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4.
이제르트 자작은 가끔 추억에 빠진다.
카스트로 왕세자.
그는 훌륭한 재목을 가진 자였으며, 그 어떤 이들보다 명백한 정당성을 가진 적통이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그런 카스트로 왕세자를 섬겼다. 어떻게든 그분을 왕위에 올려놓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희생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페스로 제국의 개입 이후 필로스 삼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이제르트 자작의 소원과 희망은 송두리째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 날 이후로 버틴 영욕의 세월이 이제 십 년을 훌쩍 넘어갔다. 이제까지 버틴 것 자체도 신기할 따름이다. 버틴 것도 신기할 정도인데 이제르트 자작가는 어느새 이루 말할 수 없는 강력함을 손에 쥐게 됐다.
전력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뿐이지, 콩탄 왕국 내의 영주들 중에 가장 강력한 전력을 보유한 건 이제르트 자작가가 분명하다. 소형 기가스라고 하지만, 0.6배 급 기가스인 아이언히트는 최근 20대가 완성됐다. 계속되는 영주들과의 전쟁 덕분에 노획한 기가스의 마나 동력원을 개조한 덕분에 마나 동력원의 수급에도 문제가 없었다. 여기에 노획한 기가스들 중 일부를 수리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1배 급 기가스가 5대다. 여기에 포비어가 타고 다니는 1.2배 급 기가스를 비롯해서 1.2배 급 기가스도 3대 보유 중이다. 마지막으로 드래곤 파이터! 어쩌면 케르빈 월드에서 가장 강력할 그 기가스 역시 이제르트 자작가의 소유다.
30대에 가까운 기가스를 보유한 셈이다.
더 놀라운 건 이 기가스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재원도 확보했다는 의미다.
꾸준한 테블스 산의 개간 작업 덕분에 농지는 부족하지 않았다.
여기에 이제르트 부속령에서 나오는 세수도 결코 적지 않았다. 베르베 백작가로부터 받은 배상금도 적지 않다. 여기에 만약 상인과의 거래를 통한 특산품 판매까지 이루어진다면 이제르트 자작가의 재산은 어마어마하게 커질 것이다.
대단한 발전이다.
보통 영주라면 이런 변화에 그저 넋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힘을 가질 수록, 영지가 보다 발전할수록, 이제르트 자작가는 만족감보다는 허탈함을 느꼈다.
‘카스트로 왕세자시여…….’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시체가 되어버린 카스트로 왕세자의 장례를 치르던 나날들이다.
왕세자의 죽음임에도 처참하기 그지없던 그 장례식장을 말이다.
만약 그때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르트 자작가에 이런 저력이 있었다면 카스트로 왕세자는 무난하게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왕위에 올라 페스로 제국의 개입을 차단한 채 콩탄 왕국만을 위한 치세를 펼쳤을 것이다.
그런 이제르트 자작에게 편지 한 통이 왔다.
왕가의 문장이 찍힌 편지.
그건 다름 아니라 필로스 왕이 보낸 편지였다.
5.
문수르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필로스 왕에 대한 조사도 빼먹지 않았다.
사실 이제르트 자작가가 진정 콩탄 왕국의 반석에 올라 명성을 떨치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왕위에 오른 자의 존재가 중요했다.
필로스 왕과 이제르트 자작가 사이에는 좋지 못한 일이 많다. 까놓고 말해서 필로스 왕의 재임 기간 동안 이제르트 자작가가 제대로 인정받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기에 문수르는 필로스 왕을 왕위에서 끌어내리는 것 역시 염두에 두었다.
그 관점에서 필로스 왕을 조사했다.
다각도로 필로스 왕이란 자를 연구했다.
그 결과는 의외로 뜻밖의 것이었다.
‘나름 괜찮다.’
필로스 왕.
이제르트 자작가 입장에서는 왕위를 강탈한 도둑놈이지만, 콩탄 왕국 전체를 놓고 왔을 때 필로스 왕은 대단한 선군(先君)은 못 되더라도 최소한 정도는 지킬 줄 아는 왕이었다.
