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48화. 삼왕녀.>
1.
메르디아 피스언.
보통은 삼왕녀로 잘 알려진 여인이다.
왕가의 인물이지만, 외부에 알려진 바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아직 성혼을 하지 않았으며, 이러다할 혼처가 정해지지도 않았다. 또한 많은 외부활동을 보이지도 않았다. 외부활동이라고 해봐야 페르코 아카데미 재학 시절의 활동이 전부라고 알려졌을 정도다.
그렇다고 대단한 미색을 가진 것도 아니다. 왕녀 치고 흠이 잡힐 정도로 못생긴 건 아니지만, 나름 어릴 때부터 미인 소리가 자자했던 일왕녀나 이왕녀에 비하면 솔직히 좀 급이 떨어진다.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페르코 아카데미 재학 시절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왕가의 자식이라면 오히려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의 성적은 왕가의 자식이 갖춰야할 최소점에 불과했다. 모든 시험마다 수석을 연달아 하거나, 교수들을 놀라게 할 결과를 만들거나, 그렇지 않은 이상 그녀의 이름 뒤에 보통이란 평가 그 이상은 붙지 않았다.
이러다할 특이점이 없는 여인.
그렇기에 그녀의 이름은 콩탄 왕국의 정치판에서 그렇게 자주 거론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왕가의 자식이라고 해도 결국 여자가 가지는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미래는 뻔했다.
필로스 왕이 적당한 정치적 결합이 필요하다 여기는 가문과 성혼을 치르는 게 인생의 종점이다. 그 이후에는 그 가문의 부인이 되어 평생을 살아가게 되겠지.
필로스 왕은 이제르트 자작령으로 보내는 이로 그녀를 택했다.
사실 필로스 왕 입장에서도 이러다할 확신히 있어서 그녀를 택한 건 아니었다.
왕자를 보내는 건 아무래도 그렇다.
그렇다고 이미 성혼하거나 혼처가 정해진 일왕녀나, 이왕녀를 보내는 것도 그렇고, 너무 어린 사왕녀를 보내는 건 더더욱 그렇다.
줄이고, 쳐내고, 제외하다 보니 삼왕녀가 꼽힌 것이다.
메르디아 삼왕녀는 그런 필로스 왕의 명령에 군말하지 않았다. 곧바로 짐을 챙겼다.
약소한 절차를 거친 후에 그녀는 곧바로 이제르트 자작령으로 떠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2.
문수르는 오랜 만에 창을 들었다.
그런 문수르의 곁에는 가누스가 자리 잡고 있었다.
휙휙!
문수르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가누스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그어졌다. 종국에 가누스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실력이 날이갈수록 퇴보하는군.”
예전에도 했던 말이다.
그러나 가누스는 다시 그 말을 또 한 번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문수르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라 터질 것 같았다.
‘젠장.’
안다.
가누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저번에도 한 번 뼈저리게 몸으로 체험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창을 연마했다. 스스로를 다스렸다. 퇴보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발악했다.
그러나 문수르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계획된 일이 끝나서 여유가 생길 것 같다고 생각될 쯤에 다시 한 번 일이 터지고는 했다.
뻥뻥!
정말 미친 듯이 터진다. 신이 문수르를 괴롭히려고 작정을 한 것처럼 말이다.
“죄송합니다.”
문수르가 사과를 했다. 피식, 가누스는 실소를 흘렸다.
“나한테 사과하면 뭐가 달라지나? 퇴보했던 실력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나?”
“저번에 해주신 충고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으니, 사과를 드려야 마땅하지요.”
“흥. 허세만 가득 찼군.”
“진심 어린 사과입니다.”
“사과 따윌 받으려고 여기서 시간을 죽이는 게 아니지.”
가누스가 본론을 말했다.
“이야기를 들었다. 숲으로 들어가 달라고.”
“숲으로 들어간다기보다는 되도록 영지 내 활동을 자제해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최근 문수르는 메르디아 삼왕녀가 온다는 소식에 드워프와 엘프의 존재를 감추기로 했다.
