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47화. 왕의 편지.>
1.
콩탄 왕국 하늘 위를 가득 덮은 전운은 쉽게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제이머스 후작 파벌과 빅토리안 공작 파벌은 서로를 향한 공격의 정도를 더 강화하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영지전이 일어났다. 곳곳에서 전쟁으로 인한 아우성이 울려 퍼졌다.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때문에 일부 귀족들은 왕에게 청원을 할 정도였다.
“전하, 전쟁을 막아주시옵소서.”
“왕국의 모든 이들이 전쟁통에 시름을 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이제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으로 겨울을 보내면, 무수히 많은 자들이 죽을 것이옵니다.”
귀족들 모두가 전쟁에 미친 바보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중립을 추구하는 귀족들도 분명 있었다. 그들 중에 제대로 정신이 박힌 자들은 당연히 필로스 왕에게 읍소했다.
사실 이번 전쟁은 결국 필로스 왕이 방관을 택한 탓에 일어난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필로스 왕이 나선다면, 제국의 지지를 받고, 슈페언 백작의 지리를 받는 필로스 왕이 나선다면 전쟁은 금방 정리될 것이다. 더군다나 빅토리안 공작 파벌도 그렇고 제이머스 후작 파벌도 그렇고 그들의 본질은 친왕파 아니었던가?
왕이 나서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필로스 왕은 나서지 않고 있었다. 전쟁의 폐해를 걱정하는 귀족들은 그것이 우려되었다.
물론 일부 귀족들은 말했다.
“전하께서는 이번 기회에 커진 귀족들의 세력을 줄이려고 방관을 자처하신 것이외다.”
“오히려 전하께서 전쟁을 즐기시는 듯하오. 그러니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전하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오히려 필로스 왕이 전쟁을 바라고 있다고.
때문에 제국의 개입은 없을 것이며, 필로스 왕의 개입 역시 없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정작 필로스 왕의 마음은 그런 귀족들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2.
필로스 왕은 왕좌 위에 앉아 있었다.
그의 하루는 대부분 그 왕좌에서 시작해 왕좌에서 끝난다. 필로스 왕은 그 사실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왕좌 위에 앉을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았다.
매일, 변한 것 없는 자리지만 그 자리에 앉을 때만 필로스 왕은 스스로가 왕임을 자각했다.
그러나 최근 필로스 왕은 왕좌 위에 앉아 있음에도 스스로가 왕이라는 사실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굉장히 심각한 일이었다.
왕이 왕임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건 왕의 모든 권위가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리고 사실 그것이 필로스 왕이 가진 가장 큰 콤플렉스이자, 약점이기도 했다.
필로스 왕은 안다.
본인 스스로가 정당하게 왕위에 오른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콩탄 왕국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의 역사 속에서 정당한 방법으로만 왕위에 오른 왕만 있는 건 아니다. 의외로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자가 적지 않다.
필로스 왕도 정확히 말해서 본인에게 정당성이 엎다는, 사실 그 자체에 열등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필로스 왕이 자력으로 왕위에 오른 게 아니라, 제국의 힘을 빌렸다는 사실.
그 부분이었다.
‘아히만트 백작.’
필로스 왕은 바보가 아니다. 그가 단순한 바보였다면 절대 제국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르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왕위에 오른 이후 필로스 왕은 자신의 왕권을 강력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제국만 믿고 덤벼드는 무능한 왕이었다면 오히려 꼭두각시 왕이 되었겠지.
필로스 왕은 왕권을 쥐고 있을 당시 준비를 했다.
자신의 뒤를 봐주는 슈페언 백작이 언제까지 아군이 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국과의 다른 정치적 노선을 만들고자 했고 또한 한편으로는 이곳저곳에 사람을 심어두고, 정보기관을 만들어 수시로 정보를 수집해 분석하고 정리했다.
그 덕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겠다?’
아히만트 백작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제국에서도 가장 조용하게 지내던 아히만트 백작이 빅토리안 공작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 후에 빅토리안 공작이 움직였다.
‘그리고 빅토리안 공작.’
필로스 왕은 직감했다.
‘드디어 왕위를 노리는군.’
빅토리안 공작이 왕위를 노리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필로스 왕이 그러했던 것처럼 제국을 등에 업고 왕이 되고자 한다는 사실을.
