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168화 (166/293)

168화

7.

문수르는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메르디아 삼왕녀는 정치적 입지를 원하고 있어.’

메르디아 삼왕녀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지금 이제르트 자작가에 단순히 유람을 온 건 결코 아니었다. 문수르를 상대로 적당히 밀고 당기는 모습을 보면, 이제르트 자작가에 원하는 게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지금 메르디아 삼왕녀가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단 하나, 정치적 지원뿐이다.

‘문제는 정치적 입지를 넓히고자 하는 이유, 바로 그건데.’

왕가의 이들은 모두 정치적 입지를 가질 수밖에 없다.

왕위, 가장 민감하면서도 가장 오롯한 그것과 가장 가깝게 연결된 자들이니까.

왕자들은 왕위를 노릴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고, 왕녀들은 왕가와 가장 긴밀해질 수 있는 요건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메르디아 삼왕녀는 그렇게 정치적 입지가 그다지 넓지 못한 편이다. 사실 정치적 입지를 다질만한 계기도 없었다.

태어난 이후 왕도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을 뿐더러, 아직 나이도 어리로, 혼처가 정해진 것도 아니다.

여기에 딱히 대단한 재능을 보인 것도 아니니, 후원자가 생길 리도 만무. 나름 필로스 왕의 왕권이 충분히 선 상황에서 필로스 왕이 굳이 삼왕녀의 혼처를 급하게 정해 정치적 결속을 꾀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정치적 입지를 가진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애초에 정치적 입지, 영향력 이런 종류의 것들은 도구일 뿐이다.

무엇을 위한 도구?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한 도구!

‘왕위를 노리는 건 아닐 테고.’

아주 극단적인 상황, 예를 들면 왕위계승권에서 순위가 거의 꼴찌나 다름없는 메르디아 삼왕녀가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 정치적 입지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

불가능한 건 아니다.

단지 여기서 필요한 정치적 입지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너무 허무맹랑해서 거론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대체 뭘 원하는 걸까…….”

뭐 굳이 왕위계승권자가 아니더라도 정치적 입지를 가져서 나쁠 건 없다.

발언권이 올라가면 자유도가 늘어난다. 정치적 입지가 없다면 필로스 왕이 제멋대로 다룰 수 있지만 반대로 정치적 입지가 생기면 아버지와도 어느 정도 의견대립을 할 수 있으니까.

어쨌거나 분명한 건 메르디아 삼왕녀가 그저 파티나 즐기고, 사치를 즐기며, 적당한 명문가에 시집을 가 귀부인으로 사는 건 아니다.

그녀는 여우다.

제 목적을 위해서 사냥을 하는 여우!

그저 주는 밥만 받아 먹고 그걸로 만족하는 소나, 돼지는 절대 아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이제르트 자작가는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에 가장 좋은 상대다.

지금 그녀는 정치적 장치다.

필로스 왕과 이제르트 자작가 사이를 연결하는 장치! 그런 그녀의 행동에 따라 필로스 왕과 이제르트 자작가 사이의 관계가 바뀔 수도 있다.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도 가능하고, 아주 부정적인 방향으로도 가능하다.

‘왕가와의 관계는 개선될 필요가 있다.’

문수르는 필로스 왕과 배척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필로스 왕이 이제르트 자작가를 향해 검을 겨누지 않는 한은 말이다. 무엇보다 이제르트 자작이 납득했다.

영지민을 위해서, 자신이 짊어진 사람들의 목숨 값을 위해서 이제르트 자작이 오롯한 자존심을 굽혔다.

그러니까 더욱더 필로스 왕과의 관계를 끈끈하게 만들어야 한다.

메르디아 삼왕녀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까?’

가만 생각하면 메르디아 삼왕녀는 이런 사실을 문수르든, 이제르트 자작이든 눈치 채주길 바라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제까지 보통의 왕녀라는 가면을 쓰고 지내왔던 그녀가 이렇게 가면을 슬그머니 썼다, 벗었다를 반복할 이유가 없다.

그녀 역시 거래를 원하는 것이다.

“좋아.”

문수르가 각오를 굳혔다.

8.

빅토리안 공작은 잠들지 못했다.

늦은 밤이 됐음에도 그는 침실에 가지 않은 채 자신의 서고에서 홀로 사색에 잠겨 있었다.

