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5.
“으악!”
체가스 자작은 미칠 지경이었다.
“또! 또!”
영지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의 집 세 채가 불에 타 재가 되어버렸다. 네 번째 방화였다.
“빌어먹을! 대체 어느 쥐구멍으로 오는 거야!”
대비는 했다.
모든 병사들을 동원해 경비를 세웠다. 영지 곳곳에 횃불을 켜놓아서 시야를 확보했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영지민들에게 무기를 쥐어주고, 그들이 보초를 서게 만들었다.
영지의 모든 저력을 침입자를, 방화범을 막는데 투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방화범들은 유유히 불을 지르고 떠났다.
사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영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영지 크기에 맞는 병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체가스 자작가는 그 병력이 필요병력의 절반에 간신히 미치는 수준이었다. 병사를 이용해 경비를 세워도 헛점이 생겼다. 억지로 영지민을 데려다가 경비를 세운다고 해도, 아무런 훈련도 받지 못한 영지민이 제대로 된 경비를 할 리 만무했다.
오히려 어설프게 영지민들을 보초로 빼돌리는 바람에, 정작 방화의 주체가 되는 집들이나 건물들은 빈집, 빈건물이 되어버렸다. 방화가 일어나도 즉각 대응이 불가능했다.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고 있을 때였다.
물론 대비를 하면 할수록 피해가 줄어들긴 했다.
처음에는 식량창고가 불탔고, 두 번째 방화로는 성 내의 저택 두 채가 불탔다. 세 번째는 내성 내에 위치한 건물이었고, 네 번째는 평민들이 거주하는 보통의 집이었다.
방화는 계속될수록 경비가 늘어난 탓에 방화범들도 목표를 낮게 잡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체가스 자작에게는 결코 위안이 되는 사실이 아니었다.
이렇게 대비를 함에도 방화가 계속 일어난다는 것, 무엇보다 이제는 상대의 꼬리조차 잡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해!’
심중은 굳었다.
항의의 의사가 담긴 편지를 보냈을 때, 이제르트 자작은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변명조차 없었다.
빅토리안 공작의 이름을 팔았음에도 그렇게 행동했다는 건, 분명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두 번째 방화가 있었을 때 체가스 자작은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방화범을 잡아서 이제르트 자작, 네놈이 범인이란 걸 증명하겠다!”
현장에서 범인을 잡으면 그게 증거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 증거만 있으면 이제르트 자작을 무너뜨리는 건 일도 아니다. 이미 콩탄 왕국에서 가장 지탄 받는 귀족이 이제르트 자작 아닌가? 명분만 있으면 모두가 이제르트 자작가를 공격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질 못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방화는 계속되는데, 정작 방화범은 잡지 못하고 있었다.
흔적도 찾지 못했다.
피해는 점차 줄어들지만, 체가스 자작은 방화범을 잡지 못했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잡아야 해!’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돈을, 더 많은 인력을 추가해 경비를 강화했다. 영지민들을 더 강제로 데려와 영지 곳곳에 보초로 세웠다. 악에 바친 것이다. 이제는 피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잡는 것!
그게 최우선 과제였다.
범인을 잡고, 그 배후에 이제르트 자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전까지는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수르가 기다리던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6.
체가스 자작의 편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제르트 자작가로 향해 날아왔다.
내용은 대개 비슷했다.
“오늘도 또 왔군.”
“그렇습니까? 체가스 자작은 지겹지도 않은 모양이군요.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보내다니.”
“나름 절박한 거겠지.”
자신 뒤에 있는 빅토리안 공작이 결코 이제르트 자작가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체가스 자작이 보내는 편지의 내용은 대개 그러했다.
때문에 이제르트 자작은 굳이 편지를 개봉해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편지를 그대로 자신의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이제 슬슬 때가 오겠군.”
말을 뱉는 이제르트 자작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굳어 있을 수밖에 없다.
도발은 끝났다.
이제까지 한 도발은 놀라우리만큼 체가스 자작을 뒤흔들었다. 너무나도 효과가 넘쳐서 놀랄 정도였다.
그러나 도발은 결국 도발이다.