드워프와 엘프에 대한 인간들의 시선은 여전히 노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르트 자작령의 경우에는 문수르의 단계적인 교육과 여러 법안 제정으로 엘프와 드워프를 자국민으로 인정하는 칼란 왕국 수준으로 인식을 끌어올리긴 했지만, 어디가지나 이제르트 자작령의 이야기다. 콩탄 왕국에서는 비정상이다.
하물며 메르디아 삼왕녀는 왕가의 인물이다.
같은 인간조차 자기보다 아래로 보는 자다. 그런 그녀에게 드워프와 엘프는 신기한 동물로 보일 것이다.
괜한 마찰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럴 바에는 그냥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두는 것도 괜찮다.
실제로 이런 일에 대비해서 이미 대피 지역도 만들어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이제 탈라트 부족이나 호우투 부족이나, 더 이상 약한 무리들이 아니다. 각각의 부족이 보유한 아이언히트는 이제 5대가 넘어간다. 그 정도면 적어도 테블스 산을 지배할 정도는 못 되도, 테블스 산 어디에서 맞고 살 정도는 아니다.
물론 드워프와 엘프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빠질 법도 하다.
그래서 문수르는 두 부족의 우두머리를 찾아가 고개를 숙였다. 그들도 나름 상황을 이해해줬다.
그런데 가누스가 다시 그 부분을 걸고넘어지는 것이다.
솔직히 가누스가 걸고넘어질 줄은 몰랐다. 애초에 인간을 싫어하는 그라면 오히려 좋다고 숲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평소라면 좋다고 들어갔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걱정이 되는군.”
“무슨 걱정 말입니까?”
“영지가.”
“영지?”
순간 문수르는 놀랐다.
“이제르트 자작령 말입니까?”
“테블르 산에서 엘프가 살아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
갑작스런 질문이다.
솔직히 이런 질문이 그 누구도 아닌 가누스의 입에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잘 모르겠습니다.”
“최악이지.”
가누스는 이를 갈았다.
“인간들에게 노예로 붙잡히는 것보단 났지. 자유가 있으니까. 그러나 그 자유를 위해서 포기한 대가는 적지 않았지. 특히 겨울이 되면 먹을 게 사라져서 아사자가 생겨나더군.”
아사자(餓死者).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고통스런 죽음 중 하나가 바로 굶어죽는 것이다.
굶어죽는다는 건 단순히 배가 고프고, 육체적으로 고통스럽다는 차원을 넘어서 정신적으로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탈라트 부족에는 매년 그런 아사자가 나오고는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대로 된 농사를 짓지 못해 과일 따위로 식량을 대신하는 엘프 족에게 겨울은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혹독하니까. 하다못해 드워프들은 사냥이라도 하지만, 엘프들은 그조차 불가능하다.
물론 노예마냥 부려지자 비참하게 죽는 것보단 낫다. 굶어 죽더라도 그 과정에는 자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덜 비참할 뿐이다.
가누스는 솔직히 그런 탈라트 부족의 삶이 안타까웠다. 제 아무리 부족원들을 배려해준다고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노력을 해도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아사자 외에도 몬스터의 공격을 받아 죽는 이들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오래 산 건 아니지만, 가누스는 보았다.
이제르트 자작령에 있는 한 배를 굶는 일 따위는 없다. 그 어느 곳보다 먹을 것이 풍족하다. 심지어 처음 보는 것들인데 엘프 부족의 입맛에 너무나도 잘 맞는 것들이 넘쳐난다.
또한 많은 것을 배웠다. 먹을 것을 오래 보존하는 방법, 가공하는 방법…… 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금 같은 지식들이다.
그뿐인가?
문수르의 배려 그리고 이제르트 자작의 배려 덕분에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엘프들은 환영 받진 못하더라도 결코 배척 받지 않았다. 물론 아직까지 인간인 영지민들과의 마주치는 경우 자체가 극도로 적어서 그런 거겠지만 적어도 적대감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이었다.
이쯤 되자 가누스의 걱정은 다른 방향으로 변했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무너진다면…… 그 후에 탈라트 부족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제르트 자작가가 사라진다면 적어도 상황이 악화되면 악화됐지 결코 좋아지진 않을 것이다.
