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49화. 만찬.>
1.
메르디아 삼왕녀가 데리고 온 시녀는 스무 명이었다. 사실 일국의 삼왕녀를 보필하는 숫자 치고는 적은 편이다. 왕녀라는 건 몸을 치장하는 데에도 여러 사람이 필요하다. 그뿐인가? 왕녀가 접할 모든 것을 시녀가 미리 접해보고 문제가 없는지, 부족한 게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잠자리부터 시작해서, 단순하게 걷는 길까지, 일일이 모든 걸 검사해야 하는데 예비 인력을 고려하면 왕녀 한 명이 움직이는데 1백 명 정도의 시녀가 움직이는 건 보통이다.
이 모든 과정은 보통의 시녀들, 그저 노동력만 필요해 대충 데려다가 고용하는 시녀들은 결코 할 수 없다. 왕실 내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과한 시녀들만이 가능하다.
물론 이건 사치다.
어떤 의미에서 낭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메르디아 삼왕녀는 그다지 낭비를 즐기지 않은 성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메르디아 삼왕녀에게는 스무 명의 시녀마저도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필요로 하는 시녀는 사실상 딱 두 명이었다.
“이제르트 자작가는 어떻지?”
언제나 메르디아 삼왕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 두 시녀.
세르비와 메르비란 이름을 가진 그녀들이 메르디아 삼왕녀가 필요로 하는 시녀의 전부였다.
더불어 그 두 시녀는 단순한 시녀의 수준을 넘어서 메르디아 삼왕녀의 전력이기도 했다.
“감시가 심합니다.”
“감시가 심해?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병력 배치부터 시작해서 주요 장소에는 언제나 경비 병력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다할 틈이 없습니다.”
“몰래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힘듭니다.”
“그래봐야 일반 병사들이잖아? 기사들이 경비를 서는 것도 아닌데 접근하는 것조차 힘들어?”
“이제르트 자작가 휘하의 병사들 실력은 기사들 수준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납니다. 감도 좋고, 무엇보다 틈이 없습니다.”
“기사들에 버금간다고? 일개 병사들이?”
“예.”
세르비의 말에 메르디아 삼왕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메르디아 삼왕녀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 정도일 줄이야.’
순간 메르디아 삼왕녀의 눈앞에 아버지인 필로스 왕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필로스 왕은 자식에게는 그다지 좋은 아버지가 못 됐다. 그는 자상함보다는 엄격함으로 무장한 인물이었다.
또한 왕자와 왕녀들이 어릴 때부터 그들 사이에 서열구도를 명확하게 만들어두었다.
본인이 왕위를 찬탈하여 얻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성정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필로스 왕은 자신의 왕위에서 내려온 이후 왕위계승구도가 어지러워지는 걸 원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과정에서 왕녀들은 필로스 왕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희생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情)을 줄 이유가 없었다.
주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 필로스 왕이 메르디아 삼왕녀에게 말했다.
이제르트 자작가로 가라고.
가서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라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메르디아 삼왕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왕도를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말이다.
더군다나 그 목적지가 이제르트 자작가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메르디아 삼왕녀는 더 기뻐했다.
세상은 이제르트 자작가를 테블스 산을 앞에 둔 지옥의 땅이라고 하지만, 메르디아 삼왕녀에게는 그것보다 이제르트 자작가란 이름에만 눈길이 갔다.
‘할루이 이제르트의 유산은 없는 건가?’
할루이 이제르트!
메르디아 삼왕녀가 원하는 건 다름 아니라 콩탄 왕국이 낳은 희대의 대마법사, 할루이 이제르트에 대한 것이었다.
어째서일까?
메르디아 삼왕녀는 어째서 할루이 이제르트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걸까?
‘칫. 이제르트 자작가가 갑작스런 성장세를 보인 건 할루이 이제르트의 유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다름 아니라 그녀가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마법사!
요즘 시대에 마법사만큼 귀한 대접을 받는 자들은 없다. 케르빈 월드는 마법이 낳은 위대한 병기, 기가스에 의해 모든 것이 좌지우지 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러나 반대로 마법사의 숫자나 마법사의 질은 의외로 예전보다 수준이 떨어졌다.
이상한 일이다.
마법에 대한 관심도와 국가의 투자는 늘어나는데 마법의사의 양과 질은 줄어든다?
기가스 때문이었다.
기가스가 국가 전력의 절대기준이 되면서 모든 국가들은 국가가 나서서 마법사를 관리하고 육성하기 시작했다. 비단 국가뿐만이 아니었다. 마법사들의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마탑에서도 마법사들을 관리 감시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마법사들의 감시가 삼엄해졌다. 기가스 제조에 관여한 마법사들은 자기 마음대로 어디로 여행을 가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그뿐인가?
본래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연구하던 마법사들은 이제 기가스와 관련된 연구만 하게 됐다.
본인이 돈이 많으면 모를까, 국가나 마탑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는 마법사들은 무조건 기가스 관련 연구만 해야 했다.
그렇게 기가스 관련 연구만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기가스 관련 주요 관계자가 되니 자유가 사라졌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연구가 계속되고 또한 마법사 본인의 실력보다는 보다 훌륭한 이론, 보다 훌륭한 결과물을 내는 마법사들이 더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연구를 통해 자기 수행을 거쳐, 보다 높은 서클을 이룩한 마법사들이 대우를 받고 존경을 받았지만, 이제는 1서클이라고 해도 뛰어난 마법 이론을 발견하고, 보다 강력하고 효율적인 기가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마법사가 더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덕분에 보다 높은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 수양을 하는 마법사들이 줄어드니, 저절로 마법사들의 질이 떨어졌다.