슬슬 방화를 하는 것도 힘들어진다. 방화의 목표가 점차 하향되는 게 대표적인 이유였다.
조만간 성을 넘는 것조차 힘들어질 것이다.
아니, 이제까지 그 험한 경비를 뚫고 성을 넘은 것 자체가 기적이다.
많은 훈련과 연습 그리고 정예 중의 정예만 골랐고, 철두철미한 사전 조사와 놀라울 정도의 협동력을 보여준 건 맞지만, 솔직히 이 정도까지 해낼 줄은 몰랐다.
만약 정말 이제르트 자작이 체가스 자작을 죽일 속셈이 있었다면……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일을 할 각오가 있었다면 체가스 자작은 진즉에 죽었을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첫 번째 공격 당시 서른 명이 아니라, 이백 명이 투입됐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체가스 자작의 암살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제르트 자작가도 피해가 적지 않을 터. 때문에 이렇게 도발만 계속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도발도 끝이다.
도발은 성공했다.
체가스 자작은 이제르트 자작이라면 이를 가는 처지가 됐다.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다.
그러면 뛰쳐나오게 만들면 된다.
“일을 진행하도록 하지.”
구실만 만들어주면 된다.
이제르트 자작은 이미 써두었던 편지를 준비한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는 이제르트 자작가의 인장을 찍었다.
그렇게 열 장의 편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편지를 필로스 왕이 있는 왕도와 불스 백작가 그리고 주변 영지에 보냈다.
7.
이제르트 자작가의 편지는 이제르트 자작가가 위치한 변방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이제르트 자작이 도움을 요청해?”
“말도 안 되는 말이군. 베르베 백작을 상대할 정도의 힘을 가진 이제르트 자작이 다른 영지에 도움을 요청하다니?”
“이제르트 자작이 미친 게 분명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우리가 순순히 도와줄 것 같았나?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처음에는 이제르트 자작이 미친 거라고 혹은 아주 정신이 나간 거라고 생각됐다.
애초에 변방에서 이제르트 자작을 곱게 보는 귀족은 없었을 뿐더러, 베르베 백작을 이길 정도로 강력한 전력을 가진 이제르트 자작이 굳이 자신을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편지 내용은 구구절절했다.
그리고 편지 내용은 충분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글을 통해 말했다. 베르베 백작과의 전쟁 이후 이제르트 자작령은 굉장히 상황이 좋지 못하다고.
그런 상황에서 테블스 산의 몬스터가 겨울이 되어 날뛰니 도무지 버틸 도리가 없다고.
제발 부탁이니, 이제르트 자작가를 도와달라고.
“하긴, 베르베 백작이 보통 인물인가? 그런 그를 막았다고 해도 이제르트 자작가가 아무런 피해 없이 막았다는 건 불가능하지.”
“그때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모양이야.”
“하물며 배상금을 얻었다고 해도, 영지민 숫자가 적은 이제르트 자작이 빠르게 병력을 확보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용병들조차 거부하는 땅이 이제르트 자작령 아니었던가?”
생각해보면 이제르트 자작이 무사할 리가 없었다.
보우런 남작과의 영지전 이후 베르베 백작과 전면전을 치렀다. 승리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기적은 거기까지다.
이제르트 자작은 원래 그냥 놔둬도 곧 몰락할 영지였다.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이 무시무시하다는 건 콩탄 왕국의 세 살 짜리 꼬맹이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또한 모든 일이란 게 그렇다.
한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평화로워 보이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한계에 도달한 이후에는 급격한 변화가 생긴다.
이제르트 자작가 역시 베르베 백작과의 일전 이후 어느 정도 버티긴 버텼을 것이다.
베르베 백작으로부터 받은 배상금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다. 더군다나 전쟁이 일어난 땅은 이제르트 자작령 아닌가?
땅이 초토화가 되었을 것이다. 농지가 작살이 났겠지. 올해 작황이 좋을 리 만무하다.
