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4.
삼왕녀의 방문은 이제르트 자작령을 반짝 긴장하도록 만들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테블스 산의 온갖 몬스터들,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강적들과의 전투에서도 표정이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강철처럼 단련된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조차도 긴장감에 어수룩한 표정을 짓기 일쑤였다.
기사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거, 이런 차림으로 다녀도 되는지 모르겠군.”
“매일 갑옷을 입고 다녀야 하는 건가?”
“그게 예의 아닌가?”
“끄응…… 도통 이런 걸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니…….”
더군다나 이제르트 자작을 섬기는 기사들은 사실 제대로 된 기사들이 아니다.
기사 임명은 영주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남작 이상의 작위만 가지고 있다면 기사 임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임명된 기사가 제 대접을 받을 리 만무하다. 보통 기사 임명에는 두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하나는 모시는 영주로부터 기사 임명을 받는 것이고, 그 후에 그 영주가 왕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그럼 왕이 답장을 해준다. 이렇게 되면 그 기사의 기사 작위는 나라가 인정해준 게 된다. 반대로 왕의 답장이 없으면 반쪽짜리는커녕, 가짜 기사 취급을 받게 된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사들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 가짜 기사, 반쪽 짜리 기사들이다.
일단 필로스 왕과 이제르트 자작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당연히 이제르트 자작이 기사 임명을 했다는 내용을 필로스 왕에게 보내도 답장은 묵묵부답, 오지 않았다.
또한 이제르트 자작 휘하의 기사들 자체가 실력은 몰라도 기본예절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수양이 얕다.
어쩔 수 없다.
제대로 된 기사 밑에서 제대로 된 기사도를 배운 자라면 결코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테블스 산이란 지옥도를 앞두고 누가 기사가 되고 싶을까?
물론 본래 오래 전부터 이제르트 자작가를 모시던 기사 가문 출신들도 있지만, 솔직히 10년 넘게 싸움질만 했다. 전쟁의 연속이었고, 전투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예절 수행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배웠던 것을 다 까먹고도 남은 시점이다.
반면 상대는 그 누구보다 예의을 중요시해야할 왕가의 인물이다.
작은 틈이라도 보이면 안 되는 자다.
기사들의 목이 타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제대로 된 기사라고 할 수 있는 포비어조차 긴장감에 밤잠을 설칠 정도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물론 가장 밤잠을 설친 건 문수르였다.
‘의도를 모르겠다.’
메르디아 삼왕녀가 온지 일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특별한 일은 없었다. 메르디아 삼왕녀는 자신에게 배정된 숙소에 머문 채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문수르가 호위를 서기 위해 그녀 옆에 머물렀지만, 그렇다고 문수르와 이러다할 대화를 나눈 것 역시 아니었다.
마치 유람을 온 것처럼 보였다.
‘정말 그냥 놀러온 걸까?’
사실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 보통의 귀족이라면 메르디아 삼왕녀의 방문을 정치적 이유보다는 유람을 위해서, 휴식을 위해서 여길 것이다. 물론 필로스 왕이 그녀를 보낸 건 정치적 이유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르디아 삼왕녀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리란 보장은 없다.
더군다나 세간에 알려진 메르디아 삼왕녀의 평가는 이러다할 특이점이 없다.
왕가의 기준에 적당히 턱걸이를 하는 수준, 흠을 잡을 곳은 없지만 그렇다고 돋보이는 것 역시 없다.
‘아니야.’
그러나 문수르는 부정했다.
유람이라고?
‘정말 메르디아 삼왕녀 본인이 유람 중이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이제르트 자작령은 아니지.’
생각해보면 유람을 휴양지로 유명한 지역이 아니라 이제르트 자작령으로 온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
만약 문수르 본인이 보통의 귀족가의 여식이라면, 절대 유람 장소로 이제르트 자작령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혹여 아버지가 가라고 말해도, 화를 낼 것이다. 분노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가게 되더라도 불만 가득한 얼굴 혹은 불안 가득한 얼굴이겠지.
그러나 메르디아 삼왕녀는 전부 아니다.
‘대체 뭐지?’
오히려 그 담담함이 확신을 줬다.
그녀는 정치를 할 줄 아는 여인이다.
그런데 아무런 행보도 보이지 않는다니…….
‘심장이 쪼그라드는군.’
