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4.
카롤은 당황했다.
‘제이번이!’
기사가 하나 더 있었다. 예상 외였다. 예상 외였지만, 그래도 카롤은 상황을 분석하고자 했다.
‘우연? 아니면 기다리고 있던 건가? 함정인가?’
기사의 등장.
과연 그건 우연일까, 아니면 기사가 이미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던 걸까?
전자라면 눈앞의 기사를 해치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후자라면 도망치는 것조차 확신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리고 지금 카롤은 결단을 해야 했다. 도망치던가 아니면 싸우던가! 어떻게 보면 기사를 해치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다름없었다.
카롤은 고민했다.
그 순간 먼저 움직인 건 다름 아니라 제이번이었다. 제이번은 의외로 냉정했다.
‘차갑게.’
절체절명의 순간.
온몸의 핏물이 온몸에서 빠져나갈 것 같은 상황.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가 등줄기를 파고 든 상황.
그 순간 제이번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문수르의 가르침이었다.
문수르는 말했다.
‘검을 들고 살아가는 이상 언젠가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 절체절명의 순간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생각을 해야 합니다. 본능보다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문수르의 그 가르침이 제이번의 머리를 차갑게 만들었다.
제이번은 이 순간 감각을 펼쳤다. 적을 보기보다는 주변을 봤다.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아무도 없다.’
오러를 다룰 수 있는 제이번의 감각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렇기에 제이번은 확신했다.
이 근처에는 아무도 없다. 눈앞의 기사 한 명이 전부다. 그렇다는 건?
‘해치운다.’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했다.
등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아주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당장 전투력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카롤이 있다.
2대1이다.
잘만 한다면, 이기지 못할 이유는 없다. 또한 이런 상황을 예상한 건 아니지만, 기사와 조우했을 때 어떻게 싸워야 할지는 이미 사전에 합의가 끝난 상황이다.
대화는 필요 없다.
눈빛 교환도 필요 없다.
제이번은 그냥 무작정 움직였다.
‘카롤, 믿는다!’
카롤이 자신의 행동을 보고, 자신의 의중을 파악해주리라 믿었다. 지금 이 순간 카롤을 믿지 않으면 제이번이 믿을 수 있는 인간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제이번이 검을 휘둘렀다.
카앙!
기사는 가볍게 제이번의 검을 튕겨냈다. 그 순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카롤이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파앙!
이제르트 자작가가 만든 특수한 활이, 그 질긴 오크들의 가죽도 종이마냥 뚫는 활이 화살을 토해냈다.
화살은 제이번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기사를 향해 날아갔다.
‘흡!’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화살에 기사는 놀랐다. 그가 이제까지 상대했던 화살과는 그 수준이 날랐다.
쉬익!
그러나 이번 기사 역시 오러 나이트였다. 기사는 화살이 제 몸에 닿기 전에 검을 휘둘렀고.
팟!
단숨에 화살을 쳐냈다. 그 틈을 노리고 제이번이 들어왔다. 제이번이 검을 앞세운 채 몸을 날렸다.
죽기 아니면 살기!
사생결단의 각오가 담긴 찌르기였다. 기사는 직감했다. 어설프게 막으면 오히려 당한다는 사실을.
기사 역시 전력을 다해 제이번의 공격에 응수했다.
그 무렵 두 번째 화살을 장전한 카롤이 활시위를 놓았다.
쉬익!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제이번의 공격을 막기 위해 그 쪽에 전력을 다 쓴 기사 입장에서는 날아오는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기사는 피하지 않았다.
카앙!
일단 제이번의 공격을 막은 후에,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푹!
그러자 화살이 기사의 팔을 깊게 스치고 지나갔다. 살점을 뚫고 지나갔다.
명중한 걸까?
명중은 맞다.
‘젠장.’
그러나 카롤은 오히려 혀를 찼다. 자신이 노린 건 뼈였다. 혹은 더 치명적인 부위였다.
하지만 기사는 그 찰나의 순간, 가장 피해가 적은 부위로 화살을 막아낸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피해를 줄이는 것!
전투의 기본이고, 기초며, 진리다. 기사는 그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자였다.
덕분에 화살에 맞았으나, 기사는 팔을 움직이는 것도, 출혈량도 당장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후 공격은 기사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쉬익, 쉬익!
기사의 검이 빗줄기마냥 쏟아지기 시작했다. 제이번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기사의 진심이 담긴 공격은 단순히 위력의 유무를 떠나서, 상대방의 눈을 현혹시킨다.
검술(劍術)이란 그런 놈이다.
단순히 검을 강하게 쓰는 걸 검술이라고 하지 않는다. 검술이란 검으로 온갖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경지에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상대를 혼란스럽게, 어지럽게, 미치게 만들 수도 있다.
검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 기사의 검이 그랬다.
빠득!
제이번은 이를 물었다.
‘두 번! 그 이상은 버티지 못해.’
훈련을 받았다. 제대로 된 기사의 검술을 상대하는 훈련을 말이다. 하지만 그 훈련의 결과는 언제나 좋지 못했다. 검을 나누기 시작하면, 열 번을 넘기지 못했다.
그 후에는 훈련이 없었다.
기가스 파일럿이 되기 위한 훈련을 했을 뿐.
제이번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진짜 검술을 상대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오히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오러를 느끼지 못한 기사만도 못하다.
결국 오래 못 버틴다.
그렇다면 빨리 끝내는 게 탑일 터.
제이번은 각오했다.
‘뼈를 주고.’
이런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더 많은 이익을 취하는 건 도둑놈 심보다.
‘뼈를 취한다.’
뼈를 주고 뼈를 취하는 것! 지금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제이번이 방어를 포기했다. 허점을 드러냈다.
‘이 새끼까?’