동시에 마법사들이 워낙 엄격하게 관리되고, 그들의 삶에서 자유가 사라지며, 심지어 마법사들이 자기 마음대로 제자를 받아들일 수조차 없게 되자, 새로이 유입되는 마법사도 사라졌다.
마법사와 질과 양이 점차 떨어져가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메르디아 삼왕녀가 마법을 배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법과 관련된 대부분의 서적들은 필로스 왕의 주도 하에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식들에게 엄격하기 그지없는 필로스 왕이 메르디아 삼왕녀가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말에 마법사를 내어줄 리는 없지 않은가?
아니, 애초에 왕녀들은 결국 정치적 다리를 만들기 위한 희생양에 불과하다. 마법 따위를 가르쳐서 괜한 화를 불러 일으킬 필요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 메르디아 삼왕녀에게 이제르트 자작가는 그녀의 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최근 기세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이제르트 자작가의 배경에는 필시 대마법사였던 할루이 이제르트가 관계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분 좋게 왔다.
아니, 기분 좋게 왔다기보다는 작정을 하고 왔다.
‘어떻게든 이제르트 자작가와 거래를 하려고 했는데.’
필로스 왕은 메르디아 삼왕녀를 그저 정치적 관계를 위해 이제르트 자작가에 보냈겠지만, 메르디아 삼왕녀는 그런 정치적 장치만으로 남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제르트 자작가와 거래를 할 것이다.
이제르트 자작가로부터 할루이 이제르트의 유산을 공유할 것이다.
그게 메르디아 삼왕녀의 목표였고, 그걸 위해서 메르디아 삼왕녀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다름 아니라 이제르트 자작가의 약점을 찾는 일이었다.
무엇이든 좋다.
굳이 왕이 만든 규율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어도 좋다. 명백한 불법행위 따위를 무조건 원하는 게 아니다. 별 거 아닌 일이라도,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필로스 왕의 눈에 거슬릴만한 무언가면 된다.
‘이렇게 경비가 삼엄할 줄이야.’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가는 메르디아 삼왕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단단했다.
‘결국 문수르 경, 그자와 담판을 짓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 남은 방법은 하나다.
문수르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와 합의를 봐야 한다.
이미 미끼는 던졌다. 몇 번 의중을 드러냈다.
문수르는 정치를 할 줄 아는 자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수르가 그저 오러 마스터인 기사 정도로 여기겠지만, 정치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문수르가 이제르트 자작가 정치의 핵심이란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이제가지 이제르트 자작가의 대외적인 활동은 대부분 문수르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것만 보더라도 문수르가 단순한 오러 마스터가 아닌, 정치를 할 줄 아는 인물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호위 기사단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
아니, 사실 호위 기사단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필로스 왕의 선택이긴 했다.
필로스 왕은 이제르트 자작가를 완벽하게 신뢰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불어 필로스 왕은 아주 못된 생각이긴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가의 부주의로 메르디아 삼왕녀가 크게 다치거나 문제가 생긴다면 이제르트 자작가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다매정한 생각이다.
자신의 딸아이가 다칠 것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우다니?
그러나 필로스 왕은 그냥 아버지가 아니다. 콩탄 왕국이란 거대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왕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딸아이의 목숨과 콩탄 왕국의 정치적 안정, 안정된 미래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무조건 후자다. 생각할 가치도 없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결혼을 이용할 정도다.
그래도 만약 메르디아 삼왕녀가 여러 이유로 호위 기사 병력을 요구했다면 겉치레라도 호위 기사단이 동행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제르트 자작가 아닌가?
테블스 산, 슈페언 백작마저 혀를 내두른 극한의 땅이다.
그런 땅을 바로 마주보고 있는 이제르트 자작령에 가는데 호위 기사단이 필요하다고 하면, 필로스 왕이라도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필요 했다면 충분히 받을 수 있었던 호위 기사단 전력을 요구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으니까.
호위 기사단이 없다면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직접 메르디아 삼왕녀를 호위할 인물로 나올 만한 인물은 이런저런 상황을 생각하면, 문수르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문수르라면 눈치 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더불어 문수르란 자에 대해서 보다 잘 알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문수르는 콩탄 왕국의 세 번째 오러 마스터다. 그러나 막상 문수르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정치적 활동을 하면서도, 이러다할 활약상도 없을 뿐더러, 사교파티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제르트 자작가에 초대장을 보낼 만큼 이제르트 자작가를 염두에 두는 귀족가가 없다는 것도 이유겠지만, 제이머스 후작 파벌에 들어간 이후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어쨌거나 그런 문수르를 만난다는 소식에 나름 기대도 했다.
‘생각보다 어려워.’
어떤 로맨스를 꿈꾸기도 했다.
오러 마스터, 기사의 궁극에 도달한 자 아닌가?
그런 오러 마스터와 왕녀의 로맨스는 이제는 질릴 만한 로맨스 소재다.
물론 조금이다.
그러나 그 조금의 감정마저도 문수르를 상대하는 순간 싹, 사라져버렸다.
문수르는 매너가 넘치는 기사였지만 그 어디에서도 쉽사리 허점을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날카로운 눈으로 메르디아 삼왕녀를 경계했다.
왕도에 찾아오는 노련한 정치인의 눈이었다.
그런 자들은 겉으로는 화기애애해도, 속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수를 품을 수 있는 자다.
더불어 상대하기 가장 어려운 부류이기도 하다.
‘쉽기 않겠지.’
메르디아 삼왕녀는 각오를 다시 잡았다.
그런 그녀에게 이제르트 자작의 식사 초대는 상황을 반전시킬 좋은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