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5.
문수르는 준비하고 있었다.
‘한 번에 끝난다.’
이미 상대방의 위치는 GPS시스템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감시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 어느순간이라도 체가스 자작가의 병력을 몰살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기다렸다.
충분히 좋은 기회가 여러 번 찾아왔음에도 문수르는 나서지 않고 힘을 모은 채 기다렸다.
이유?
보다 많은 걸 얻기 위해서다.
‘체가스 자작가를 무너뜨리면…… 결국 표적이 된다.’
작전을 세워서 체가스 자작을 유인한 건 성공했다. 물론 나름 명분이 필요한 만큼, 체가스 자작이 이제르트 자작령에 진입하는 순간 그를 해치우고자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되면 체가스 자작가 도리와 법을 어기고 무단침입을 한 셈이 되니까. 즉결심판, 체가스 자작가를 해치워도 명분상으로는 문제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있어서 확실한 건, 제비언과 카롤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는 점이다.
안다.
문수르가 마음만 먹으면 혹은 그들에게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그 둘이 목숨을 잃는 것까지는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구하고 싶을 때 구할 수 있다. 작은 신경만 쓰면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일부러 무시했다.
이유?
형평성을 위해서다. 문수르는 이미 제이번에게 너무나도 많은 기회를 줬다. 그런데 다시 기회를 주고, 그를 보살펴준다는 건 솔직히 편애나 다름없었다.
무리를 이끄는 자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편애다. 사람은 감정을 가진 생물이고, 그 감정에 따라 행동을 하는 동물이다.
혼자 도와준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결국 문수르, 본인은 인정해야 한다. 제이번을 편애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속여야 한다는 건데, 그게 곧 가식이다. 가식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더군다나 그렇게 될 경우 문수르 본인이 본인을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참았다.
제이번과 카롤이 위기에 빠졌을 때 기다렸다. 그 사실에 눈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런 문수르가 움직인 건 상대방의 기가스가 움직였을 때였다. 상대방의 기가스가 이동을 시작했을 때 대기하던 문수르가 드래곤 파이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상대방과의 거리를 좁혔다.
동시에 준비한 투창을 던졌다.
슈슈슈!
창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기가스의 머리통에 정확히 명중했다. 그리고 머리통을 박살까지 냈다.
한 번의 교전, 아니 교전이라고 할 수도 없다.
기습이라고 해야겠지.
어쨌거나 단 한 번의 전투로 상대편 기가스 1대를 무력화시켰다. 엄청난 성과다.
그러나 문수르는 거기서 곧바로 다음 기가스를 향해 움직였다.
‘전장을 정리한다.’
기가스만 해치우고 나면 남은 것들은 적수가 될 수 없다. 전쟁이 아닌 학살만 있을 뿐이다.
사실 1배 급 기가스 따위가 드래곤 파이터의 적수가 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지금 움직이는 기가스는 2대가 전부였다. 제이번과 카롤은 오러 나이트 둘을 죽였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은 제이번과 카롤을 잡기 위해 기가스에 타지 않은 상황.
그 기가스 중 1대가 박살이 났다.
남은 것 역시 1대다.
문수르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숨에 도약했고, 추락하며 그 힘을 이용해 기가스의 머리통을 단숨에 박살냈다.
콰과과!
기가스르의 단단한 투구를 부수고도 남은 힘은 파일럿이 탑승한 가슴부까지 박살을 냈다.
“컥!”
기가스 파일럿마저 한 번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으아아악!”
그제야 비명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괴물의 존재를 발견한 병사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엔 체가스 자작도 있었다.
6.
체가스 자작은 병사들의 외침이 들리는 순간 도망쳤다. 기가스 파일럿이 아닌 기사들과 함께 전장을 이탈했다.
그건 오판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지휘관이 지휘를 해야 한다. 하다못해 체가스 자작은 도망칠 때 도망치더라도 기사는 남겼어야 했다.
기가스를 타고는 병사들을 지휘할 수가 없다. 말이 통하지도 않을 뿐더러, 기가스에 탑승하게 되면 시야가 좁아진다. 그뿐인가? 기가스를 탔으면 가장 먼저 적에게 노출된다. 적이 기가스를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적이 기가스를 움직인다면 맞서 싸워야 한다. 전투 도중에 명령을 내리고, 전장을 지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까 기사를 남겨야 한다.
그러나 체가스 자작은 그러지 못했다. 기사도 암살할 정도의 실력자가 있는 상황에서 병사들의 호위 따위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체가스 자작의 행동 때문에 병력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제 아무리 병사들이 수백 명이 되도, 기가스 앞에서는 개미에 불과하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병사들의 비명 소리 따윈 체가스 자작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겁에 질린 체가스 자작은 도망칠 뿐이었다.
그는 대체 왜 자신이 여기에 왔는지, 그것조차 이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스스로 결정을 내렸음에도 그 결정의 이유를 말이다.
“헉, 헉…….”
그렇게 체가스 자작이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망칠 무렵.
푹!
어둠 속에서 날아온 무언가가 기사의 심장을 꿰뚫었다.
“누구냐!”
암습을 파악한 기사 중 한 명이 어둠을 향해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쉬익!
그러나 기사의 검은 애꿎은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푹!
그 어둠 속에서 다시금 검이 튀어나왔다.
“컥……!”
검은 너무나도 깔끔하게 기사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기사는 손끝조차도 움직이지 못한 채 입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기사의 몸이 미약한 경련을 보이더니, 이내 숨이 멎었다.
그런 기사의 심장을 뚫고 나온 검이, 그 검을 통해 나온 핏물이 체가스 자작의 전신을 적셨다.
체가스 자작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아랫도리에서는 오줌이 흘러나왔다. 지린내가 피어올랐다.
