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4.
제이번은 영지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준비할 것이 많지도 않았다.
또한 인사도 하지 않았다.
포비어에게 계획을 설명했고,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카롤과 함께 영지를 떠났다.
그렇게 작은 소란 하나가 끝이 났다.
하지만 그 파문은 결코 작지 않았다.
병사들의 분위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긍정적인 방향인지 아니면 부정적인 방향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무언가 심적인 동요가 생겼다는 것.
포비어는 이 부분을 살짝 우려했다.
‘병사들의 마음이 뒤숭숭해서 좋을 건 없지.’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온 결과를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포비어에게 문수르가 한 가지 계획을 들고 찾아왔다. 문수르는 잘 정리된 계획서를 포비어에게 건네며 말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문수르가 건넨 계획서.
그건 다름 아니라 오러 나이트 양성 프로젝트였다.
포비어는 기겁했다.
“문수르 경, 이게 대체…….”
“오러 나이트가 많아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아니, 하지만…… 그 귀한 마나 호흡법을 이렇게 무분별하게 가르쳐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문수르의 계획서에는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있었지만 그중 결정적인 건 다름 아니라 마나 호흡법의 보급이었다.
물론 그냥 보급한다는 건 아니었다.
조건을 충족하는 이들에게 선별적으로 보급한다는 내용이 있긴 했다.
그러나 마나 호흡법의 귀중함을 알고 있는 포비어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엄청난 일이었다.
분명 사전에 뽑힌 이들도 마나 호흡법을 배우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누구보다 영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희생심과 이제르트 자작을 향한 충성심을 보여준 자들이다. 마나 호흡법을 가르쳐줘도 영지에 득이 되면 득이 됐지, 해가 될 만한 행동을 할 자들은 아니었다.
물론 제이번만 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부분 때문에 제이번에 대한 처우를 놓고 포비어와 문수르가 의견대립을 했던 것 아닌가?
“별 문제 없습니다.”
그러나 문수르는 개의치 않았다.
“탈영병인 제이번도 영지의 충성스런 오러 나이트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다른 병사들이 제이번보다 못할 리 없지요.”
“그건…….”
문수르의 그말에 포비어는 잠시 동안 반문하지 못했다.
틀린 것 같다.
그러나 도무지 문수르 말에 반박할 만한 근거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탈영까지 시도했던 제이번이지만, 지금 포비어는 분명 믿고 있다. 제이번은 어떻게든 체가스 자작가의 기사들을 해치울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이번 전쟁이 끝나게 되면 제이번은 그 누구보다 충성심이 뛰어난 병사가 되겠지.
그렇다는 건 다른 병사들도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설마…….’
문수르가 계획했던 일이 바로 이것일까?
모르겠다.
포비어는 문수르가 어디까지 생각하고 어디까지 예상했는지 예측하는 걸 그만뒀다.
“알겠습니다. 이 계획은 제가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5.
체가스 자작가는 기가스 전력을 이끌고 이제르트 자작령을 향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체가스 자작가가 보유한 기가스는 4대였다. 모두 1배 급 기가스다. 더불어 체가스 자작 휘하의 오러 나이트, 즉 기가스 파일럿은 5명이었다. 이 외에 추가로 4명의 기사들이 있었다. 9명의 기사, 즉 1개 기사단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휘하의 사병 숫자는 200명 수준. 그러나 제대로 훈련을 받은 사병의 숫자는 100명을 간신히 넘긴다. 나머지는 오합지졸, 영지민 중 힘이나 쓸 줄 아는 장정들을 강제로 뽑아 채워 넣은 숫자다.
사실 자작가 기준으로 200명의 사병 숫자는 굉장히 적은 숫자다. 보통 자작가라고 하면 300명 정도의 사병을 보유하기 마련이다. 보통 일정 숫자 이상의 사병을 보유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왕이 부담감을 느끼게 되니까. 그렇기에 영주들은 자신들에게 허용된 숫자 만큼의 병사는 유지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체가스 자작의 사병 수가 적은 이유는 뻔하다.
기가스를 보유하기 위해 억지로 머릿수를 채운 것이다.
여기에 체가스 자작 휘하의 오러 나이트는 그 숫자가 무려 다섯 명이나 됐다.
4명은 기가스 파일럿이고, 한 명은 유사시에 기가스를 다룰 예비 파일럿이다.
이것이 체가스 자작이 가장 부담스러운 부분이었다.
보통 오러 나이트를 기사라고 부르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선 오러 나이트는 거의 남작 급 대우를 받을 정도다. 체가스 자작 입장에서 5명이나 되는 오러 나이트를 다룬다는 건 금전적으로도 버겁지만, 자신의 권력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버겁다.