기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기사는 노골적으로 드러난 제이번의 허점에 오히려 당황했다.
함정으로 보였다.
더군다나 기사가 보기에 상대는 오러 나이트였다. 때문에 기사는 은연중에 상대방을 자신과 같은 기사로 생각했다.
‘날 유혹하는군!’
그것이 기사의 오판을 불러왔다. 기사는 제이번의 허점이 함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허점을 무시했다.
대신에 보이는 것, 당장 위협적인 것.
제이번의 공격을 막는데 집중을 다했다.
반대로 그건 제이번에게도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했다. 차라리 허점을 노리고 들어왔다면 같이 동사(同死)라도 할 수 있었을 터. 그러나 상대방이 허점을 노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니, 의미없는 공방이 이루어졌다.
서로가 검을 휘두르고.
카앙, 카앙!
서로의 검이 부딪칠 뿐이었다.
서로의 피륙은 멀쩡했다.
팟, 팟!
그러는 와중에 카롤은 계속해서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어떻게든 틈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수세(守勢)로 전향한 기사의 가드는 활 따위로 뚫을 만한 것이 못 됐다.
이 순간 제이번과 카롤은 동시에 생각했다.
‘끝이다.’
기사가 이렇게 나온다면, 지금 당장 그 둘이 기사를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사전에 합의도 했었다. 기사가 아주 방어적인 자세로 나올 경우에는 전투를 피하고 도망치자고.
‘튄다.’
제이번과 카롤은 곧바로 도주를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 그 둘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내가 시간을 끈다!’
우습게도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오히려 서로의 발목을 붙잡는 결과가 됐다.
제이번은 카롤이 도망치기 전까지 기사를 붙잡으려고 했다.
반대로 카롤은 어떻게든 자신이 계속 견제를 해야지 제이번이 도망칠 틈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 둘이 서로의 마음을 파악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서로가 마음을 파악한 후에는 서로 눈빛을 잠깐 교환했다. 카롤이 계속 견제하고 제이번이 몸을 빼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의 망설임이. 서로를 향하던 배려심이.
“여기다!”
“여기 기사님이 있다!”
"암살자도 같이 있다!"
결국 그 둘을 나락에 가두었다.
어느새 병사들이 다가와 큰 원을 그리듯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쿵!
동시에 어디선가는 육중한 기가스의 동체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이번과 카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도망치는 건 이제 불가능하군.’
‘쳇.’
포위망이 생겼다. 뚫고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여기에 기가스가까지 움직였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승산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제이번과 카롤은 승산을 점치는 방법, 전투의 정보를 습득해 처리하는 방법도 배웠다.
때문에 자신들의 운명을 알게 된 그 둘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영광스럽게 죽겠군.’
‘후회는 있다. 그러나 많진 않다.’
그래도 기사 둘을 잡았다. 큰 소득이다. 고작 병사 나부랭이에 불과했던 제이번과 카롤, 그 둘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쉽지 않는 기사들을 처치한 것이다.
기사들 입장에서는 땅을 치고 탄식할 일.
반대로 병사들 입장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이고, 명예다.
더군다나 제이번과 카롤은 알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가 죽어도, 우리 가족은 이제르트 자작가가 보호해준다.’
‘이제르트 자작님은 절대 우리를 잊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들의 죽음을 위로해주실 것이다.’
사람은 죽은 뒤에 그 가치가 정해진다고 한다. 죽은 사람을 위로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람의 가치가 높아진다고 하다.
그런 의미에서 제이번과 카롤의 죽음은 나름 가치가 높을 것이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대부분의 이들이 그 둘의 죽음을 기억하고, 위로해줄 것이니까.
더불어 자신들의 목숨 외에 따로 걱정할 게 없었다. 특히 가족들에 대한 걱정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풍족하게 살 것이다. 단순한 기대가 아니다.
눈으로 봤다.
이제르트 자작 그리고 문수르. 그들은 영지를 위해 죽은 병사들에게 그 누구보다 후한 대접을 해줬다. 영지를 위해 희생한 병사들의 가족들에겐 엄청난 혜택이 주어졌다.
‘그렇다면…….’
‘눈앞의 놈은 죽인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쉽게 죽음을 각오한 제이번과 카롤은 동시에 다른 각오를 내렸다.
죽는다!
대신에 세 번째 기사도 같이 사지로 데려갈 것이다!
제이번과 카롤이 목숨을 도외시한 채 기사에게 덤벼들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덤비는 이들의 기세는 무시무시한 법이다. 기사 역시 제이번과 카롤의 기세에 놀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사가 쉽게 당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기세가 기사에게 경각심을 줬다. 병사들의 기가스의 지원에 긴장을 풀었던 기사가 오히려 더 긴장했다.
채앵, 채앵!
그런 기사에게서 허점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제이번과 카롤은 속이 탔다.
쿠웅!
그 순간 지진이 난 듯, 땅이 울렸다. 머리 위로 떠올랐던 달이 사라지고, 어둠이 몰려왔다.
제이번과 카롤은 긴박한 상황 속임에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머리 위에 기가스가, 그 무시무시한 거신 병기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죽는구나.’
기가스의 발에 밟히기만 해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터.
이윽고 기가스가 일말의 망설임이나, 동정심도 없이 두 습격자를 처치하려고 했다.
그 순간……!
콰앙!
거대한 무언가가 기가스를 단숨에 박살을 냈다.
기가스의 머리가 박살이 났다. 기가스의 동력원이 있는 탓에 그 어느 곳보다 단단한 기가스의 헬멧이 산산조각 난 것이다.
동력원을 잃은 기가스는 무너졌다.
그리고 무너진 기가스 대신에 새로운 기가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 기가스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거대한 기가스!
드래곤 파이터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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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이겼으나, 진출은 못했네요.
적적한 3월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