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156화 (154/293)

156화

8.

체가스 자작의 병력 이동이 포착됐다.

문수르는 GPS시스템을 통해 뻔히 보이는 그 움직임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원하던 방향이다.

이제까지 문수르가 했던 모든 수작과 공략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 광경이 눈앞에 훤하게 보이고 있다.

당연히 절로 미소가 지어질 법도 한 상황.

그러나 문수르는 미소를 짓지 못했다. 지을 수가 없었다.

‘결국 전쟁이지.’

모든 일은 전쟁으로 종지부를 맺을 것이다.

안다.

너무나도 날 잘고 았고 굳이 그 사실을 피하려고 할 생각도 없었다. 애초에 전쟁으로 끝내기 위해 이제까지 수작을 부리며, 이런 계획을 준비했던 것 아닌가?

일부러 체가스 자작의 신경을 박박 긁었고, 계속되는 정보유린을 통해 체가스 자작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 전쟁은 전쟁이다.

사람이 죽는다. 이 사실에 미소를 짓는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인간실격이나 다름없다.

문수르는 최소한 그 정도 도리는 지키고 싶었다.

세상을 위해서? 세상이 요구하는 도덕심 때문에? 세상이 말하는 도리라는 것 때문에?

아니다.

스스로를 위해서다.

문수르 스스로가 만족하기 위해서, 그 스스로를 위해서 그런 각오를 품고 싶었다.

“좋아.”

푸념과 한탄은 거기까지였다. 전쟁으로 인해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하고, 탄식을 내뱉는 건 짧게 끝내야 한다. 길게 한다고 해서 무언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번 기회에 제이번, 그를 이용해봐야겠군.”

더불어 이번 전쟁을 위해 준비해둔 게 있다.

제이번.

문수르의 혹독한 훈련을 버텨낸 그는 이제 훌륭한 기가스 파일럿이 됐다.

그러나 문수르는 제이번에게 기가스 파일럿의 자격을 주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단 한 대의 기가스도 배정해주지 않았다. 다른 기사들과 문수르를 잘 따랐던 베드릭은 이미 아이언히트 한 대를 배정 받고, 열심히 기가스 조종을 연습하는 중이다.

왜일까?

문수르는 어째서 제이번에게 기가스 파일럿이 될 기회를 주지 않을까?

‘반골 기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지.’

일단 제이번의 기질이 문제다.

이미 그는 탈영을 시도했던 경력이 있다. 더불어 훈련 동안 가장 훈련 태도가 좋지 못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죽기 싫어서 억지로 훈련을 버티기, 통과한 걸 보면 근성은 대단하지만 그뿐이다.

그런 그에게 이제르트 자작령의 주요한 전력인 아이언히트를 배정하는 건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평생토록 그에게 기가스 파일럿의 자리를 내주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제이번을 훈련에 참가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재능은 있지.’

문수르는 봤다.

제이번은 분명 재능이 있다. 솔직히 그 재능은 기사들의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기사들보다 성과가 늦게 나타난 건 기본기가 부족해서였지, 재능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잘 키우면 훌륭한 인재가 될 인물이다.

더불어 제이번이 정말 이제르트 자작가를 위해 싸우고, 그 대가를 받는다면 이제르트 자작가의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비전이 될 것이다.

탈영을 시도할 정도로 반골인 자도 열심히 훈련 받고, 노력해서, 영주에게 충성하면 대가를 준다!

케르빈 월드에서는 파격 중의 파격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케르빈 월드에선 배신자에 대한 대우가 최악이다.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삼대를 죽이는 건 보통이다. 자신의 심기를 거슬렀다거나, 명령을 한 번 위반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을 치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계다.

탈영?

이유불문, 무조건 사형이다.

부모가 죄를 지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식에게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고, 오히려 모든 권리를 박탈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탈영을 했고, 상관에게 욕까지 했던 자에게 기가스 파일럿이 될 기회를 준다는 것.

매력적이다 못해 놀랄 만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결국 충성심이란 결과로 나올 것이다.

사실 이제르트 자작가 내에서 모든 병사들이 이제르트 자작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건 아니다.

존경은 한다.

하지만 그 존경심과 충성심이 절대적인 건 아니다. 누군가는 솔직히 어쩔 수 없이 이제르트 자작령에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제이번의 등용은 그런 그들에게 비전을 제시해줄 것이다.

9.

제이번은 문수르를 보자마자 몸이 굳어버렸다.

“아, 안…….”

인사를 해야 하는데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이번은 문수르 밑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정말 지옥을 경험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적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자살 시도도 두 차례나 했다.