가누스가 문수르를 찾아온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
도와주기 위해서다.
문수르를, 그리고 이제르트 자작가를 위해서 온 것이다.
“하하.”
문수르는 그런 가누스의 말에 짧게 웃었다. 그 웃음에 가누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웃기지?”
“아닙니다.”
“내 말이 웃기나?”
“웃겨서 나오는 웃음이 아닙니다.”
문수르는 감탄했다.
“기뻐서 나오는 웃음입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변화시켰다는 사실에, 자신이 무언가 결과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감탄이 나오고, 눈물마저 나올 것 같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그래, 내 등에는 이제 한 사람만이 있는 게 아니다.’
책임감. 그것이 터져나오려는 눈물샘을 막았다. 꾹꾹 틀어 막았다.
‘이번 일 잘 넘겨야 한다.’
기쁘다고 엉엉 울 때가 아니다.
삼왕녀의 방문은 이제르트 자작가의 정치적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터닝 포인트가 좋은 방향일지, 나쁜 방향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걸 좋은 방향으로 돌리는 게 바로 문수르가 할 일이다.
그렇게 다시금 시간이 흘렀다.
메르디아 삼왕녀가 이제르트 자작령에 도착했다. 그녀를 맞이하러 나간 건 다름 아니라 문수르였다.
3.
수수하다.
메르디아 삼왕녀를 처음 봤을 때 문수르가 느낌 감정은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단순히 생김새가 수수하다는 건 아니었다. 생김새는 솔직히 적당히 귀염성 있는 외모다. 눈이 훽 돌아갈 정도로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몸매가 육감적인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정말 수수한 부분은 차림새였다.
적당한 수준의 드레스…… 솔직히 케르빈 월드의 관점으로 보면 드레스가 아니라 활동복 수준이다.
여기에 왕녀 치고는 장식이 거의 없다. 화려한 보석이 주렁주렁 매달린 목걸이라던가, 손가락 마디마디를 채우고 있는 반지 따위들, 그런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메르디아 삼왕녀라는 사실을 모르고 만났다면 그냥 어느 지방의 작은 귀족가의 아가씨로 착각할 정도다.
그러나 문수르는 이내 메르디아 삼왕녀에 대한 모든 생각을 접었다.
‘어설픈 편견을 만들면 안 된다.’
눈앞의 여인은 문수르가 허투루 잴 만한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수수하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왕가의 여인이라면 본인 스스로가 원치 않더라도 화려하게 꾸며야 되는 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왕가의 체면이 있지 않은가?
왕녀라면 자기만족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 왕가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가장 화려하고, 부유하게 뽐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수수함은 오히려 위장일 가능성이 높다. 보고 놀라야 하는 부분이 아니라 굉장히 조심하고, 의심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대가 문수르 경인가요?”
이윽고 메르디아 삼왕녀가 입을 열었다.
문수르는 예의를 갖추며 대답했다.
“예, 문수르라고 합니다.”
“성은 없나요?”
“아직 없습니다.”
“재미있군요. 콩탄 왕국의 세 번째 오러 마스터가 아직까지 성이 없다니 말이에요.”
짧은 대화.
그러나 문수르는 이 순간 불스 백작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어째서일까? 이 상황에서 왜 하필 불스 백작과의 대화가 떠오른 것일까?
“그럼 성조차 없는 인물이 절 마중나온 셈인가요?”
그래, 이 부분이다.
불스 백작과의 첫 대화 때도 불스 백작은 문수르가 기사가 아닌 용병이란 사실을 걸고 넘어졌다.
이건 일종의 도발이고, 선제 공격이다.
하지만 문수르는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냈다.
“송구합니다. 허나,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삼왕녀님을 호위할 만한 실력을 가진 자는 본인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죄는 달게 받겠으나, 삼왕녀님의 안전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니, 벌은 모든 일이 끝나신 후에 내려주시옵소서.”
적당히 예의도 갖추고, 상황도 무마하는 대답.
문수르는 자신의 대답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그렇다고 하죠.”
메르디아 삼왕녀는 이번에는 짧게 넘어갔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문수르와 삼왕녀, 그 둘의 보이지 않는 전투는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