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165화 (163/293)

165화

7.

필로스 왕은 답장을 받았다.

오랜만이었다.

“드디어로군.”

오랜만에 필로스 왕은

자신의 왕좌가 오롯히 자신의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른다.

“이제르트 자작.”

어쩌면 처음으로 느기는 감정일지도 몰라.

“자네가 드디어 나를 왕으로 인정했군.”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

필로스 왕이 가장 먼저 봐야 했던 건 왕좌가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환호성을 내지르는 국민들이 아니었다. 자신을 추앙하는 귀족들이 아니었다.

카스트로 왕세자!

자신과 같은 피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본래 왕이 됐어야 하는 친혈육.

필로스 왕이 가장 먼저 봐야 했던 건 바로 그 친혈육의 시체였다. 칠혈육의 죽음이었다.

시체를 봤다.

감정 따위가 개입되진 않았다. 슬픔도 환호도 없었다. 그런 감정에 일일이 좌지우지 될 정도였다면 애초에 페스로 제국과 손을 잡고 왕위를 찬탈하는 일을 계획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보다 완벽한 왕위를 세우기 위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꼭 봐야만 했을 뿐이다. 친혈육의 시체를, 정당한 왕위계승권을 가진 이의 시체를 말이다.

그러나 카스트로 왕세자의 시체를 본 후에도 가끔 본인이 왕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을 할 때가 있었다.

이제르트 자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가끔 그런 의심이 들고는 했다.

그래서 테블스 산 앞에 이제르트 자작가를 두었다.

사실 필로스 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제르트 자작가 따위를 세상에서 지우는 건 일도 아니다. 몇몇 이들이 필로스 왕을 지탄하고, 비판하겠지만 필로스 왕에게는 그런 잔소리쯤은 짓누를 힘과 권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보고 싶었으니까.

카스트로 왕세자를 끝까지 모셨던 이제르트 자작이 무릎을 꿇는 모습을, 결국 자신에게 지원을 부탁하는 그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 순간이 왔다.

이제르트 자작이 고개를 숙였다.

“순순히 숙인 건 아니겠지.”

필로스 왕도 안다.

이제르트 자작이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을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필로스 왕은 이제까지 자신을 향해 믿도 끝도 없는 아부를 하면서도 뱃속으로 칼을 가는 족속들을 상대해왔다.

빅토리안 공작만 해도 그렇다.

당장 자신 앞에서는 간쓸개도 줄 정도로 고개를 숙이던 이가 기회가 생기니 반역을 꾀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왕의 자리에 오르면, 순수하게 접근하는 이는 없다. 하는 모든 게 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핵심은 그 의중이 아니다.

이제르트 자작이 필로스 왕의 편지를 받고, 그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는 건 적어도 빅토리안 공작의 반역을 막겠다는 의미이며, 그건 곧 필로스 왕의 왕위를 인정하겠다는 의미다.

“별 거 아니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이제르트 자작이 필로스 왕을 인정한다는 건 정말 사소하다 못해 가소로운 일일 지도 모른다.

이제르트 자작이 뭐라고 콩탄 왕국의 왕을 인정한다, 안 한다 그리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기분이 나쁘진 않군.”

그러나 필로스 왕이 그렇게 느꼈다.

“좋아.”

감상은 거기까지다.

필로스 왕은 그런 감상에 젖기 위해 이제르트 자작가에게 편지를 보낸 게 아니다.

아히만트 백작이 편을 들게 된 빅토리안 공작은 무서운 적이다. 섣불리 상대하면 오히려 먹힌다. 먹히게 되면 종국에는 왕위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필로스 왕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빅토리안 공작이 왕위를 얻는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필로스 왕을 제거하는 일일 테니까.

필로스 왕이 카스트로 왕세자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변방이나 다름없는 이제르트 자작령을 기점으로 빅토리안 공작에게 큰 타격을 먹힐 수 있는 무언가가.

“그 아이를 움직이면 되겠군.”