훈련 덕분에 오러를 느끼는 경지, 오러 나이트의 경지에 오르게 된 제이번이지만 그에게 문수르는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래도 기어코 인사를 건네는 제이번의 모습에 문수르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제이번, 그쪽은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동안 불만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우렁차게 소리를 내지르는 제이번. 그러나 겉으로 표현하는 것과 속마음은 달랐다.

‘빌어먹을, 그냥 날 놔주던가.’

제이번이 바보도 아니고, 오러 나이트가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잘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르트 자작령만 벗어나면, 제이번의 인생은 활짝 펴는 것이다. 물론 반대로 이제르트 자작가가 자신을 쉽게 놓아줄 리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아니면 제대로 대접을 해주던가.’

이제르트 자작가를 떠날 수 없다면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대우를 받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오러 나이트면 기사 작위는 힘들더라도 기사 대우는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것도 나쁘진 않다.

특히 자신과 같이 훈련을 받은 이들이 나중엔 기가스 파일럿 훈련을 받는 것을 보면서 솔직히 기대감을 품었다.

기가스!

모든 병사들의 꿈이다.

병사 수백 명이 모여봐야 기가스 한 대를 어찌하지 못한다. 반대로 말하면 기가스 한 대만 있으면 병사 수백 명이 어찌하지 못하는 적도 쉽게 무찌를 수 있다.

기가스의 그런 무차별적인 폭력과 강력한 힘은 모든 병사들에게 공포이자, 동경이었다.

그 때문에 기대감은 더 컸다.

기가스 파일럿이 될 수 있다면, 기가스를 다룰 수 있다면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 행복 이면에는 금전적인 문제, 생활과 관련된 문제도 있었다. 적어도 케르빈 월드에서 기가스 파일럿을 푸대접하는 영주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기가스 파일럿의 실력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겠지만, 평균 수준의 실력만 가지고 있다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없다.

만약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제이번, 자신이 기가스 파일럿이 된다면 적어도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을 수 있을 터.

그러나 문제는 제이번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당연하겠지.’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제이번 역시 이해하고 있었다.

‘탈영병에게 기회는 무슨…… 살려준 게 어디야.’

자신이 영주라면 절대 자신 같은 놈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아니, 목숨을 살려준 것 자체가 기적이며, 놀라울 정도의 은총이다. 막말로 지금 당장 이제르트 자작이 발을 핥으라고 하면 핥을 자신이 있다. 충성심이나, 존경심 때문에 아니다. 살려준 사실에 대한 보답 때문이다.

하물며 그런 자신에게 기가스를 운행을 기회를 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자신이 어떤 허튼 수작을 부릴 줄 알고?

‘젠장…….’

이렇게 되니 조금 아쉬웠다.

카롤 말대로 열심히 훈련을 받았다면, 탈영을 시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러 나이트가 되었다면…….

‘그때 탈영만 시도하지 않았어도 기가스 파일럿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제이번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반대로 탈영을 시도하지 않았다면 문수르로부터 훈련을 받는 기회도 없었겠지.

어쨌거나 이런 제이번 앞에 다시금 문수르가 등장했다. 제이번은 자세를 최대한 낮췄다.

“그, 그보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제이번.”

문수르는 질문 이전에 제이번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아직도 탈영하고 싶습니까?”

“아닙니다!”

제이번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대답을 했다. 물론 속마음은 대답과 정반대였다.

‘기회만 생기면 당연히 하고 싶지.’

기회만 생기면, 틈만 생기면 당연히 도망칠 것이다. 문제는 그 기회도, 틈도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지.

그러나 이런 속마음을 대놓고 드러낼 정도로 멍청했으면 애초에 탈영을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무조건 비위를 맞춰야 한다.

“솔직히 말해보시죠. 이제르트 자작령을 떠나서 호사를 누리면서 살고 싶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까?”

“절대 아닙니다!”

재차 아니라고 말하는 제이번. 그러나 그의 이마에서는 땀이 송긍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솔직히 제이번은 지금 문수르가 자신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으면서 자신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젠장…….’

절로 욕이 나왔다.

그런 제이번에게 문수르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만약 탈영이 아니라, 이제르트 자작의 허락을 받아 영지에서 나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건…….”

탈영이 아닌 다른 방법이라고?

“잘……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무조건 나간다, 였다.

“아마 이제르트 자작가에 소속된 병사들 대부분은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영지를 떠날 겁니다. 이상한 게 아니죠. 당연한 일입니다.”

“아니, 그건…….”

