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158화 (156/293)

158화

3.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10개 조로 나뉘어 교대로 움직인다.

일부는 경비를 서고, 일부는 잡일을 하고, 일부는 훈련을 하고, 일부는 휴식을 취하는 식으로 로테이션을 돌리는 거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워낙 이제르트 자작가의 사정이 좋지 못한 탓에 전투 후에 쓰러지듯 휴식을 취하고, 다시 몬스터가 오면 전투에 나가는 것이 반복됐다.

경험과 근성은 쌓일지 몰라도 수명은 줄어드는 환경이었다.

여하튼 이제 이제르트 자작가는 최소한 몬스터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전력은 충분히 마련된 상황이었다.

이미 전선에 배치된 아이언히트는 어설픈 몬스터들은 감히 이제르트 자작령의 성벽을 향해 오줌도 누지 못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새롭게 건축된 성벽은 기존의 성벽과는 그 높이나, 두께, 방어력에서 차원이 달랐다.

덕분에 병사들은 대부분 로테이션에 따라 움직였고, 이 과정에서 병사들 끼리 얼굴을 보는 게 힘든 경우도 생겼다.

그런데 그런 병사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같은 영지, 같은 이제르트 자작가 소속이지만 간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울 법도 하다.

그러나 그 어떤 병사도 간만에 본 반가운 동료를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네거나,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병사들은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 배움을 통해 병사들의 시선이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병사들도 금방 눈치를 챈다.

자신들이 전부 모인다는 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 어떤 큰 일이 있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꿀꺽!

때문에 모인 병사들 사이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그 병사들 앞에 포비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들어라.”

포비어의 외침에 병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문수르는 병사들의 전체적인 능력 향상에 초점을 뒀다.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너그럽다 못해 너무 해이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 때문에 어느 순간 풀어질지도 모르는 병사들의 기강을 강하게 잡은 건 다름 아니라 포비어였다.

포비어의 손속에는 정이 없었다.

기강을 해치는 행위, 이제르트 자작가의 규칙에 반발하는 행위, 가차없이 목을 치거나, 병신을 만들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포비어는 작은 허점만 보이면 무조건 그걸 물고 늘어졌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포비어의 눈길조차 피하라는 말이 당연시 될 정도였다.

그런 포비어가 모든 병사들을 모아두고 그 앞에 섰다.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응?”

“저건…….”

그 순간 누군가가 슬그머니 포비어를 따라 등장하기 시작했다.

“제이번인가?”

“용케 아직까지 살아있었군.”

등장한 이는 다름 아니라 제이번이었다.

병사들 중에 제이번을 모르는 자는 없다. 탈영을 시도하다가 잡힌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니까.

최근 소문도 돌았다.

제이번이 오러 나이트가 됐다는 소식 말이다.

다른 병사들이 오러 나이트가 됐다는 사실에 병사들은 존경심과 부러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제이번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왜 하필 저 녀석이?’

‘왜 저런 녀석에게 그런 기회가 온 거지?’

제이번은 기회를 받아서는 안 되는 자다. 이제르트 자작가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했던 자 아닌가?

납득할 수가 없다.

아직도 제이번이 같은 동료라는 것조차도 용납할 수 없다.

제이번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을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에 제이번은 고개를 숙였다.

‘빌어먹을.’

탈영을 하려고 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지울 수 없는 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때는 절박했다.

살고 싶었으니까.

생존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제이번이라고 좋아서 탈영을 하겠는가? 당장 죽을 것 같으니까,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거지.

물론 자신의 실수에 변명을 지껄이는 건 아니다.

‘한 번만.’

단지 원할 뿐이다.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들…… 한때는 같이 목숨을 걸고 사지를 누볐던 전우들이다.

그 누구보다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자신의 명줄이 걸린 등을 맡기면서 지내왔던 자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눈초리가 더 따가웠다. 그들의 눈빛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렀다.

이렇게 보니 후회가 밀려온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참혹함이 온몸을 두드린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제이번의 사정일뿐, 그런 제이번을 곱게 보는 이는 없었다.

이윽고 포비어가 입을 열었다.

“문수르 경이 말씀하셨다.”

문수르의 이름이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제이번을 향했던 병사들의 모든 시선이 다시금 포비어를 향했다.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신 같은 존재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키던 자다. 그런 그의 말은 절대적이다.