8.

필로스 왕의 답장이 왔다.

필로스 왕과 이제르트 자작이 긴밀하게 편지를 주고 받는 것도 그렇지만, 그 내용은 더 파격적이었다.

“후우…….”

편지를 읽은 이제르트 자작은 한숨부터 쉬었다. 그 정도로 편지의 내용은 파격적이다 못해 비이상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르트 자작은 좀 더 생각했다.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에 문수르를 불렀다.

문수르는 하던 일을 전부 멈추고 이제르트 자작을 찾아왔다.

“왕도에서 두 분이 이곳으로 올 걸세.”

“보다 긴밀한 협력을 위해서입니까?”

“명분을 위해서겠지.”

“명분이라 하면…… 왕가의 인물이 오는 겁니까?”

“역시 문수르 경이로군. 그런 것까지 유추해내다니.”

문수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필로스 왕과 손을 잡게 된 이상 그것을 염두에 두고 전면적인 계획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필로스 왕이 이제르트 자작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필로스 왕은 강한 왕이다.

그의 휘하에는 강력한 군대도 있으며, 그의 곳간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곡식이 있고, 금고에는 엄청난 돈이 있다. 그중 하나만 이제르트 자작가에 지원해줘도 이제르트 자작가가 가지게 되는 힘은 엄청나다. 필로스 왕이 마음먹는다면 그 셋 모두를 지원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왕이 움직이는 데에도 명분이 필요하다.

또한 무리한 지출, 무리한 작전, 무리한 행동은 오히려 빅토리안 공작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왕의 군대를 움직이는 건 있을 수 없다.

돈?

주면 고맙지만, 사실 이제르트 자작가도 금전적으로는 지금 충분히 풍족한 상황이다.

식량은 말할 가치도 없다. 겨울에도 수확이 가능한 이제르트 자작가는 그 어떤 영지보다 배가 부른 영지다.

이런 부분을 고려했을 때 필로스 왕이 가장 저렴하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이제르트 자작가를 도울 수 있는 건 다름 아니라 왕가의 일원을 이제르트 자작가에 보내는 것이다.

상징성 때문이다.

이제르트 자작가와 필로스 왕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건 콩탄 왕국 모두가 아는 사실.

그런데 왕가의 인물이 이제르트 자작령을 방문한다면?

필로스 왕이 이제르트 자작가를 돌보겠다는 의미다. 이제까지 왕에게 무시 받았던 이유로 이제르트 자작가를 공격했던 무리들은 이제는 감히 그런 생각조차 못하게 된 것이다.

또한 만약 왕가의 인물이 이제르트 자작령에 머물게 된다면?

이제까지 왕명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이제르트 자작가를 공격하는 짓은 불가능해진다.

그건 곧 왕에 대한 도전이다.

왕명을 거부하고 왕에게 도전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반역이다.

제대로 된 명분 없이 이제르트 자작가를 공격할 수 없다는 의미다.

고작 왕가의 인물 한 명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이제르트 자작가가 가지게 되는 이점은 이 정도로 많다.

더불어 왕 역시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다. 왕가의 인물을 모신다는 건, 왕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낸다는 것과 마찬가지. 또한 왕가의 인물을 심어둔다는 건 이제르트 자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기도 한다. 목줄을 채우는 것이다. 필로스 왕의 입장에서는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이제르트 자작가를 자기 마음대로 다루는 것이다.

‘필로스 왕 슬하에는 자식이 적지 않다.’

더불어 왕가가 손이 귀한 것도 아니다.

필로스 왕 슬하에는 아들만 셋에 딸이 넷이다. 자식 한 명쯤 보낸다고 후계자 구도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아들은 좀 힘들겠지.’

하지만 왕자는 그래도 일단 후계 구도가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되도록 많이 데리고 있는 게 좋다.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어느 순간 왕자 중 한 명이 병사 또는 사고사로 죽을 지도 모른다. 암살을 당할 수도 있고.