아니, 정치적 감각은 굉장히 뛰어났다.
언제든 콩탄 왕국을 베껴 먹고 싶은 페스로 제국을 상대로 적당한 균형을 맞추면서 줄 건 주되, 페스로 제국으로부터 얻어낼 건 얻어낼 정도의 정치적 감각이 있었다.
그뿐인가?
결국 그 정치적 감각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시켰다. 귀족들을 전부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페스로 제국을 등에 업고 있다고 해도 이런 건 뛰어난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페스로 제국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중이다. 이건 의외로 중요한 문제다.
페스로 제국이 제 아무리 주변국들과 친화 정책을 펼친다고 해도 그들의 본질은 흉포하고, 공격적이다. 수백 년 넘게,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본질이 쉽게 바뀔 리 만무하다.
그런 페스로 제국과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관점에서 본다면 페스로 제국이 건재한 지금 콩탄 왕국을 이끌기에 가장 적합한 왕은 필로스 왕일지도 모른다.
상황은 냉정하게 봐야 한다.
필로스 왕을 끌어내리면 이제르트 자작가가 콩탄 왕국에서 인정 받을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페스로 제국이란 거대한 적을 상대해야 한다.
그렇기에 문수르는 다른 관점으로 접근했다.
필로스 왕과 거래를 하는 거다.
이제르트 자작과 필로스 왕 사이가 최악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왕과 귀족의 관계 아닌가?
그 둘은 거대한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들이다. 대의 앞에서는 사사로운 감정을 죽일 줄도 알아야 한다.
사실 필로스 왕 입장에서도 이제르트 자작가는 카스트로 왕세자를 모셨다는 것, 그것만 제외한다면 굉장히 매력적인 신하다. 일단 충성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뿐인가?
사사로운 정치적 싸움보다는 나라를 지키는 데에 힘을 쓰고 있다. 사실 이제르트 자작가가 테블스 산의 몬스터를 막는 것만으로도 콩탄 왕국은 엄청난 덕을 보는 중이다.
이제는 그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저력까지 가지게 됐다.
필로스 왕 입장에서는 솔직히 이제르트 자작을 적으로 돌리기보다는 아군으로 두는 게 좋다.
또한 이제르트 자작령의 위치는 왕도에서 가장 먼 곳에 있다. 필로스 왕 입장에서는 세력이 커진다고 해도 가장 부담이 적다. 또한 테블스 산이 있는 만큼 이제르트 자작에게 어느 정도 권한을 줘도 어느 정도 심적인 부담은 적다.
이제르트 자작 입장에서도 카스트로 왕세자와의 추억을 억누를 수 있다면 필로스 왕과 가까이 해서 나쁠 건 없다.
왕과 가까이 한다면 이제까지 받았던 모든 박해에서 벗어날 뿐더러,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문수르는 다각도로 경우의 수를 봤다.
그런 와중에 온 것이다.
이제르트 자작 앞으로 필로스 왕의 친필 편지가 말이다.
6.
“그게 정말입니까?”
처음 이제르트 자작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믿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필로스 왕이 이제르트 자작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내용은 더 기겁할 만한 것이었다.
“필로스 전하께서 도움을 요청하시더군.”
“맙소사…….”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빅토리안 공작이 외세와 손을 잡고 반역을 하고자 하니, 자신을 도와 빅토리안 공작을 처단하자는 내용이었다.
문수르는 이 내용을 보고 두 가지 부분에서 놀랐다.
하나는 필로스 왕이 빅토리안 공작을 버렸다는 것! 빅토리안 공작은 친왕파다. 달리 말하면 필로스 왕의 오른팔과 마찬가지인 자다. 가진 세력과 영향력도 엄청나다. 필로스 왕 입장에서는 쉽게 내칠 수 없다. 내치려고 하면 반발이 너무 거세다.
그런데 그런 빅토리안 공작에게 반역이란 죄를 뒤집어 씌었다.
그냥 빅토리안 공작을 내치는 수준이 아니다. 왕이 귀족에게 반역이란 죄를 뒤집어 씌었다면 둘 중 하나다.