“병사 제이번에게 기회를 주자고 하셨다.”

그러나 절대적인 말이라고 해도 그냥 받아들이는 것과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제 아무리 문수르가 한 말이라고 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말도 있는 법이다.

그건 비단 병사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포비어도 마찬가지였다.

“문수르 경이 하시는 모든 일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분을 부정하고, 거역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본인은 납득할 수가 없다.”

꿀꺽!

포비어 옆에 죄인마냥 서있던 제이번이 침을 삼켰다.

병사들 중 일부는 포비어의 말에 격하게 동의하는 듯,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병사 제이번, 네게 묻겠다. 너는 네 스스로가 기회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윽고 포비어의 소름 끼치는 눈빛이 제이번을 향했다.

포비어도 오러 나이트고, 제이번도 오러 나이트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까놓고 제이번은 결국 속성법으로 오러 나이트란 겉치레만 입은 자다.

반면 포비어는 온갖 고난과 역경을 뚫고 자력으로 오러 나이트의 경지에 올랐다.

재능의 차이, 경험의 차이 그리고 노력의 차이.

그 무엇 하나 제이번이 포비어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러나 기가 죽을 수밖에 .

오히려 포비어의 어마어마한 살기를 맞이하기도 정신을 잃지 않은 게 대단할 따름이다.

“저는…….”

말이 떨렸다.

그러나 제이번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어수룩하게 행동하는 건 그나마 남은 기회마저 잃는 것이라고.

그런 멍청한 짓을 다시 할 순 없었다. 멍청한 짓은 탈영 하나면 충분하다.

“기회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제이번의 말은 작았지만, 병사들은 중 몇몇은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포비어는 제이번을 노려봤다.

“어째서 네게 기회를 줘야하지?”

포비어의 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겨울의 칼바람보다 더 차갑고, 매서웠고, 혹독하고, 날카로웠다.

제이번은 꿀꺽, 침을 삼켰다.

“보여드리겠습니다.”

“무엇을?”

“기회를 주시면 그것이 결코 실수가 아니었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누구보다 전장에 앞장서서 싸우겠습니다. 그 누구보다 마지막까지 전장에서 싸우겠습니다.”

모르겠다.

제이번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본인도 몰랐다.

그저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뱉을 뿐이었다.

“좋아.”

그 순간 포비어의 입에서 좋다는 말이 나왔다. 좌중이 놀랐다. 그 누구보다 제이번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생각됐던 포비어가 지금 제이번을 용서한다는 말인가?

츠릉!

그런 포비어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청명하면서도 섬뜩한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푹!

포비어는 그 검을 제이번 앞에 꽂았다. 그리고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이번이 기회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 이 검으로 제이번을 심판해라.”

병사들이 이를 물었다.

지금 포비어는 말하고 있다. 제이번에게 기회가 가는 것이 싫은 자는 제이번을 해치우라고.

제이번을 증오하는 자, 그를 싫어하는 자, 누구든 좋다.

기회를 준다는 사실이 싫거나, 그게 아니라 그냥 제이번이 싫으면 검을 휘두르면 된다.

목숨을 빼앗을 필요도 없다.

팔을 또는 손가락은 혹은 발목을.

그저 병신으로 지낼 정도의 상처만 입혀도 된다. 마음 내키면 머리통을 부셔도 된다.

제이번은 그 순간 무릎을 꿇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어차피 죽었어야 하는 목숨, 내 진심에 걸어보자.’

목숨을 걸고 진심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제이번 자신의 진심을 보지 못할 것이다.

혹여 누군가 제이번을 해친다면, 그건 순리다. 제이번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달게 받는 것이다.

한편 병사들은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살인이 무서운 건 아니었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콩탄 왕국에서 가장 많은 전장을 경험한 자들이다.

그 대상이 인간이던, 몬스터던, 무언가를 죽인다는 행위에 대해서는 이제 무덤덤한 수준이다.

죽일 필요가 있는 자는 죽인다.

문제는 그거다.

‘젠장, 제이번 놈이 때려죽일 놈은 맞지.’

‘저런 놈에게 기회를 주는 건 불공평한 일이야.’

‘하지만 정말 죽이는 게 맞는 걸까?’