“하지만 말입니다. 지금 당장 이제르트 자작령을 떠난다고 해서 정말 살기 좋아질 것 같습니까?”

“예?”

드디어 본론을 말하는 문수르.

“요즘 지내는 게 어떻습니까? 만족스럽습니까?”

“만족스럽습니다.”

제이번의 이번 대답은 진심이었다.

사실 제이번은 당장 오늘 하루 만큼은 충분히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일단 오늘 하루만 다섯 끼를 먹었다. 보통의 식사 세 끼에 훈련 사이사이마다 두 끼를 더 먹었다.

솔직히 이건 다른 영지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호사 중의 호사였다. 제 아무리 추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식량이 많다고 해도 다섯 끼를, 그것도 매일 푸짐하게 먹는다는 건 꿈조차 꾸기 힘든 일이다.

훈련이 힘들긴 했지만, 솔직히 이제는 익숙해져서 힘든 훈련도 일상처럼 받아들여진다.

또한 훈련의 소중함도 알고 있다. 훈련에서 흘린 땀은 미래에 흘릴 핏물과 똑같았다. 열심히 땀을 흘려 놓으면, 나중에 피를 흘릴 일이 적어진다는 의미다.

어차피 훈련을 대충 해서 피해를 보는 건 본인이다. 전장이란 그런 곳이니까.

훈련에도 불만은 없다.

그럼 생활환경은? 굉장히 만족스럽다. 제이번은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었고, 집에는 가족들이 잘 지내고 있었다. 동생은 요즘 학교라는 곳에서 글을 배우는 중이기도 하다.

‘굉장히 좋지.’

딱 하나, 테블스 산이란 악몽 같은 땅만 제외하면 이제르트 자작령은 지상 낙원이나 다름없다.

‘응?’

그 순간 제이번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솔직히 이제르트 자작령 살만하지 않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렇게 크게 말할 필요 없습니다. 오늘은 제이번, 당신과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찾아온 겁니다.”

“예?”

“탈영하고 싶은 마음 이해합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건…….”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는 게 마찬가지라면 보다 가치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게 훨씬 이익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문수르는 계속 말했다.

“이제르트 자작령은 여전히 위험합니다. 테블스 산을 개간한다고 하지만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또한 주변 영주들은 죄다 적이나 다름없는 처지. 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제이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령에는 미래가 있습니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제이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르트 자작령은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더 살기 좋은 곳이 되겠지요. 그럼 그때 가서 어떤 모습으로 있는 게 제이번,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다.

기사가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

“제이번, 당신에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조만간 체가스 자작가가 우리 영지로 쳐들어올 겁니다. 그러면 그때 체가스 자작가 소속의 기사들 중 세 명의 목을 잘라 오십시오.”

“예?”

“자신 없습니까?”

병사도 아니고 기사들의 목을, 그것도 세 명이나 되는 기사들의 목을 잘라오라니?

그러나 의외로 제이번은 그게 마냥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이번은 단순한 검술 외에 많은 기술을 배웠다. 암살 역시 전문적으로 배운 건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기술들을 다수 배웠다.

그것들을 이용하면 솔직히 기사들을 처치하는 게 불가능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직 제대로 오러를 이용한 검술을 배우진 못했지만 제이번은 분명한 오러 나이트다.

‘확률은 절반이다.’

제이번이 대충 계산을 하니, 성공할 확률과 실패할 확률이 똑같았다.

결국 도박이다.

그리고 이 도박에서 성공한다면…….

“기사 세 명의 목. 그걸 가져오면 당신의 능력을 인정해드리겠습니다. 탈영에 대한 사실은 기록으로만 남기겠습니다. 당신에게 기가스 파일럿이 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탈영병이란 오점을 남긴 채로 기가스 파일럿이 될 수 있다.

제이번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정도로 거짓말을 즐겨 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하, 하지만 제가 그냥 도망친다면…….”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문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내 문수르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제르트 자작령…… 이제는 다른 곳보다 훨씬 살만하지 않습니까?”

그때였다.

문수르의 콧잔등 위로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르트 자작령의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제이번은 저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 위에서 내리는 눈을 보자, 제이번의 눈앞에 몇 가지 추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추억이 제이번의 눈빛을 달리 만들었다.

“혼자서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카롤이란 병사가 있습니다. 제 친구이자, 저보다 훨씬 뛰어난 녀석입니다. 녀석과 함께라면 기사 다섯의 목도 베어올 수 있습니다.”

문수르는 그런 제이번의 제안에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싶었다.

“좋습니다. 그럼 다섯을 베어오세요.”

그러나 문수르는 질문 대신 허락을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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