네요.”

“고구마튀김이란 요리입니다.”

“달고, 바삭하고…… 신기한 요리네요.”

“신기하네요. 이제르트 자작가에는 참 신기한 게 많네요. 역시 대마법사 할루이 이제르트의 가문이라서 그런 걸까요?”

할루이 이제르트?

‘한석균?’

순간 문수르의 심장이 덜컥, 움직였다.

‘왜?’

왜 지금 이 순간 할루이 이제르트의 이름이 나오는 걸까? 문수르는 짧게나마 의심했다.

‘내가 다른 세계 사람인 걸 알고 있다는 건가?’

기겁할 만한 의심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러나 이내 문수르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알고 그냥 넘어갔다.

‘할루이 이제르트.’

그래도 할루이 이제르트의 이름이 거론된 건 보통 일이 아니다.

할루이 이제르트는 분명 콩탄 왕국이 낳은 대마법사지만, 이제 그 이름을 아는 자는 많지 않다.

더군다나 근래의 마법사들에 대한 모든 것들은 폐쇄적으로 변질되어갔다. 과거의 마법사들, 위대한 마법사들의 행적을 뒤쫓는 무리들은 없다. 요즘 마법하면 셋 중 하나다. 힐링 마법과 기가스 그리고 흑마법사. 그 외의 것들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할루이 이제르트에 관심이 있다는 의미로군.’

그런데 그런 할루이 이제르트의 이름을 꺼냈다는 건 메르디아 삼왕녀가 할루이 이제르트에 관심이 있다는 의미다.

더불어 마법에 대한 어느 정도 지식이 있다는 의미.

‘하긴, 어떤 의미에서 이제르트 자작가의 갑작스런 번영이 대마법사 할루이 이제르트가 남긴 무언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가장 타당한 가설일 수도 있으니까.’

문수르는 잠시 고민했다.

‘받아쳐야지.’

메르디아 삼왕녀가 화두를 던진 셈이다.

“할루이 이제르트, 그분을 기억하시다니 왕녀님께서 마법에 관심이 많으신가봅니다.”

“조금 공부했어요. 왕도에서는 왕녀가 즐길 만한 게 없거든요.”

“마법을 배우셨습니까?”

“제대로 배운 건 아니에요.”

“대단한 일이군요. 마법사가 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들었는데…… 왕녀님에게 그런 놀라운 재능이 있으실 줄이야.”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선 문수르 경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요.”

화기애애한 대화다.

이런 분위기로만 가면 적어도 결과물은 좋을 것 같다.

문수르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런 방향으로…….’

- 주인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순간 로이드가 끼어들었다. 이제까지 침묵을 고수하고 있던 로이드가 갑작스레 말을 걸었다.

긴급상황이란 거다.

‘뭐야?’

- 몬스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테블스 산?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제르트 자작령 근처에 몬스터는 한 마리도 없었잖아?’

- 모르겠습니다. 지금 확인 중인데…… 보통 몬스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보통 몬스터가 아니야?’

- 이동 속도, 움직임, 머릿수, 이동 경로…… 모든 것이 기존 몬스터의 데이터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로이드도 알 수 없는 몬스터의 움직임.

예삿일이 아니다.

‘하필이면…….’

최악이다.

이렇게까지 상황이 꼬일 수도 있는 건가?

‘어느 정도야?’

- 심각합니다. 아이언히트를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몇 대나?’

- 현재 계산중입니다. 최소 5대 이상의 움직여야 할 듯싶습니다.

‘5대?’

고작 몬스터 무리 처리하는데 아이언히트 5대라고? 보통 몬스터가 아니라는 소리다. 오우거가 대여섯 마리쯤 온다는 소리다. 하지만 오우거가 단체로 활동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적어도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다. 오우거는 흉포한 놈들이다. 동족조차 거슬리면 폭력을 행사하는 무리들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상황이 꼬이긴 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그 무엇도 아니라 몬스터의 침입에 이제르트 자작가가 피해를 입는 것이다.

이제르트 자작가는 여전히 칼날 위를 걷고 있다. 작은 틈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움직여.’

일단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

물론 몬스터가 왔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빠져나갈 순 없다. 이제르트 자작이야 이해하겠지만 메르디아 삼왕녀는 그 이유를 듣는 순간 문수르를 의심할 것이다.

어떻게 실내에 있었고, 조짐이 없었음에도 몬스터가 온다는 걸 알아차린 거지?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몇 가지 대책을 세웠다.

땡땡!

기다렸다는 듯이 종이 울렸다. 로이드가 울린 종이었다. 이러면 적당한 구실이 생긴다.

문수르가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났다.

문수르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일부러 연출한 표정이었지만 동시에 속마음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성 밖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문수르의 말에 이제르트 자작이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이제르트 자작 역시 하수가 아니다. 고단수다. 진짜 몬스터가 왔건, 아니건 그건 중요치 않다.

문수르가 행동하면 그에 맞춰줘야 한다.

“문수르 경, 자네가 성의 병력을 지휘하게. 내가 왕녀님을 모시고 대피하겠네.”

“그럼…….”

일사천리.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했던 만찬 분위기가 단숨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 분위기에 대응하지 못한 건 메르디아 삼왕녀뿐이었다. 이리아 역시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대부분을 보낸 여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리아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리아, 네가 왕녀님을 모셔라.”

“네, 아버님.”

이리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왕녀님, 저를 따라오세요.”

이리아의 말에 메르디아 삼왕녀는 순간 이리아가 아니라 문수르를 바라봤다.

문수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메르디아 삼왕녀의 눈에 들어온 건 문수르의 등밖에 없었다.

그 순간 메르디아 삼왕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진짜 문제가 생긴건가?’

아쉽다.

절호의 기회였다.

자연스럽게 할루이 이제르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판이 깨졌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외부의 요인에 의해서 말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탓에 메르디아 삼왕녀는 이게 이제르트 자작과 문수르의 수작이 아닌가, 그런 의심도 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그 둘 역시 정치를 안다면, 메르디아 삼왕녀를 상대로 허투루 행동하지 않을 터.

밀고 당기기, 이건 정치를 하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정치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더군다나 이곳은 이제르트 자작령이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수작을 부린다면 메르디아 삼왕녀는 그냥 당할 수밖에 없다.

‘아니야.’

그러나 메르디아 삼왕녀는 이게 단순한 연출이나, 연극 혹은 수작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건 막연한 감 따위를 믿고 나오는 생각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오고 있어.’

그녀는 마나를 느꼈다.

그것도 굉장히 암울하고 칙칙하며, 어두운 마나였다. 제 아무리 이제르트 자작가라도 마나까지 속일 순 없을 것이다. 속인다면 이제르트 자작가는 정말 무시무시한 곳이다.

‘대체 뭐가 오는 거지?’

메르디아 삼왕녀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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