“아니, 부이 경은 대체 어디 간 건가?”
“잠시 볼일 좀 보고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저렇게 기가스를 멀뚱히 세워두면 되는가? 하다못해 내게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죄, 죄송합니다.”
“이런, 쯧쯧!”
체가스 자작은 휴식을 끝내고 다시 이제르트 자작령을 향해 움직이려고 했을 때 가만히 있는 기가스 한 대를 보고 혀를 찼다.
기가스 파일럿인 부이 경이 자리를 비운 탓에 기가스가 그대로 멈춰있는 것이다.
기가스 파일럿과 기가스는 한 몸이다. 군율이 엄격한 영지의 경우에는 용변도 기가스 근처에서 봐야 할 때가 있다. 기가스가 발진한 순간부터 기가스 파일럿과 기가스는 결코 떨어져서는 안 되니까. 그리고 그게 당연한 진리다.
하지만 체가스 자작가 내에서는 이미 기강이 해이해질 정도로 해이해진 것이다.
오러 나이트인 기사들 입장에서 체가스 자작은 모셔야 할 군주라기보다는 그냥 고용주에 불과하다. 봉급과 소작권을 주지 않으면 당장 체가스 자작 곁을 떠날 이들이다.
하물며 체가스 자작의 곁을 떠난다고 해도 그들 입장에서는 아쉬울 게 하나도 없다.
콩탄 왕국은 물론 대륙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기가스 파일럿에 대한 수요는 언제나 넘쳐나니까.
이러니 휘하의 기사들이 제멋대로 행동해도 체가스 자작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빌어먹을!’
처음에는 기세 좋게 영지를 박차고 나왔는데, 갈수록 쌓이는 건 스트레스뿐이다.
더군다나 이번 원정으로 인해 적지 않은 돈이 소모됐다.
병력을 움직이는 것 자체만으로도 적지 않은 돈이 깨질 뿐더러, 체가스 자작은 기가스 파일럿들을 움직이도록 만들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뿌린 상황이었다.
만약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다면, 체가스 자작의 올 겨울은 혹독하다 못해 참혹할 것이다.
‘어떻게든…….’
이제르트 자작가를 무너뜨린 후에는 빅토리안 공작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그게 아니면 이제르트 자작가에 금은보화가 있던가!
“빨리 움직여라!”
이런 이유로 체가스 자작은 다급했다. 속이 쓰리다 못해 새카맣게 탈 지경이었다.
그러나 기가스 파일럿들은 그런 체가스 자작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들을 처치하기 위한 무리가 그들 근처에 도착했다.
6.
문수르가 가르쳐준 온갖 전술 중에 케르빈 월드에서 가장 신기하다고 여길 만한 것은 다름 아니라 생존 기술이었을 것이다.
케르빈 월드에서 생존 기술이란 개념은 두루뭉술하다 못해 오히려 없는 게 나을 지경이다.
막말로 말도 안 되는 민간요법을 당연한 치료법이라 생각하며 의심 없이 행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병에 걸리면 단식을 해서 신께 기도하는 것만이 유리한 치료법이라 생각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들을 모아 만들어낸 어스 월드의 생존 기술은 신기하다 못해 경이로운 것이었다.
재미난 점은 이 생존 기술을 역으로 이용하면 훌륭한 살인 기술이 될 수 있다.
생존에 방해가 되는 행위를 하면 된다.
생존 기술에서 가장 먼저 가르쳐주는 건 다름 아니라 물의 소중함이다.
케르빈 월드에서 물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어스 월드보다 훨씬 물이 귀하고, 필요한 세계니까.
그러나 물이 왜 소중한지 그리고 그 소중한 물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많지 않다.
문수르는 그것을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에게 가르쳤다.
사실 이 훈련을 제이번은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그냥저냥 남들 하는 만큼 훈련에 임했을 뿐이다. 솔직히 문수르가 가르쳐준 내용 중 상당수를 잊어버렸다.
“카롤, 부탁한다.”
“친구를 믿으라니까. 친구를 못 믿으면 누구를 믿을래?”
그러나 카롤은 달랐다.
그 누구보다 훈련에 열정을 보이는 그는 잊어버리면 기사들을 찾아가서라도 몸에 익을 때까지 배웠다.
“좋아.”
일단 제이번과 카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체가스 자작가의 동선을 살펴보고, 다음 동선을 예측하는 일이었다.
그 후에 카롤은 식수를 보급할 포인트를 체크했다.
“이곳, 이곳. 적당히 망쳐두자고.”