반역죄로 그 가문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던가.
아니면 그 반역이 성공하여 하늘이 바뀌던가.
결단을 내린 거다.
이 편지를 쓴 이상 필로스 왕과 빅토리안 공작, 둘은 같은 땅에서 같이 살아 숨 쉴 수 없다.
‘설마.’
아무리 전쟁이 심화되었다고 해도 필로스 왕이 이런 식으로 빅토리안 공작을 내칠 줄은 몰랐다.
동시에 빅토리안 공작에 대한 대항마로 이제르트 자작가를 택했다는 점에서 놀랐다.
‘이 정도 인물이었나?
필로스 왕 입장에서 이제르트 자작가를 대항마로 선택했다는 건 그가 사적인 감정을 억누를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란 소리다.
물론 반대로 이게 함정일 가능성도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토사구팽.
이제르트 자작가를 써먹고 버리려고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생각보다 높지 않다.
필로스 왕은 말 그대로 왕이다. 제 아무리 부당한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다고 해도 왕위에 오른 이상 그는 왕답게 행동해야 한다. 그 누구도 아닌 왕, 본인을 위해서 말이다.
‘이제르트 자작가와 필로스 왕의 관계를 배제하고 봤을 때 필로스 왕의 선택은 정답이다.’
무엇보다 필로스 왕의 선택은 나쁘지 않다.
이제르트 자작을 이용해 먹으면 그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없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놔두면 된다. 그냥 사냥개가 알아서 죽는 꼴이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성공하면?
반역을 저지른 빅토리안 공작을 제거한다는 의미니, 필로스 왕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을 터.
더군다나 그렇게 되면 필로스 왕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가장 꼴보기 싫었던 이제르트 자작가를 아군으로 두게 되는 효과까지 생기게 된다. 내부의 적이 훌륭한 지원군이 된다는 거다. 앓던 이가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보통 때라면 문수르 경, 자네의 생각부터 물어봤겠지만.”
“아!”
그러나 이 순간 문수르는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내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결정권은 문수르에게 있는 게 아니다.
“이번 일에 있어서는 내 생각부터 말하겠네.”
이제르트 자작.
그는 필로스 왕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가 싫다고 하면 따라야 한다.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이제까지 영욕의 세월을 지내온 이유가 무엇인가? 자존심, 정당한 왕세자를 섬겼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 때문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필로스 왕 앞에 기는 개가 되었을 것이다.
개가 되지 않았다.
사람으로 남기 위해서 온갖 치욕을 감수했다.
그런데 지금 필로스 왕 앞에 고개를 숙이라고?
이제르트 자작 입장에서는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다.
꿀꺽!
문수르는 긴장했다.
‘대체 무슨 말씀을…….’
이제르트 자작이 과연 어떤 결단을 내릴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제르트 자작이 어떤 결단을 내리든, 문수르는 그 결단을 수용할 것이다.
필로스 왕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걸 따를 것이고, 반대로 필로스 왕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 역시 따를 것이다.
“나는 필로스 전하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네.”
그리고 이제르트 자작이 결단을 내렸다.
의외의 결단이었다.
“필로스 전하와 손을 잡으시겠다는 겁니까?”
“내 마음에는 아직도 카스트로 왕세자, 그분이 남아있네.”
“그러하시면 오히려 손을 잡지 않으심이…….”
“자네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잡이 않았을 거네. 하지만 지금은 다르네.”
이제르트 자작.
그는 자신의 자존심을 버렸다.
“내 어깨 위에는 너무나도 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려 있네. 그런 그들 앞에서 내 옹졸한 자존심만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네.”
대신에 사람을 택했다.
자신의 영지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물론! 단순히 필로스 전하 밑에서 충견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네. 나는 정정당당하게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 동시에 콩탄 왕국의 미래를 위해 노력할 것일세.”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필로스 왕에게 무릎 꿇을 생각은 없었다.
이제르트 자작가는 이번 일을 항복이 아닌 기회로 삼고자 했다.
문수르는 고개를 숙였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옵소서.”
이제르트 자작의 선택은 충분히 훌륭한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