사실 빅토리안 공작의 그런 의중은 예전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빅토리안 공작은 필로스 왕, 자신은 많이 닮았다. 아니, 빅토리안 공작의 나이가 훨씬 많으니 반대로 말해야겠지. 필로스 왕은 빅토리안 공작을 많이 닮았다. 단지 필로스 왕은 왕가의 적자인 탓에 왕이 될 명분이 빅토리안 공작보다 좀 더 있었을 뿐이다.
사실 빅토리안 공작에게도 왕가의 피가 흐르긴 한다. 애초에 공작가와 왕가 사이에서 혼인을 통한 권력 결속은 흔한 일이니까.
그러나 문제는 아히만트 백작의 개입을 알고 있음에도 필로스 왕이 취할 행동이 마땅찮다는 점이었다.
‘제이머스 후작에게 힘을 실어주는 게 좋을까?’
빅토리안 공작이 야욕을 드러낸 이상 그에 대한 대항마는 제이머스 후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정말 제이머스 후작이 빅토리안 공작을 상대할 수 있을까?
이 부분에 있어서 필로스 왕은 확신을 할 수 없었다. 빅토리안 공작 파벌이 이미 대세를 잡은 지 오래다. 더군다나 제이머스 후작은 정치적으로 봤을 때 빅토리안 공작에게 밀린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제이머스 후작은 정치에 밀려 오판을 했다. 그래서 명분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얻지 못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제이머스 후작은 빅토리안 공작을 상대하기에 여러모로 부족하다.
여기에 아히만트 백작이 빅토리안 공작에게 지원을 해준다면, 빅토리안 공작은 필로스 왕가도 한 판 붙어볼만 하다. 반면 제이머스 후작은 슈페언 백작의 도움을 받기에 요원하다. 까놓고 말해서 제이머스 후작은 슈페언 백작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루이 노믹스와도 사이가 좋지 못한 상황 아닌가?
‘어떻게 해야 할까?’
힘을 실어주는 것도 말처럼 쉬운 상황이 아니다.
특히 루이 노믹스를 움직여야 한다. 루이 노믹스는 왕의 사위이기도 하지만, 슈페언 백작의 대리인이기도 했다.
루이 노믹스가 원하지 않는다면 슈페언 백작도 탐탁지 않아할 것이다. 이 역시 필로스 왕의 고민 중 하나였다.
루이 노믹스를 다루는 것!
말처럼 쉽지가 않다.
“흠.”
그래서일까?
이 순간 필로스 왕의 머릿속에 한 명의 이름이 떠올랐다.
“문수르라고 했던가?”
2.
체가스 자작이 죽고, 체가스 자작가의 병력이 몰살을 당했다.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나 콩탄 왕국에서 이 일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워낙 곳곳에서 소란이 잦은 탓에 대부분의 귀족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체가스 자작을 욕했다.
“쯧쯧, 베르베 백작도 어찌하지 못한 이제르트 자작가를 체가스 자작 따위가 노리다니.”
“정신이 나간거지 뭐.”
“하물며 먼저 공격을 가다니? 죽어도 자기 책임이지 뭐.”
체가스 자작이 주제도 모르고 나섰다고 생각했다. 공을 탐해 무리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한편 이제르트 자작은 체가스 자작이 왕명을 어기고 무단으로 영지에 침입했으며, 체가스 자작가에 그 대가를 요구했다. 무려 100만 골드에 다다르는 보상금을 요구했다.
체가스 자작은 그 보상금을 치를 여력이 없었다. 때문에 체가스 자작이 통째로 이제르트 자작가에게 넘어간 것이다.
체가스 자작령이 혼란스러워졌다. 병사들은 전부 죽었고, 기사들도 전부 죽었다.
체가스 자작령은 일종의 무장해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체가스 자작령의 영지민들은 하루 빨리 이제르트 자작이 자신들의 영주가 되기를 소원했다.
사실 체가스 자작령은 이제르트 자작령과 근접해 있었고, 때문에 체가스 자작령의 영지민들은 날이 갈수록 좋은 소식만 들려오는 이제르트 자작령을 동경했다.
언제나 폭정을 일삼는 체가스 자작과 달리 이제르트 자작의 선정은 아는 사람은 알았다. 또한 이제르트 부속령이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굉장히 잘 관리되는 것 역시 소문이 어느 정도 난 상황.
문수르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몇 가지 절차를 끝낸 후에 곧바로 준비했던 사람을 체가스 자작령으로 파견했다.
‘이런 때를 대비해 사람을 키웠지.’