결국 왕녀 중 한 명이 올 것이다.

그러나 일왕녀는 이미 가정을 꾸렸다. 다름 아니라 루이 노믹스와 혼인을 했다. 그래서 루이 노믹스가 왕의 사위라 불리지 않은가?

이왕녀 역시 혼처가 정해진 상황. 그런 이왕녀를 밖에 놔두는 건 아무래도 그렇다.

남은 건 삼왕녀와 사왕녀…… 둘 중 한 명이라는 건데 사왕녀는 나이가 어리다. 올해로 열 살이 됐다.

결국 남은 건 한 명.

“삼왕녀께서 오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페르코 아카데미를 막 졸업했다고 알려진 삼왕녀. 그 외에는 이러다할 정보가 없는 그녀가 이제르트 자작가에 올 것이다.

그럼 여기서 핵심은 따로 생긴다.

“그렇다면 호위 기사로는 누가 옵니까?”

삼왕녀 혼자 덩그러니 올 리는 없다. 필시 그녀를 호위할 기사단을 같이 보낼 것이다.

더불어 그 기사단이 이제르트 자작가를 견제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제르트 자작가를 그냥 놔두는 건 아무래도 좀 그러니까. 목줄과 채찍, 두 가지가 있어야 당근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문제네.”

“골치 아픈 자가 옵니까?”

“차라리 골치 아픈 자가 오면 계획이라도 짜겠지.”

이제르트 자작의 말에 문수르는 표정을 지웠다.

“설마 호위 기사단 없이 삼왕녀 혼자만…….”

“그렇다네. 삼왕녀는 호위 기사단 없이 이제르트 자작령을 방문할 계획이시네.”

무슨 의미일까?

‘대체 의도가 뭐지?’

이 부분에 문수르도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 의도가 있다. 적어도 병력 파견이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선택을 하진 않았을 터.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호위 기사단이 오지 않는다면 이후 삼왕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모두 이제르트 자작가의 책임이란 사실이다.

삼왕녀를 잘 관리해야 한다.

‘기사들을 붙여야 하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르트 자작가가 기사단 전력을 구축해 기사를 붙여야 한다.

근데 이게 의외로 골치가 아프다.

‘왕가의 인물을 호위할 정도로 이름값이 될 만한 기사가 없다.’

실력 좋은 기사들은 있다. 포비어 경도 실력은 훌륭하고, 오러 나이트 정도면 삼왕녀를 호위하는데 문제는 없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아이언히트를 붙여주면 될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삼왕녀의 신분을 생각하면 아무나 붙여줄 수 없다. 이름값이 없는 기사를 붙이는 것만으로도 왕가 입장에서는 불만을 토로할 수 있으니까.

‘설마.’

그렇다면 결국 호위 기사로 붙어야 하는 사람은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한 명 뿐이다.

‘나를 끌어들이려고?’

문수르.

콩탄 왕국의 세 번째 오러 마스터!

그 정도 나서야지 왕가 입장에서도 나름 만족할 것이다. 어쩌면 그 부분을 노리고 이런 수작을 부렸을 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지.’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왕과의 거래다.

마음에 안 든다고 거래를 바꿔 달라고 혹은 거래를 무르자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수르 경. 자네도 알겠지만, 만약 삼왕녀께서 영지에 오신다면 그녀의 호위는 자네가 맡아야 할 걸세.”

더불어 이 모든 사실을 이제르트 자작도 알고 있었다.

카스트로 왕세자를 곁에서 모셨던 그다. 왕가의 사람을 모시기 위해 뭐가 필요한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예, 제가 맡겠습니다.”

문수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문수르를 보며 이제르트 자작은 마냥 웃을 순 없었다.

이 모든 일은 우연도, 사고도 아니다.

필로스 왕, 그의 의도일 터.

삼왕녀를 모시는 건 예의 보통 왕가의 왕녀를 모시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많이 힘들 것이다.

이제르트 자작은 다시금 고생해야 하는 문수르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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