그리고 그 식수 보급 장소에 수작을 부렸다.
모든 장소에 똑같은 방법으로 수작을 부린 건 아니었다. 한 곳은 그냥 그대로 놔두었다.
다른 한 곳은 오물 따위를 넣었다.
그리고 한 곳은 준비해두었던 독을 풀었다.
사실 독을 식수에 푼다는 건 큰 효과를 보기 힘들다. 일단 독이란 건 대량으로 소유하기가 힘들다. 또한 치사량이 높은 독이라고 해도 식수 따위에 풀게 되면 독효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카롤과 제이번이 사용한 독 역시 생명에 위협을 줄 정도로 강력한 독은 아니었다.
적당히 탈이 날 정도.
하루 정도 신나게 설사를 할 수 있게 되는 수준의 독.
그마저도 독이 강하거나, 오러 나이트와 같이 면역력이 일반인보다 강력한 이에게는 통하지 않는 독.
어차피 큰 효과를 보려고 한 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카롤과 제이번이 해야 하는 일은 암살 따위가 아니니까. 어떻게든 틈을 만드는 것, 그게 최우선 과제였다.
그리고 그런 카롤과 제이번의 수작은 제대로 통했다.
처음 식수 보급 장소에서 체가스 자작가의 병력은 물을 충분히 채워 넣었다. 아무런 수작도 부리지 않은 곳이었기에 문제될 건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 식수 보급 장소에는 오물이 가득했다. 여기서 적지 않은 병사들이 식수를 보급하지 않았다. 아직 식수가 충분했으니까. 또한 다음 식수 보급 장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오물로 가득한 식수를 마시려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세 번째 식수 포인트에 도달했을 때, 체가스 자작가의 병사들은 다시 식수를 보급했다.
자연스럽게 그날 밤 병사들 일부가 설사를 시작했다.
“식수에 문제가 있었는지 병사들 중 일부가 복통을 호소하고 설사가 심합니다.”
기사가 그 사실을 체가스 자작에게 전달했다.
심기가 좋지 못한 체가스 자작에게 기사의 그 말은 그저 짜증을 북돋는 요인에 불과했다.
“그래서? 죽은 놈이라도 생겼나?”
“그건 아닙니다.”
“그럼 그냥 이동한다.”
가뜩이나 기가스 파일럿들이 어영부영 게으름을 피우는 바람에 이동이 늦어지던 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설사나 하는 병사들을 일일이 신경 쓸 만큼 체가스 자작은 배려심이 많은 영주가 아니었다.
다시 병력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병력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설사를 심하게 한 자들이 뒤쳐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억지로 행군을 계속했다. 몸 상황이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
몇몇이 후방에 낙오됐다.
그리고 낙오된 이들 중 일부가 사라졌다.
기사들은 당연히 사라진 병사들이 탈영을 했다고 생각했다.
기사들은 군기를 잡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탈영을 시도하려는 자, 무조건 목을 칠 것이다.”
기사들이 검을 든 채 병사들을 향해 살벌한 소리를 지껄였다. 말이 군기 잡기지, 그건 명백한 협박이었다.
병사들은 입을 콱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행군이 시작됐을 때 밤중에 몇 명이 다시 실종됐다.
정확히 말하면 카롤과 제이번이 병사들을 도중에 납치했다. 납치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설사병이 심한 이들 중 일부는 터질 것 같은 배를 부여잡고 볼일을 보러 숲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감시병이 있다고 해도 그 감시병 역시 기사가 아닌 같은 병사들이다. 사정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배를 부여잡은 동료 병사가 변을 누러 가는 걸 막을 병사는 없다.
그러면 그때를 노리고 그 병사를 해치우는 것이다.
분명한 납치였지만, 기사들 입장에서는 탈영이었다.
더불어 이 탈영으로 인해 벌을 받는 건 탈영병이 아니라, 보초를 섰던 병사였다.
기사들의 검에는 자비가 없었다.
여기서 어설프게 병사들을 풀어줬단 오히려 사기와 군기, 두 가지가 바닥을 칠 것이라 생각했다.
보초를 잘 서지 못했던 죄를 이유로 보초를 선 병사들의 목을 베었다.
3명의 병사가 처형당했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감 그리고 불만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카롤과 제이번 입장에서는 밑 준비가 끝난 셈이다.
그 둘은 곧바로 다음 계획으로 넘어갔다.
============================ 작품 후기 ============================
여러모로 새로운 달이 시작됐네요.
// 자꾸 오타가 나네요. 죄송합니다 ㅜㅜ 체가스 자작가의 전력은 오러 나이트 5명, 일반 기사 4명, 기사 9명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