문수르는 단순히 병사들 그리고 기사들만 키우는데 집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수르가 더 중점적으로 육성하고자 한 건 사무, 행정 등에 등한 관리들이었다.
머리가 좋고, 똘똘한 이들 그리고 영지에 충성심이 있는 이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해톤과 마구르 역시 열심히 노력했다. 시간이 나면 문수르가 직접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덕분에 나름 제 몫을 해주는 행정가들이 생겨났다. 문수르는 그들과 해톤을 묶어 체가스 자작령에 보냈다. 더불어 테일러와 푸르쯔를 아이언히트와 묶어 호위로 보냈다. 병사들도 서른 명 붙여줬다.
그들은 빠른 시일 내에 체가스 자작령을 정비할 것이다.
물론 해톤이 떠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제르트 자작가의 행정업무에 공백이 생기겠지만, 이제는 다른 행정가들이 그 부분을 어느 정도 커버해줄 만했다.
무엇보다 어느 정도 영지가 안정된 상황이었기에 예전만큼 분주하지는 않았다.
일은 순조롭게 풀렸다.
“너무 조용하군.”
너무 순조롭게 풀려서 걱정이 생길 정도였다.
문수르는 실제로 쉬지 못한 채 근심걱정이 더 많아졌다.
“너무 조용해.”
체가스 자작이 무너졌다.
보통 귀족들이야 체가스 자작이 이제르트 자작의 술수에 넘어가 망했다고 생각하지만, 머리가 있는 귀족이라면 생각이 다를 것이다. 특히 빅토리안 공작 파벌의 귀족들은 이번 일을 이제르트 자작가의 선전포고라고 여길 것이다.
어찌 됐건 이제르트 자작은 수작을 부려 체가스 자작을 공격한 것이나 다름없다. 체가스 자작은 빅토리안 공작 파벌에 속해 있다. 이건 빅토리안 공작을 향핸 도발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보우런 남작이나, 베르베 백작의 일이 있긴 하지만, 이 두 경우는 어디가지나 보우런 남작과 베르베 백작이 사건발단의 원인이었다. 이제르트 자작가는 당하는 입장이었다.
반대로 체가스 자작은 속을 파고 들면 이제르트 자작가가 사건발단의 원인이다.
빅토리안 공작은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
‘이대로 이제르트 자작가를 놔두면 빅토리안 공작도 좋을 게 없을 텐데 말이야…….’
이제르트 자작가가 눈엣가시 같다는 것도 이유겠지만, 좀 더 큰 이유가 있다.
바로 결속력이다.
귀족들이 온갖 뇌물을 바치고, 아부를 하면서까지 빅토리안 공작 파벌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건 빅토리안 공작이란 우산을 쓰고 싶어서다. 빅토리안 공작 파벌에 들어가면 다른 귀족에게 해코지 당할 이유가 없다. 문제가 생기면 빅토리안 공작이 도와줄 것이다.
반대로 빅토리안 공작 입장에서는 자신의 파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에게 당한 귀족들을 보호해주고, 그들을 도와줄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세력을 건드린 이들을 응징할 필요가 있다.
기브 앤 테이크.
이 사실은 어디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자.
보우런 남작은 빅토리안 공작을 대신해 이제르트 자작가를 쳤다가 망했다. 하지만 그 이후 정계에서는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졌다.
베르베 백작은 빅토리안 공작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 무단으로 이제르트 자작가를 쳤다가 패배했다. 이후 베르베 백작은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했을 뿐더러 베르베 백작은 여전히 실종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체가스 자작. 이제르트 자작가의 수작에 넘어가 패망했다.
이쯤 되면 빅토리안 공작을 따르는 귀족들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언제 어느 순간 자신들의 처지가 앞서 거론한 세 귀족처럼 되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제이머스 후작 파벌과 전쟁이 한참인 지금, 전쟁의 위험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불만이 곧 행동으로 나올 지도 모르는 시점이다.’
불만이 극에 다다르면 몇몇 귀족들이 빅토리안 공작 파벌에서 빠져나올 지도 모른다.
빅토리안 공작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건 바로 그 부분이다.
그런데 빅토리안 공작의 움직임은 너무 조용했다. GPS시스템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조사함에도 이러다할 정보가 잡히지 않았다.
‘대체 뭐지?’
그게 바로 문수르가 가진 불안감의 원인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문수르는 한 장의 편지를 받게 됐다.
그리고 그 편지가 문수르의 모든 계획을 송두리째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