“하하……!”
이 순간 체가스 자작은 짧게 웃을 뿐이었다. 그런 체가스 자작의 미소가 갈라졌다.
검이 체가스 자작의 얼굴을 반으로 잘랐다. 미소가 반으로 잘려졌다. 잘려나간 머리통의 일부분이 바닥이 떨어졌다. 잘려나간 머리통에서는 기괴한 액체들이 흘러나왔다.
스륵!
이내 검에 묻을 피를 가볍게 닦는 암살자.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는 암살자는 체가스 자작의 시체를 보며 쯧, 짧게 혀를 찼다.
“목을 잘라오라고 했는데, 실수했군.”
암살자의 정체.
그는 다름 아니라 탈라트 부족의 오러 마스터, 가누스였다.
7.
기다리고 있던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기가스 2대가 대파했지만 아직 2대의 기가스가 남은 상황이었을 뿐더러, 제 아무리 오합지졸이 되어버린 병사들이라고 해도 그들은 무기를 들고 있는 군인들이었다.
섣불리 전투를 벌이면 승리는 할 수 있겠지만, 피해도 없진 않을 터.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어둠에 숨었다. 그리고 숨을 죽였다. 그들은 마치 먹잇감을 기다리는 뱀의 그것처럼 자신 근처로 병사들이, 기겁하여 도망치는 병사들이 접근하길 기다렸다.
이윽고 접근했을 때…….
“어억?”
“뭐, 뭐야?”
병사들은 미리 준비된 함정에 빠졌다. 대단한 함정은 아니었다. 그저 발목 정도가 푹, 빠지는 정도다.
하지만 밤이라서 제한된 시야에 무작정 달리던 탈주병들에게 그 함정은 너무나도 효과적이었다.
“어이쿠!”
철푸덕!
열에 아홉은 함정에 걸려 고꾸라졌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넘어진 병사들을 준비한 무기로 해치웠다.
푸욱!
“크헉!”
체가스 자작가의 병사들은 어떻게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순식간이었다.
체가스 자작가의 병사들 모두가 처리됐다.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순식간에 한 영지의 병력이 몰살한 것이다.
반면 이제르트 자작가의 피해는 없었다.
아니, 딱 한 명 있었다.
“제이번, 제이번!”
카롤이 제이번을 부축했다. 제이번의 상처는 아주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정도의 상처 역시 아니었다.
아니, 보통은 치명상이다.
팔에난 상처는 뼈까지 다치진 않았지만 봉합으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심했다. 힐링 마법의 도움이 아니면 팔을 못 쓰게 되거나 잘라내야 할 정도, 그렇게 해서라도 목숨을 구하면 다행인 수준이다.
등에 난 검상 역시 깊진 않았지만 길었다. 치료하기 쉬운 상처가 아니다. 잘못 관리하면 상처가 낫기는 커녕 곪아 터져 오히려 더 큰 병에 걸릴 상처였다.
무엇보다 출혈량이 문제였다.
출혈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격렬하게 싸웠다. 몸을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출혈량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리 만무하다.
이미 피를 많이 흘린 제이번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카롤이 제이번에게 소리쳤다.
“정신차려! 병신아, 정신 차리라고!”
전투를 끝낸 병사들 중 일부가 그 목소리를 듣고 다가왔다. 상황을 파악한 병사들은 제이번을 향해 기도를 한다거나, 혹은 같이 제이번이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응원을 한다거나, 그런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훈련 받고 동시에 교육 받은 이들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필요한 건 신을 찾는 것도 아니고, 신을 향해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진심을 담아 애절하게 응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치료가 필요해.”
“영지에 헤인 경이 있잖아?”
“영지까지 거리가 얼만데. 그때까지 못 버텨.”
치료, 그것도 뛰어난 치료가 필요하다.
만약 헤인 경이 있었다면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영지민들에게 헤인 경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신에 가까운 자였으니까. 문수르와 다른 의미로 신격화된 인물이었다.
“일단 응급조치를 해야지.”
“출혈을 막아야 해.”
“나한테 붕대가 있어.”
“지혈제 있는 사람?”
병사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응급조치를 하는 그들의 행동은 너무나도 숙련되어 있었다.
케르빈 월드의 사람이 아니라 어스 월드의 사람, 그것도 고도의 훈련을 받은 병사처럼 보였다.
문수르가 계획한 서바이벌 훈련에는 응급치료 방법에 대한 교육도 있었다. 그리고 당장 급할 때 사용 할만하 몇 까지 의료품도 지급됐다. 많이 지급할 순 없었다. 그러나 병사들 대여섯 명이 모두 의료품을 모으자 한 사람 살릴 정도는 모였다.
응급조치가 끝났다.
그러나 제이번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순간 카롤이 제이번을 등에 업었다.
“카롤, 영지까지 뛰어갈 생각이야?”
동료 병사가 기겁하며 물었다. 카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까지 거리가 멀다. 제 아무리 열심히 뛰어가도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여기서 멀뚱히 있는 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병사들 중 한 명이 카롤 앞을 막았다.
“멍청한 새끼.”
“비켜. 시간이 없다고.”
카롤은 자신의 앞을 막은 병사에게 말했다. 병사는 그런 카롤을 향해 소리쳤다.
병사는 그런 카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너보단 내가 발도 더 빠르고, 체력도 더 많으니까 제이번 그 새끼 내 등에 얹혀. 내가 갈 테니까.”
그리고 제 등을 보였다.
카롤은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감동할 상황은 아니었다.
“거기까지.”
그때였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이가 그들의 행동을 막았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기에 병사들은 굳어버렸다.
“병사 제이번을 내려놓으세요.”
문수르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