정말 제이번이 죽을 만큼 나쁜 짓을 했는가? 이제르트 자작가의 법에 따르면 죽을 죄를 지은 건 맞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봤을 때, 특히 병사들 입장에서 탈영이란 건 용서할 수는 없어도 조금이나 이해할 순 있다.

전쟁의 나날들 속에서 하루라도 속 편하게, 전쟁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지경이다.

“젠장!”

그때였다.

병사들 중 한 명이 다른 병사들을 해치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병사 밀턴입니다!”

병사 밀턴은 일단 포비어 앞에 허리를 숙이며, 예의를 갖췄다.

“고개를 들어라.”

포비어가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비어 경께 말합니다. 저는 제이번, 이놈이 지은 죄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포비어가 슬그머니 땅 위에 꽂아 놓은 검을 바라봤다. 병사도 그 검을 바라봤다.

포비어는 눈빛으로 말했다.

마음에 안 들면 검을 들어라.

그리고 무릎 꿇은 제이번을 마음대로 해라.

밀턴은 그런 제이번 앞에 섰다. 제이번과 밀턴, 그 둘은 검 한 자루를 놓고 마주 섰다.

그때 일이 터졌다.

퍽!

밀턴이 발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제이번의 머리통을 올려 차버린 것이다.

“컥!”

제이번이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발라당 넘어갔다.

“일어나!”

밀턴은 그런 제이번의 멱살을 잡고 들었다. 밀턴의 힘은 대단했다. 장정 한 명을 마치 인형마냥 들어 올릴 정도였으니까.

퍽!

밀턴은 그 어마어마한 힘을 실은 주먹으로 제이번의 얼굴을 강하게 후려쳤다.

제이번이 다시금 날아갔다.

“저놈은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포비어 경을 비롯하여 모든 기사들과 영주님께 동료를 소중히 하고, 전우를 아끼며, 사랑하라고 배웠습니다.”

포비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애와 전우애.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다른 영지의 병사들이나 기사들보다 가장 뛰어난 건 바로 동료애와 전우애였다.

척박한 땅, 혹독한 땅, 처절한 땅, 테블스 산을 앞에 두고 살아오면서 쌓아온 동려애와 전우애는 너무나도 짙었다.

“그렇기에 차마 저놈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피똥을 쌀 때까지 때릴 순 있어도 차마 죽일 수가 없습니다.”

밀턴의 그 말.

그건 모든 병사들의 마음이기도 했다.

제이번이 죄를 지었다는 것도 안다. 용서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죽어 마땅한 죄라는 것도 안다.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자신들 손으로 동료였던 자를 죽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못하겠다.

다른 건 다 하겠어도 그것만큼은 못하겠다.

“제이번.”

포비어가 쓰러진 제이번을 불렀다. 제이번은 정신이 오락가락했지만, 포비어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넌 죽을죄를 지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군가 너를 죽였다면 그건 살인이 아니라 단죄(斷罪)다. 그러나 병사들 중 그 누구도 네 목을 치지 않았다. 무슨 의미인 것 같나?”

“그게…….”

“병사들은 아직까지 널 전우이며, 동료라고 여기고 있다. 넌 그런 전우들을 버리고 제 혼자 살기 위해 도망친 것이다. 아직까지 너를 믿고 있는 이들을 사지(死地)에 남긴 채로 네 보잘 것 없는 영광을 위해 도망친 것이다.”

그 순간 제이번이 눈물을 흘렸다.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포비어는 그런 제이번을 보고 감동하지 않았다.

“병사 제이번, 지금 눈물이나 질질 짤 때인가? 지금 네가 해야 하는 일이 그저 말없이 계집애마냥 우는 것인가?”

눈물 따위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핏물뿐이다.

“지금 이곳으로 체가스 자작가의 병력이 오고 있다. 그렇다면 제이번, 네가 동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여기서 눈물 따위를 흘리는 것이 전부라 생각되나?”

그 말에 제이번은 울음을 그쳤다.

그래, 눈물이 중요한 게 아니다.

“병사 제이번, 목숨 걸고 체가스 자작가의 기사들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체가스 자작가의 기사들을 죽이는 것.

그것이 자신을 동료로 봐주는 이들을 위해 제이번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야구 졌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