베르베 백작의 병력을 상대하다보면 영지민도 적지 않게 죽었을 터! 추수의 계절에 손이 부족해 그냥 버리게 된 곡식도 적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성벽이 무너지고, 병력이 피해를 입었다면 이후 계속되는 테블스 산의 몬스터와의 전쟁에서 피해가 더 커졌을 것이다.
이런저런 상황을 보면 지금 이제르트 자작가는 바람 앞의 등불, 낭떨어지 끝에 매달린 어린 아이와 마찬가지였다.
체가스 자작은 그 사실을 다른 인근 영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체가스 자작의 눈빛이 빛났다.
“오호라, 이제르트 자작가의 상황이 그 정도로 나쁘다, 이 말이지?”
처음 이제르트 자작가에 대한 적의를 가졌을 때, 솔직히 두려움 반, 걱정 반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르베 백작마저 무너뜨린 이제르트 자작가에 비하면 체가스 자작가의 전력은 조족지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렇게 겁부터 먹은 탓에 합리적인 생각을 못했다. 비단 체가스 자작만 그런 건 아니다. 이제르트 자작가 근처에 있는 대부분의 영지의 영주들이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제르트 자작가를 절대 놀라게 해선 안 돼!
괜히 이제르트 자작에게 시비를 걸었다간 국물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이제르트 자작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제르트 자작가가 제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베르베 백작과 전면전을 벌이고 무사할 리가 없지 않은가?
반대로 이제까지 주변 영주들에게 많이 시달렸던 이제르트 자작가가 힘이 있음에도 가만히 있을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제르트 자작가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흐흐흐, 이러면 이야기는 다르지.”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이제르트 자작가는 지금 힘이 거의 빠진 상태나 다름없다.
툭 치면 쓰러질 상황이다.
체가스 자작은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 어차피 콩탄 왕국은 빅토리안 공작 각하를 모시는 파벌과 제이머스 후작 파벌로 나뉘어서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전면전이 벌어졌다.
이제는 누가 더 많은 공을 세웠는가, 그게 중요한 시점이 됐다.
‘가뜩이나 빅토리안 공작 각하에게 눈엣가시나 다름없는 이제르트 자작가 아닌가?’
더불어 이 상황에서 이제르트 자작가는 뜨거운 감자나 마찬가지였다.
베르베 백작을 무너뜨린 이제르트 자작가는 빅토리안 공작 파벌에게 있어 숙명의 적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반대로 이제까지 빅토리안 공작 밑에 들어갔음에도 이러다할 기회를 잡지 못했던 이들에게 이제르트 자작가는 자신의 이름값을 높이고, 빅토리안 공작의 총애를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사냥감이기도 했다.
이제르트 자작가만 몰락시킬 수 있다면 빅토리안 공작의 아낌없는 지원은 분명하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르트 자작가를 무너뜨리면 그 이름값이 베르베 백작가와 동급이 된다.
베르베 백작은 콩탄 왕국의 백작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단한 자였다. 그런 그와 동급의 이름값을 가진다는 건 돈을 주고도 쉽게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체가스 자작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차피 이제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이제르트 자작가다.’
그는 상황을 정리했다.
이제르트 자작가는 지금 굉장히 약해진 상황이다.
또한 지금 빅토리안 공작 파벌과 제이머스 후작 파벌이 전면전을 벌이는 중이다.
이제르트 자작가는 제이머스 후작 파벌 소속이다.
때문에 명분 없이 이제르트 자작가를 친다고 해도, 빅토리안 공작을 비롯해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 사실을 용납해줄 것이다.
여기에 추가로 체가스 자작은 이제르트 자작가를 향해 극도의 분노를 느끼는 중이다.
‘흥!’
더 이상 정리는 필요없다.
이렇게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체가스 자작이 이제르트 자작가를 공격할 이유는 충분했다.
‘오냐, 내가 기가스를 이끌고 직접 이제르트 자작령 전부를 불태워주마. 진짜 불장난이 뭔지 알려주지!’
분노도 풀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이익도 얻을 수 있는 일거양득의 기회가 온 것이다.
이걸 가만 두고만 보면 바보 멍청이겠지.
“여봐라!”
체가스 자작은 곧바로 기사들을 불렀다.
“출전(出戰)을 준비해라!”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