문수르는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었다.
문수르가 이렇게 신경 쓰는 이유는 이번 일이 이제르트 자작가의 미래를 바꿀 분수령이 되기 때문이다.
필로스 왕과의 관계가 좋아지면 이제르트 자작가의 앞길은 탄탄대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필로스 왕과의 관계가 나빠지면 이제르트 자작가가 반석에 오르긴 위해선 태양이 바뀌거나, 태양 스스로가 고개를 숙일 정도로 압도적인 강함을 성취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자가 훨씬 쉽다.
후자로 가게 되면 정말 대전쟁을 치러야 할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 분수령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 메르디아 삼왕녀를 놓고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꿈에서라도 그녀를 감시하고, 분석해야 한다.
“크으…….”
때문에 문수르는 최근까지 잊고 있었던 속쓰림 증상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됐다.
그러나 문수르는 몰랐다.
그 속쓰림이 전초전이 될 줄은 말이다.
6.
갑작스런 일이었다.
“문수르 경.”
“예, 말씀하시지요.”
“영지를 둘러봐도 될 까요?”
조용히 자신에게 배정된 저택에서만 지내던 메르디아 삼왕녀가 갑작스레 문수르에게 부탁을 했다.
말이 부탁이지, 그녀가 하는 말은 모든 게 들어줄 수밖에 없는 명백한 명령이다.
거절할 방법이 없다.
“특별히 마음에 둔 장소가 있으십니까?”
“그냥 한 번 둘러보고 싶어요. 계속 저택에만 머무니까 너무 지루하더군요. 산책 겸이라고 하죠.”
“호위대를 준비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이오.”
“호위대가 필요한가요? 문수르 경과 같이 움직이면 더 이상 호위는 필요없을 텐데?”
기습이다.
문수르가 무슨 준비를 할 틈도 주지 않는 기습!
그러나 문수르는 웃었다. 자신의 속마음을 결코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따로 준비하실 건 없으십니까?”
“없어요. 딱히 꾸미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산책인데 치렁치렁 달고 다니는 건 오히려 방해만 되죠.”
“삼왕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지요.”
“좋아요. 지금 당장 나가요.”
순식간이었다.
문수르가 메르디아 삼왕녀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머리를 굴리는 사이, 어느새 메르디아 삼왕녀와 그녀를 따르는 두 명의 시녀들, 그리고 문수르와 10명의 병사들은 이제르트 자작가의 내성을 지나, 외성을 지나고 있었다.
‘외성까지…….’
갑작스레 외성까지 나왔다.
외성도 성벽에 둘러 쌓여있긴 하지만 내성의 생활수준에 비하면 그다지 좋지 못하다.
애초에 내성에는 영주와 그 가족들 그리고 기사들과 그 가족들과 그들의 수발을 드는 하인들과 어느 정도의 경비 병력이 전부다. 반면 외성은 말 그대로 영지민들이 지낸다. 생활수준에 차이가 없을 수가 없다.
물론 이제르트 자작가는 외성의 생활수준이 굉장히 높다. 최근 상하수도를 완성했다. 겨울에도 물이 공급된다. 물론 아주 추운 날씨에는 문제가 있지만, 겨울에도 지정된 장소에서 물이 나오고 동시에 사용하고 남은 물을 다른 곳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시스템이다.
또한 대중목욕탕도 있다. 아마 케르빈 월드에서는 파격적일 것이다. 필연적으로 물을 대량으로 필요로 하는 대중목욕탕의 건설은 치수(治水)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도로 정비부터 시작해서, 일부 지역에는 새로이 주택 건설을 진행 중이었다.
솔직히 메르디아 삼왕녀에게 보여줘서 좋을 건 없다.
파격은 결국 파격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파격을 싫어하는 이들은 그 누구도 아닌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고, 그런 기득권을 가진 이들의 정점에 있는 게 바로 왕가의 인물들이다.
‘적당히 둘러대야겠지.’
문수르가 적당한 변명거리를 머릿속으로 떠올릴 무렵.
메르디아 삼왕녀는 영지 이곳저곳을 바라봤다. 그녀는 일단 거리를 보았다.
거리가 참 깨끗했다.