주변에는 호위를 위한 기사들도 없었다. 빅토리안 공작은 기사들의 숨소리마저 거슬린다는 이유로 그들을 물리쳤다. 빅토리안 공작의 호통 앞에선 기사들의 충성심도 수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다.

빅토리안 공작마저 입을 다문 공작의 서고는 적막함이 정도를 벗어나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부스스…….

그 적막감 사이를 옅은 소음이 비집고 들어왔다.

환청이었을까?

아니면 유령의 수작이었을까?

스스…….

소리가 계속되는 걸 보면 환청은 아닌 게 분명하다. 빅토리안 공작 역시 들었다.

“이제 오시는군.”

빅토리안 공작이 자세를 풀지 않은 채 눈알만 굴리며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봤다.

어둠이 흘러내렸다.

처벅처벅!

마치 눈처럼 흘러내렸다.

뽀드득!

눈처럼 쌓인 어둠 위로 발자국이 생겨났다. 발자국 위로 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에서 다리가 뻗어 올랐고, 몸통이 만들어졌다. 몸통에서는 팔이 나오고, 머리가 솟아올랐다.

젊은 사내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20대 초반, 그 이상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노인.

“빅토리안 공작. 약속을 어겼군.”

“인생사가 다 그런 것 아니겠소?”

“네놈이 감히 나와 인생사를 나눌 생각이냐?”

“뭐, 나이로 치자면 내 나이가 당신의 증손주 뻘이 되니, 그건 좀 그렇겠구려.”

누가 봐도 젊은 사내.

반면 빅토리안 공작은 누가 봐도 늙은 노인.

그런 그 둘의 대화라고 보기에는 무색했다. 젊은 사내가 마법으로 젊음을 되찾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 얼굴을 보니 멋대로 말이 나왔소. 솔직히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젊어졌구려.”

“가면을 썼을 뿐이다.”

“가면을 쓸 이유가 있소? 이제 당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 중 살아남은 자는 손에 꼽을 정도인데.”

“흥.”

젊은 사내의 이름은 카라카크.

맞다.

대마법사 할루이 이제르트와 동시대에 살았던 악명 높은 흑마법사, 테블스 산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그가 빅토리안 공작 앞에 등장한 것이다.

더불어 카라카크는 기분이 굉장히 좋지 못했다.

“베르베 백작, 놈이 약속을 어겼다.”

“그건 약속을 어긴 게 아니라 실패한 것이오. 누가 알았겠소? 이제르트 자작가에 그만한 저력이 있었는지. 솔직히 나 역시 지금도 베르베 백작의 패배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소.”

“베르베 백작이 모든 것을 가지고 내 앞에 왔다.”

“베르베 백작이 당신에게 갔소? 그동안 소식이 없더니, 죽기 싫어서 당신에게 붙은 모양이군.”

“놈의 영혼을 끄집어내 잘게 썰었지.”

“하하하, 개를 피하려다가 호랑이 앞에 선 꼴이군. 나를 피해 당신 곁에 가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오?”

“거래를 했다. 놈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놈의 머릿속에 내 영혼을 심어뒀지.”

“베르베 백작의 부고 소식은 잘 들었소.”

“빅토리안 공작, 네 뱃속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는 걸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빅토리안 공작을 입을 다물었다.

빅토리안 공작과 카라카크의 관계는 단순한 동맹 관계가 아니다. 빅토리안 공작은 카라카크의 흑마법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자신의 목숨줄을 주었다. 물론 빅토리안 공작이 약속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보다 큰 무언가가 있다.

더 큰 그림을 그렸었다.

콩탄 왕국은 아주 작은 스케일로 치부될 거대한 그림을 말이다.

이제까지는 그림이 잘 그려졌다. 무리가 없을 정도로, 예상보다 훌륭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그러나 최근 그 그림이 무너지고 있었다.

“전쟁을 벌인다고 들었다. 그것도 제국과 손을 잡고. 기존의 약속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더군.”

“제국의 아히만트 백작이 나를 찾아와 협박을 했소. 페스로 제국의 성격은 나보다 그쪽이 더 잘 알지 않소? 내가 거기서 아히만트 백작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될지.”

“흥. 야만스런 제국놈들.”