물론 이제까지 대부분의 삶을 왕도에서 보낸 메르디아 삼왕녀 입장에서는 거리가 깨끗하다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왕도의 거리는 그 어느 곳보다 깨끗하고 화려하다. 일부 거리는 대리석을 깎아 만들어 태양이 내리쬐면 눈이 부실 지경이다.
왕도에서만 지낸 철없는 왕녀라면 깨끗한 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깨끗하네요.”
그러나 메르디아 삼왕녀는 그런 철없는 왕녀가 아니었다.
“삼왕녀께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최대한 청결을 유지하는 중입니다.”
“하루 이틀 해서 이렇게 깨끗해질 수 있다면 콩탄 왕국에 깨끗하지 않는 영지는 없겠는 걸요?”
“……평소 청결함을 유지하는 것이 병의 득세를 막는 방법이라 여기신 이제르트 자작님의 노력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그런가요?”
청결과 질병.
어스 월드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이 청결과 질병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다.
더러우면 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
청결함을 유지하는 것이 병에 걸리는 것도, 병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케르빈 월드는 아니다. 이 세계는 위생 상태조차 좋지 못하지만, 청결함과 질병의 상관관계도 모른다. 오히려 병에 걸리면 태양을 피하거나, 목욕을 꺼리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해야만 병이 낫는다고 믿는다.
때문에 문수르가 하는 말은 메르디아 삼왕녀에게 궤변 또는 헛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런가요? 이제르트 자작의 지론이 참 특이하군요.”
그러나 메르디아 삼왕녀는 그것을 특이하다고 치부했다.
문수르의 눈빛이 빛났다.
‘상대를 인정할 줄 안다는 건가?’
며칠 동안 메르디아 삼왕녀를 곁에서 지켜본 결과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메르디아 삼왕녀는 왕가의 상대를 인정할 줄 안다. 고집은 있어도 아집은 없는 타입이다. 데려온 시녀들에게 하는 행동, 그리고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의 행동에서 그런 성정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래서 문수르는 더 긴장했다.
‘차라리 허영심 가득하고 아집투성이의 왕녀였다면 상대하기가 더 편했을 텐데.’
아주 망나니 계집이었다면 적당한 유흥거리를 마련해주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문수르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이 깊고, 머리를 쓸 줄 알며, 자신의 의중을 감출 수 있는 타입이 더 상대하기 까다롭다.
“저건 뭐죠?”
그 순간 메르디아 삼왕녀가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주변 가옥들과는 외형 자체가 다른 건물이었다. 또한 굉장히 컸다. 때문에 눈에 확 튈 수밖에 없었다.
“목욕탕입니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목욕탕은 저렇게 큰가요?”
“아닙니다. 자작가에서 사용하는 목욕탕이 아니라 영지민들이 전부 사용하는 목욕탕입니다. 대중목용탕이라고 합니다.”
“영지민들이 전부 같이 사용한다고요? 남녀 구분 없이? 그럼 남녀가 같이 한 물에서 씻는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안은 다시 두 시설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 사용합니다.”
“그럼 이제르트 자작령의 모든 영지민들은 저 목욕탕을 사용할 수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비용은 얼마나 되나요?”
“딱히 비용을 받진 않습니다.”
“공짜로 물을 마음껏 쓴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문수르는 긴장했다.
듣기에는 평범한 대화 같지만, 결코 아니다. 지금 이 대화를 나누는 순간 메르디아 삼왕녀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
가치관이 계속 흔들리면 사람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가치관이 흔들리지 않도록 귀와 눈을 막은 채 자기 말만 하거나.
혹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거나.
뭐가 됐건 문수르에게는 썩 달갑지 못한 결과다.
“신기하네요. 제가 이용해봐도 될까요?”
“예?”
그러나 메르디아 삼왕녀의 반응은 문수르의 상상을 초월하다 못해 문수르를 식겁하게 만들 정도였다.
“문수르 경도 함께 들어가요.”
“아니…… 남자와 여자가 구분해서 사용하는 곳입니다. 또한 안에서는 옷을 전부 벗어야 합니다. 목욕이 필요하시다면 저택에 준비를…….”
“농담이에요. 의외로 문수르 경은 농담에 약하신 모양이군요.”
말과 함께 문수르를 살짝 훑어보는 메르디아 삼왕녀.
그 순간 문수르는 메르디아 삼왕녀의 본질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메르디아 삼왕녀…… 여우다.’
그녀는 사냥을 할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