“야만스럽다기보다는 폭력적인 이들이오. 단순한 야만인이었다면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기가스를 만들어 낼리가 없지 않소?”

“흥. 야만스런 놈들이 맞다.”

카라카크의 계속 야만스럽다는 말에 빅토리안 공작의 눈빛이 빛났다.

“설마 완성한 것이오?”

“반쯤.”

“하하! 놀랍군. 앞으로 10년은 더 기다려도 완성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정말이오?”

“말장난을 하기 위해 테블스 산에서 이곳까지 온 게 아니다.”

빅토리안 공작의 표정이 바뀌었다.

“일을 버려도 되겠군.”

“연막이 필요하다.”

“이쪽도 나름 준비를 끝났소. 시기는 그쪽이 정하시오. 그럼 곧바로 계획을 시작할 터이니.”

“무엇으로 시작할 생각이지?”

“왕국은 이미 전쟁으로 시끄럽소.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의외로 괜찮은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지. 오로지 필로스 왕만이 침묵을 고수하고 있소. 필로스 왕 입장에선 나설 이유가 없으니까. 나와 제이머스 후작이 치고 박고 싸우는 걸 오히려 즐기는 중이겠지.”

“잡담이 길군.”

“이 와중에 차기 왕위 계승자로 가장 유력한 이왕자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 것 같소?”

씨익!

빅토리안 공작이 웃었다.

“과연 그때에도 필로스 왕이 그 무거운 엉덩이를 계속해서 왕좌에 붙이고 있을 것 같소? 왕좌가 아니면 스스로가 왕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하는 그 겁쟁이가?”

“그 겁쟁이에 밀려 왕위를 놓친 이도 있거늘.”

“놓친 게 아니오!”

순간이었다.

희희낙락하던 빅토리안 공작이 살벌하기 그지없는 기세를 내뿜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기세 앞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 소름이 돋을 정도다.

빅토리안 공작의 눈동자는 그런 살벌한 기세가 우습게 보일 정도로 흉흉한 기색이 솟아올랐다.

“제국이 뒤통수를 쳤을 뿐이오. 그게 아니었다면 차기 왕위는 나의 것이 되었을 것이오.”

“결국 밀린 건 밀린 거지.”

“그때 만약 내가 제국과 손을 잡았다면 지금 당신은 이곳이 아니라 왕도로 나를 찾아왔을 것이오.”

“흥.”

빅토리안 공작.

그는 본래 왕위를 노렸다. 세간은 카스트로 왕세자가 차기 왕위 계승자로 유력했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빅토리안 공작은 오히려 연막을 쳤다. 카스트로 왕세자 주변에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고, 그의 왕위 계승권이 그 무엇보다 굳건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두 가지 의도가 있었다.

하나는 카스트로 왕세자를 왕위에 올린 후에 왕위 계승권을 가진 모든 이들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 후에 카스트로 왕세자가 죽는다면?

왕위 계승권자가 사라진다. 왕위는 돌고 돌아 결국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녔으며 나름 왕가의 피가 흐르는 빅토리안 공작에게 돌아올 게 분명했다.

그걸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필로스 왕이 등장했다. 페스로 제국, 슈페언 백작이란 막강한 후원자를 등에 업은 필로스 왕이 단숨에 왕위를 찬탈했을 때 빅토리안 공작은 웃었다.

필로스 왕 앞에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고, 친왕파의 수장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그 다음 날이었다.

빅토리안 공작이 흑마법사 카라카크와 만남을 가진 것은 말이다.

거래가 성사됐다.

빅토리안 공작은 흑마법사 카라카크로부터 흑마법을 배웠다. 그냥 배운 게 아니었다.

힘을 받았다.

마법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던 빅토리안 공작을 단숨에 강력한 흑마법사로 만들어 줄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받았다.

그 대가로 카라카크에게 생사여탈권을 줬다.

또 다른 거래가 있었다.

카라카크는 빅토리안 공작의 권력을 이용해 어떠한 작업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대가로 빅토리안 공작은 차기 왕위를 달라고 했다.

이제 그 거래가 끝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여름이 좋겠군.”

“무슨 이유 때문이오?”

“몬스터들이 날뛰기 딱 좋은 시기니까.”

“하하. 좋소.”

10년 넘게 준비한 계획.

그것이 실현을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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